◈ 17화 Chapter 6: 제국 (1)
「“구해 줘…….”」
「마왕을 앞에 둔 용사는 눈앞에서 애원하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괴로워 보이는 검은색 눈동자와 창백한 얼굴.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길게 늘어선 핏빛 망토와 검은 머릿결이 여성의 신분을 말해 주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용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리고 믿기 싫은 현실에 결국 고개를 돌려 현실을 외면했다. 이제 그의 앞에 있는 건 그저 ‘악’일 뿐이었다.」
「“……배제한다.”」
「씹어 삼키듯이 넘어간 목소리와 함께 마치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이 성검이 불을 토했다. 그것은 싸움이 아니었다. 그저 일방적인 집행에 불과한 그 행위에 곧 성검이 붉은 피로 물들었다. 너도 피는 붉구나. 용사는 피로 물든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금방 끝날 거야.”」
「누구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그녀에게 했다고 생각한 그 말은 사실 용사 스스로에 대한 위안에 불과했다. 이내 쓰러진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성검에 의해서 배제당한 그녀의 몸은 더 이상 물질적인 형체를 이루지 못했다. 서서히 흩어져 가는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워.”」
「그녀의 말을 들은 용사가 피가 나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스스로가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그녀가 하는 말이 그저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아…….”」
「용사는 그제야 자신이 저지른 일을 깨달았다. 그가 한 행위는 용사의 의무인 세상의 구원도, 기나긴 여정 끝에 사악한 마왕을 무찌른 것도 아니었다. 그 너무나도 단순한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너무나도 먼 길을 왔다. 용사는 그만 주저앉았다.」
「“신이시여…….”」
「용사는 기도했다. 이제 더 이상 그에게 남은 건 없었다. 그의 기도에 신이 화답한 것일까. 아니면 의무를 다한 장기말의 효용성이 다한 것일까? 그의 전신에 넘쳐나던 ‘용사의 힘’이 서서히 흩어져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가 더 이상 ‘용사’가 아니게 되었을 때, 그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그는 그때가 돼서야 지금까지 미처 보지 못했던 현실을 바라볼 수 있었다. 무언가 잘못돼도 한참은 잘못됐다.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미 모든 것은 늦은 뒤였다. 그는 다시는 지울 수 없는 피로 물든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오열했다.」
* * *
“…….”
뭔 개꿈이야?
잠에서 깬 뒤에 반사적으로 가장 먼저 하늘을 올려다보니 꿈속의 우중충함은 어디 갔는지, 여전히 구름은 맑았고 햇빛은 쨍쨍하기 그지없었다.
「일부 독자가 불친절한 장면전환에 불만을 토로합니다!」
아무래도 저 개꿈을 나 혼자 본 것만은 아닌 모양.
그리고 그렇다는 이야기는, 지금 내가 본 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내가 눈을 뜨자 그제야 옆에서 뺀질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이야기 듣다가 잠드는 버르장머리는 어디서 배웠어?”
묘하게 낯이 익은 얼굴. 아니, 그보다는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심드렁한 표정의 베른을 보자, 그제야 잠들기 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는 제국으로 향하는 루의 등 위에서 베른에게 ‘제국’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고, 그 와중에 아무래도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러게 안 지루하게 잘 설명했어야죠.”
내 말에 베른의 표정이 황당으로 물들었다.
“뭐?”
당연한 이야기지만, 학생이 공부를 못하면 당연히 선생 탓이다. 괜히 비싼 돈 주고 비싼 과외 선생을 쓰겠는가.
「학업에 관심이 없는 소수의 독자가 당신의 주장에 적극 찬성합니다!」
「교육계에 종사하는 일부 독자가 당신의 개논리에 강력하게 반박합니다!」
베른의 찌푸려진 얼굴을 보니, 왠지 아까부터 느껴지는 기묘한 기시감이 계속해서 거슬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지금의 나는 할 일이 태산같이 많았고, 저런 복선에 일일이 반응해 줄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우려는 곧 눈앞에 나타났다.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일부 독자가 당신이 꾼 꿈에 대한 해몽을 원합니다!」
거봐라.
“귀찮게.”
“왜 그래?”
베른의 얼굴을 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울렁임이 밀려왔다.
이 느낌이 무엇인지는 굳이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약속된 전개가 당신의 행동을 재촉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궁금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넘어가 주기에는 내 성격이 너무 나빴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 세계가 부서지는 것이었고, 그 세계의 법칙인 클리셰를 무너뜨리는 것은 내 목적에 가장 빨리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런 기회를 놓칠 리가 있겠는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디까지 설명했었죠?”
「다수의 독자가 결국 풀리지 않는 떡밥에 대해서 크게 아쉬워합니다!」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0.22%」
……뭐야?
별로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클리셰 붕괴율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섣부른 추측은 금물이었다.
[클리셰]로 인해서 잠시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며 베른이 말했다.
“제국에 대해서는 들었었지?”
“거기까지는 들었어요.”
제국.
베른의 설명에 따르면, 이 거대 국가는 별다른 이름 없이 오직 ‘제국’이라는 이름으로만 불린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이 세계에서 ‘제국’이라고 불릴 수 있는 국가는 오직 한 국가뿐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좋아, 그러면 계속할게. 현 제국 황제인 카이로 2세는 패왕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내였지. 온갖 부정한 것들이 모여 사는 서쪽에 제대로 된 국경을 세운 것도 그가 최초이며, 갈가리 찢어져 있던 대륙을 일통했다 할 만한 업적을 세운 것도 그가 최초였어. 하지만 그 역시도 세월은 피할 수 없었던 모양이야.”
“그렇군요.”
뭐, 그 뒤로는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뻔했다. 황제가 죽을 날이 다가왔으니, 세 명이나 있는 황자들이 서로 황제가 되겠답시고 신나게 황위 다툼을 벌이다가 나라가 갈가리 찢겨져 나가고 있는 상태라는 거겠지.
“황자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 있어요?”
내가 굳이 ‘제국’으로 온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세계를 부수려고 하면 근본적으로 [악]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용사]인 [주인공]은 바로 그 [악]을 척결해야만 하는 의무를 갖고 있다.
문제는 그 [주인공]을 평범한 방법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설사 제국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가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주인공]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했다. 바로 [주인공]에 준하는 존재가 되면 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비중]의 증가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름을 날린다고 해야 할까?
“글쎄…… 들려오는 소문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신용할 만한 건 못 돼서.”
“괜찮으니까 말해 봐요.”
아마 베른은 평생 깨닫지 못하겠지만, 사실 이 세계에서 진정한 정보원은 사방에 눈과 귀가 깔렸다는 도둑 길드도, 태어났을 때부터 도구로서 길러진 제국의 비밀 요원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도둑 길드나 비밀 요원들이 천문학적인 착수금을 받고 오랜 준비와 철저한 계획 아래에 얻어낸 정보를 언제 어떻게 알아냈는지, 지나가던 여행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 준다. 그것도 공짜로.
그래서 그들이 누구냐고?
“이건 잡화점의 벨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말이야…….”
누구긴, 그냥 옆집 아줌마다.
정보의 출처를 생각해 보았을 때, 100%까지는 못 되더라도 아마 95% 이상의 놀라운 적중률을 보여주리라.
「일부 독자가 소문에 휘둘리는 당신을 못 미더워합니다!」
저예산 고효율의 정보 취합이라고 말해 주면 고맙겠다만.
“어쨌든, 요약하자면 현재 상황은 일황자 리안이 장자에다가 적통이고, 세력도 제일 강성해서 현재 가장 유력한 황태자 후보로 거론되고 있어. 바로 그다음이 이황자인 사이먼. 사이먼은 외삼촌이자 서쪽 국경을 책임지고 있는 실베스터 공작의 비호 아래 일황자의 바로 뒤를 잇는 세력을 소유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외가의 피를 짙게 이어받아서 본신의 검술과 마법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고 해. 더군다나 최근에는 정령술까지도 섭렵했다고 하더군. 그리고 마지막으로 삼황자인 닐은 막내인 데다가 세력도 가장 약하고, 매일 서재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는 통에 사교성도 별로라는 소문이 많아. 현재로서는 황위에서 가장 먼 셈이지.”
역시나 그런 식인가.
그렇다면 내가 어디에 줄을 설지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베른이 말했다.
“역시 황위 다툼에 끼어들 생각이야?”
“당연하죠.”
지금 상황에서 그것만큼 [비중]을 화끈하게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만약 다음 황제가 결정 난 뒤로 비슷한 효과를 거두려면 막말로 반란이라도 일으켜야 하는데, 그러면 난이도가 훨씬 더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어느 쪽에 붙을 건데?”
“당연히 제일 불리한 쪽에 붙어야죠.”
「일부 독자들이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그래야 내 활약이 돋보일 것이고, 그만큼 [비중]도 더 많이 오를 테니까 말이다.
베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도 지금까지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내심 디오에게 패배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하긴, 그에게 있어서 ‘용사의 힘’은 결과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니 그렇게까지 집착할 이유도 없기는 했다.
“그렇다면 삼황자인가.”
“미쳤어요? 제가 불리한 쪽에 붙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삼황자가 제일 불리한 거 아니야? 막내인 데다가 세력도 가장 보잘것없잖아. 더군다나 사교성도 없으니 인맥이 넓지도 않을 테고.”
「일부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 그런 삼황자니까 더욱 뒤에 숨겨진 무언가 있겠죠. 목숨이 걸린 황위 다툼에 설마 아무런 뒷배도 없이 끼었겠어요?”
예를 들면, 황궁 비밀 서재에서 ‘무언가’ 발견했다던가. 아니면 미지의 세력과 결탁했다던가.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이거나 말이다.
「소수의 독자가 당신의 명석함에 감탄합니다!」
“그러면…… 이황자?”
“그냥 다시 농사나 지으러 갈래요?”
“아, 몰라! 그래서 누구한테 붙을 건데!”
사실, 이건 그냥 둘러대기 위한 말이었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 진부한 세계에서 가장 유력한 황위 계승자라는 말은, 사실은 가장 먼저 죽어 나자빠질 사망 1순위라는 뜻이었으니까.
더군다나 걸리는 점들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 선택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린, 일황자에게 붙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