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Chapter 6: 제국 (2)
[도착이다.]
루의 말과 함께 마침내 찬란한 문명을 이룩한 제국의 수도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도의 활기가 절로 느껴질 정도로 개미 떼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과 하나의 나라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웅장하게 드러난 황궁의 모습.
그 광경을 본 하이디가 조용히 감탄했다.
“예뻐…….”
“그렇지?”
그렇게 말하는 베른의 표정은 자랑스러움과 씁쓸함이 함께 묻어나 있었다.
“……녀석들은 잘 있으려나 모르겠네.”
「소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읊조림에 주목합니다!」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과거의 망령] 성향이 증가합니다!」
나는 베른의 읊조림을 애써 외면했다. 무슨 걸어 다니는 복선 덩어리도 아니고, 저런 거에 일일이 반응해 줬다가는 제때 끝낼 일도 질질 끌리기 마련이었다.
「일부 독자가 당신의 무심함에 탄식합니다!」
무심이 아니라 무시다.
“자, 그럼…….”
제도까지 도착한 이상, 이제 문제는 일황자에게 어떻게 접근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베른, 일황자에게 가장 쉽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 하나만 말해 봐요.”
“그야…… 우선, 우연을 가장해서 안면을 익혀 둬야겠지. 황궁 주최의 무도회나 일황자와 관련된 귀족들과 연줄을 만드는 것도 방법일 테고. 마침 제도에 내 지인들이 있을 테니, 거기부터 천천히 시작해 보자고.”
누가 진부한 아저씨 아니라고 할까 봐, 나오는 말도 진부하기 짝이 없었다.
“오케이, 그러면 그거 빼고 갑시다.”
“……뭐?”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진부한 방법이었다.
만약 베른의 방법을 따랐다가는 가장 먼저 베른의 지인이라는 변경백을 만나서 차 한 잔 마시고, 그 후에 변경백의 소개로 만난 후작 부인을 만나서 차 한 잔 더 마시고, 그다음에는 후작 부인의 조카라는 황궁 경비 책임자랑 술도 한잔하고 그러다 보면 어영부영 시간이나 잡아먹다 그 후에 갑작스럽게 ‘우연히’ 벌어진 이상한 일에나 엮일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내가 그런 시간 낭비, 동선 낭비가 빤히 보이는 계획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루.”
내가 루를 부르자, [언약]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내 의도를 알아챈 루가 대답했다.
[……황궁은 방어력만 보자면 페론 마탑보다도 훨씬 더 견고한 마법 방어진이 설치되어 있다. 억지로 뚫고 갈 수야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양측에 상당한 피해가 생길 텐데?]
“상관없어.”
[……알았다.]
순식간에 끝난 나와 루의 대화에 무엇인가 이질감을 눈치챈 베른이 당황하며 외쳤다.
“잠깐!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가만히 보고 있어요. 책임지라고는 안 할 테니까.”
“책임져야 할 만한 일을 한다는 거 아니야!”
「일부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당황스러움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어느새 황궁의 하늘 위에 도착한 루의 몸이 맹렬하게 지상을 향해서 돌진하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
순식간에 활강하며 수직으로 내려꽂히는 루의 몸에 올라타 있는 기분은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꺅!”
그와 함께 비명을 지르며 갑작스럽게 중심을 잃고서 나에게 안겨든 하이디에게 익숙한 물컹거림과 함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한 음란서적 애독자가 공명도 울고 갈 당신의 놀라운 수읽기에 감탄합니다!」
「일부 독자가 그 의견에 강하게 동의합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변태] 성향이 증가합니다.」
……저 망할 놈이.
아무래도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나 보다. 왠지 갑자기 하이디의 시선이 조금 차가워진 기분이지만 기분 탓이겠지.
어느새 하이디가 은근슬쩍 나에게서 조심스럽게 떨어지며 말했다.
“……미안. 조금 떨어져 있을게.”
“…….”
왜 갑자기 사춘기 딸을 둔 아버지의 심정이 이해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응원하고 싶어졌다.
「일부 독자가 당신의 위로에 눈시울을 붉힙니다!」
……그러면 나도 힘내지 뭐.
그렇게 나에게 생긴 마음의 상처가 아물 틈도 없이, 루의 몸이 황궁을 둘러싼 마법 결계를 내리찍었다.
까가강!
그것은 힘과 힘의 겨루기였다. 하지만 제아무리 제국의 황궁을 지키고 있는 마법 결계라지만, 루 정도의 드래곤이 작정하고 뚫고자 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드래곤이 나타났다!”
“전 기사단 소집령을 발령한다!”
“근위병! 근위병들은 어서 폐하와 황자님들을 모셔라!”
새삼 느껴지지만, 루와 [언약]을 맺은 것은 이 빌어먹을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일어난 일 중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다. 만약 드래곤인 루가 없었더라면 베른의 머저리 같은 계획에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따랐을 테니 말이다.
“이곳에서 두 번째로 큰 궁으로 들어가자.”
필시 그곳이 이 황궁 안에서 황제 바로 다음의 권력과 힘을 가진 일황자의 처소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굳이 직접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를 태운 루의 거체가 황궁의 하늘 위를 거닐자, 근위병들과 시녀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 설마 일황자님을 노리고 온 것인가!”
“어서 빨리 일황자님을 모시고 이곳을 빠져나가라!”
“집사장! 집사장은 무얼 하는가! 어서 일황자님을 모시지 않고!”
친절한 것도 저 정도면 병이었다.
그렇게 모든 시선이 루를 향해서 쏠려 있는 사이, 내가 은근슬쩍 베른과 함께 루의 등 위에서 내리며 말했다.
“하이디, 너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알겠어.”
내가 하이디를 루와 함께 이곳에 남기는 이유는 지금 가려는 곳이 위험해서였지, 결코 하이디가 부담스러워서 피하는 건 아니었다. 정말로.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구차한 변명에 혀를 찹니다!」
「사춘기 딸을 둔 한 독자가 당신의 구차한 마음을 이해합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비굴함] 성향이 증가합니다!」
이제는 될 대로 되라 싶었다.
내가 고개를 돌려서 베른에게 말했다.
“가시죠.”
“……그래.”
베른은 이 어이없는 계획이 통한다는 사실에 황당해하면서도 순순히 내 뒤를 따랐다.
소란스러운 와중에 우리가 궁을 향해서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기자, 그곳에서 열 명가량의 기사들의 호위를 받는 한 무리가 궁을 빠져나가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뻔했다.
머리가 나쁜 것도 정도가 있지, 침입자가 나타났는데 저렇게 도망가면 침입자한테 자신의 위치를 광고하는 꼴밖에 더 되겠는가?
물론, 지금은 그 덕에 일황자의 위치를 찾게 되었으니 불평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내가 베른과 함께 그들의 앞을 막아서자, 가장 앞에 선 기사가 호통을 쳤다.
“비키거라!”
아무래도 내 어린 외모 때문인지, 내가 침입자라는 상상은 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하긴, 상식적으로 드래곤이 침입한 마당에 드래곤 외의 다른 침입자를 경계하는 것도 웃기긴 했다.
내가 슬쩍 시선을 돌려서 기사들이 둘러싸고 있는 중앙에 있는 ‘반’보다 한두 살 정도 많아 보이는, 곱상하다 못해 예쁘장하게 생긴 소년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리안 황자?”
“……누구냐?”
“딱 맞춰 왔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
“할 말? 설마…… 드래곤이 침입한 것이 너와 관련된 일이라는 거냐?”
오호, 제법인데.
아무래도 이 거대 제국의 적통이라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맞아.”
“어떻게 한낱 인간이 드래곤과…….”
“그건 내 용건에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야.”
내가 말을 자르자, 리안 황자의 곁에 있던 기사가 검을 빼 들었다.
“불경한!”
“베른.”
내가 나지막이 말하자, 순식간에 움직인 베른의 손가락이 마치 무협지에 나오는 고수처럼 기사의 검을 붙잡았다.
“이게 무슨……!”
제아무리 한심해 보이는 뺀질이 아저씨라지만, 무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용사’와 자웅을 겨루었던 남자다. 당연히 저런 애송이 기사가 대적할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형편없는 검이군.”
베른의 나지막한 말과 함께 그의 손가락에 붙들린 검이 반으로 쪼개졌다.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 어려운 놀라운 묘기였다.
「무협지를 좋아하는 한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활약에 감탄합니다!」
어느새 기사들과 베른이 대치하는 상황이 만들어지자, 내가 자연스럽게 리안 황자에게 다가섰다.
“황자님!”
“소란 떨지 마라!”
과연 호랑이 새끼는 호랑이 새끼라는 건지, 이 상황에서도 제법이었다.
내가 리안 황자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황제가 되고 싶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무슨 말이긴, 잘 알아들었으면서 꼭 이렇게 한 번씩 튕긴다.
“내가 널 황제로 만들어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