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Chapter 6: 제국 (3)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말하는 것이냐?”
오호…… 당연히 된다는 소리를 안 하는 걸 보니 그래도 제법 생각은 있는 녀석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 세계의 기준에서였지만 말이다.
“잘 알지. 아마 너보다도 잘 알걸?”
“그런가.”
생각보다도 훨씬 더 담백한 반응.
사실 저 정도면 거의 중증 쿨병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쿨병에 걸린 한 독자가 등장인물, ‘일황자 리안’의 냉소주의에 동질감을 느낍니다!」
「등장인물, ‘일황자 리안’의 [냉소주의] 성향이 증가합니다.」
그리고 들려온 대답은 더욱 냉기가 풀풀 나는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잘못 찾아왔다. 나는 황제가 될 생각이 없다.”
상당히 파격적인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기사와 시녀들의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을 보니, 평소에 저런 말을 달고 다녔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아마 본인조차도 자신이 결국 황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뻔하다 못해 정석적인 인물상이었지만, 그렇기에 내 손으로 직접 황제로 만들 만한 가치가 있었다.
“누구 마음대로?”
“……뭐?”
“누구 마음대로 황제가 되고 말고를 정하냐고. 너는 내가 선택했고, 그렇기 때문에 황제가 되어야 해.”
「일부 독자들이 당신의 광오한 발언에 주목합니다!」
“오만하구나.”
“자신감이지.”
“하지만 그 오만함이 결국 네 목을 죌 것이다.”
“고작 황제조차도 될 자신이 없어서 쿨병 걸린 척하는 어느 찌질이에게 들을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소수의 독자가 지속적으로 [제4의 벽]을 넘나드는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일부 독자가 과거 [주인공]과의 대화를 토대로 당신의 정체에 대해서 짐작하기 시작합니다!」
짐작은 무슨.
자기들이 알면 뭐 어쩌겠는가? 같이 들어와 줄 것도 아니면서.
독자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리안 황자가 씁쓸하게 말했다.
“대륙을 호령하는 제국의 황제를 고작이라 말하는 것인가…….”
“사실 그것도 아깝지.”
빈말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비중]이 없는 존재는 그것이 설사 황제든 드래곤이든 그 어떤 가치도 가지지 못한다.
그때였다.
“더는 못 참겠다! 감히 황자님을 욕보이는 것도 모자라서 제국의 황제 폐하를 모욕하다니! 나, 황실 근위기사 온두! 너의 오만함을 처단하겠다!”
……어째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퍼렇게까지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소수의 독자가 당신의 발언에 동의합니다!」
“온두!”
“말리지 마십시오. 황자님! 이것은 제국 황실의 명예가 걸린 일입니다!”
내가 자연스럽게 슬쩍 베른을 향해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네가 나서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른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베른?”
“아니, 뭐…… 딱히 네가 평소에 너무 나한테 막 대하는 것 같아서는 아니고…… 너도 언제까지 나한테 의지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잖아? 그러니까 이걸 실전 수련이라고 생각해 보자고. 정 위험하면 도와줄 테니까.”
……이 망할 찌질이 아저씨가.
「다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찌질함에 감탄합니다!」
「찌질함을 선보였습니다!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비중]이 감소합니다.」
「현재 비중: 5.3%」
「일부 독자가 당신의 죽음을 애타게 바라고 있습니다!」
거참 좋은 소식 하나 없는 망할 상황이었다.
그렇게 독자들이 신나게 내 죽음을 바라고 있을 때, 어느새 검까지 빼 들은 황실 근위기사 온두가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죽음으로도 감히 갚지 못할 죄, 죽어서도 갚아라.”
“죽었는데 어떻게 갚아, 이 머저리야.”
「소수의 독자가 당신의 발언에 동의합니다!」
“목이 날아가도 그 잘난 입을 놀릴 수 있나 보겠다!”
이런, 화났나 보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입을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니까 목이 날아갔는데 입을 어떻게 놀리냐고. 너 바보야?”
“이익!”
이내 온두의 검이 나를 향해서 쇄도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무런 능력도, 육체적인 단련조차 되어 있지 않은 내가 황실 근위기사의 공격을 제대로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상황일 때의 얘기지만 말이다.
「[대의명분이 있는 악당] 버프가 발동 중입니다!」
「[조연] 버프가 발동 중입니다!」
당장이라도 내 목을 베어 버릴 것처럼 달려들던 온두는 대체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돌부리에 발이 걸려서 그대로 나자빠졌다.
“으헉!”
망할 [주인공] 놈이 일상으로 겪고 있는 일에 비하면 백분지 일도 되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일부 독자가 때마침 당신에게 일어난 기막힌 행운에 대해서 아쉬워합니다!」
쓰러진 황실 근위기사 온두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서 몇 번 버둥거리더니, 이내 완전히 뻗어 버렸다.
“화, 황자님…… 죄송합니다.”
새삼 말하지만, 역사를 뒤집어 봤을 때 흔히 기사들이 걸치는 풀 플레이트 아머는 생각처럼 무거운 물건이 아니다. 오죽하면 그걸 입고 수영까지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하지만 당연하게도 고증이라고는 조금도 반영하지 않은 이 망할 세계에서의 풀 플레이트 아머란 한 번 나자빠지면 뒤집힌 거북이마냥 혼자서는 일어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무식할 정도로 두껍게 만들어진 어마어마한 물건이었다. 주 조연들이 괜히 갑옷을 입지 않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입으면 불리해서 안 입는 거다.
황실 근위기사가 당하자, 리안의 주위를 경호하던 기사들과 시녀들이 술렁였다.
“제2 근위기사단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온두가 당하다니…….”
“어떻게 당했는지조차 보이지 않았어. 대체 저 소년의 정체가 뭐지?”
대체 저 무식한 것을 어째서 아직도 입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굳이 그 의문을 해소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가 슬쩍 베른을 돌아보자, 어딘가 아쉬운 표정을 하던 베른이 내 시선을 느끼고는 딴청을 부렸다.
“이번에 흉년이 들어서 밀값이 많이 올랐다던데…….”
“그러면 그냥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서 농사나 짓던가.”
“그러고 보니 남쪽에서 일어난 대규모 원정 때문에 철값이 많이 올라서 농기구가 부족해진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무슨 국제 외환시장 걱정하는 중년 아저씨마냥 딴청을 부리는 걸 보니, 더 따질 힘도 빠졌다.
내가 일황자 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던 얘기나 계속하고 싶은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황제가 될 생각이 없다.”
또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같은 얘기가 나오려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특단의 조치를 취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그 이유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다 알고 있으니. 너는 내가 반드시 황제로 만든다.”
“……그 이유라고?”
「소수의 독자가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자, 이제 연출의 시간이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 네가 어째서 황제가 되지 않으려고 했는지, 적통성을 지닌 장자가 어째서 아직까지도 황태자로 책봉 받지 못했는지.”
「소수의 독자가 당신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일부 독자가 당신이 흘린 기묘한 떡밥에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개연성]이 요동칩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네가 더 잘 알 텐데? 카이로 2세는 황제가 되기 전에도 패왕이라고 불릴 정도의 사내였다. 과연 그 정도의 남자가 황자들 사이에서 이런 추잡한 황권 다툼이 일어날지 몰랐을까? 다름 아닌 그 추잡한 황권 다툼 끝에 승리한 장본인이?”
「[개연성]이 요동칩니다!」
늘 그랬듯이, 사실 유무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그럴듯하게 보이느냐.
단지 그뿐이었다.
“그건…… 다른 외부적인 이유가…….”
“일황자 리안은 세 명의 황자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소유하고 있지. 그리고 그 세력을 이루는 대부분이 바로 지금의 제국을 만들어 낸 만고의 충신들이다. 그런 이들이 지지하고, 장자이자 적통성마저 지니고 있는데도 아직까지 황태자로 책봉 받지 못했다? 어째서일까.”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한 독자가 당신의 추리력에 감탄하여 후원금을 전달하였습니다!」
「현재 적립된 후원금: 5600G」
「일부 독자가 당신의 발언을 빌미로 [개연성]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개연성]이 강하게 요동칩니다!」
“그, 그야…… 내가 원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너에게는 분명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
「대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발언을 기다립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해 볼까?”
눈에 띄게 당황한 일황자 리안의 얼굴을 보니, 아까의 쿨병 걸린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나 싶었다.
“자, 잠깐 기다려……!”
「[개연성]이 거칠게 요동칩니다!」
자, 이제 마무리만 남았다.
“그거 알아? 너 제법 예쁘장…….”
그렇게 마저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내가…… 내가 다 말할게.”
……응?
「대다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일황자 리안’의 발언을 기다립니다!」
「[개연성]의 요동이 점차 멎어 듭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기껏 다 연출해 놨더니, 설마 정말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단 말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그래…… 네 생각대로야. 나는…… 이 나라의 황자가 아니야.”
“황자님!”
기겁하며 소리를 지르는 시녀장의 모습.
그 이야기는 즉, 이미 이곳에 있는 리안의 수족들은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말이었다.
‘이것 봐라.’
그제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내가 목적을 위해서 지적했던 [개연성]은 사실 [설정 오류]가 아니었다.
가장 강대한 세력을 지니고 있고, 장자이자 적통인 일황자가 아직까지 황태자가 되지 못했던 이유. 그리고…… 녀석의 얼굴이 곱상하다 못해 예쁘장했던 이유.
이 모든 것들은 짜여진 하나의 [설정]이었다.
“내 이름은 리안, 이 나라의 일황녀다.”
「대다수의 독자가 충격적인 반전에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충격적인 진실이 밝혀짐에 따라, 등장인물, ‘일황자 리안’의 명칭이 ‘일황녀 리안’으로 변경됩니다.」
「한 독자가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본 당신의 명석함에 감탄하며 후원금을 전달합니다!」
「현재 적립된 후원금: 6600G」
어째 치킨 시켜 놓고 10분 거리 편의점까지 나가서 기껏 맥주 사 왔더니 배달해 준 치킨집에서 서비스로 생맥주를 받은 기분이지만, 어쨌든 지금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내가 이제는 황녀가 되어 버린 리안의 코앞까지 성큼성큼 다가가서 말했다.
“너, 내 거 하자. 썅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