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Chapter 6: 제국 (4)
그 후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경악하다 못해 굳어 버린 베른과 기사들을 비롯한 시녀들의 표정이었다.
“너…….”
“이 무슨…….”
그리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응당 내 주변뿐만이 아니었다.
「다수의 독자가 예상을 뛰어넘는 당신의 발언에 자지러집니다!」
「소수의 독자가 당신의 충격적인 고백에 경악합니다!」
「사나이다운 호쾌함을 선보였습니다! [마초] 성향이 증가합니다.」
「일부 독자가 당신의 상남자식 언행에 유쾌함을 표하며 후원금을 전달합니다!」
「현재 적립된 후원금: 8100G」
이거…… 난리도 아니구만.
하물며 주변의 반응이 그러할진대 그 당사자는 어떻겠는가.
“……읏!”
빨갛다 못해 귀까지 붉게 달아오른 일황녀 리안의 모습은 방금 전까지 황자로서 풍기던 중성적인 모습은 어디 가고, 이제는 완전한 한 명의 황녀가 되어 있었다.
“가, 감히…… 제국의 적통 황자에게 그따위 망언을……!”
“적통 황녀가 아니라?”
“다, 닥치거라!”
저대로 내버려 두면 열병으로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니, 일단은 이곳에 찾아온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베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만 가죠.”
“어디로?”
저 뻔뻔한 낯짝을 보자, 괜히 이마에 내 천(川)자가 새겨지는 기분이었다.
“그걸 몰라서 물어요?”
“모르니까 묻지.”
“정말로 모르겠으면 일일이 묻지만 말고 조금은 생각이라는 걸 해 보는 게 어때요?”
“…….”
내가 베른을 이렇게까지 갈구는 이유는 요즘 들어서 그가 너무 생각 없이 말하기에 조금은 계몽시킬 필요를 느껴서이지, 결코 쪼잔하게 아까의 복수 때문이 아니다.
정말로.
「일부 독자가 당신의 쪼잔한 복수에 무척이나 만족합니다!」
……예전부터 느끼는 건데, 이놈들도 결코 정상은 아니다.
그 와중에 찌푸려지다 못해 찡그려진 베른의 얼굴을 보니, 더 놀려먹었다간 목적이고 뭐고 나랑 갈라설 기세였다.
“농담이에요. 아무래도 리안에게도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자연스럽게 황녀의 이름을 부르자, 역시나 듣고 있었던 리안의 몸이 움찔했다.
「한 로맨티스트 독자가 여심을 가지고 노는 당신의 말재간에 얼굴을 붉게 물들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말재간이 좋은 게 아니라 이 세계에 있는 인물상이 너무나도 뻔한 것뿐이다. 만약 현실에서 이런 개소리를 지껄이다가는 당장 고소와 함께 얼굴에 물벼락을 맞아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였다.
그렇게 우리가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근위기사들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긴 어딜 간다는 것이냐!”
그 외침과 함께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흉흉한 기세를 뽐내고 있는 네 명의 황실 근위기사들.
물론, 전대 용사인 베른이라면 충분히 ‘중무장’한 저들을 무리 없이 제압할 수 있을 테였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런 무식한 방법이 아니었다.
훨씬 더 고상하고, 무엇보다도 [독자] 놈들이 좋아할 만한 방법이지.
“보, 보내 주거라.”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굳이 얼굴을 확인해 보지 않아도 뻔했다.
갑작스러운 황녀의 명령에 근위기사가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예?”
“보내 주라고 하였다!”
“하지만…….”
“지금 감히 제국의 일황자인 내 말을 거역하는 것인가!”
“명을 따르겠습니다!”
황녀는 어디 가고 또다시 황자인지.
어찌 되었건 간에 상황이 순식간에 정리되자, 내가 자연스럽게 황궁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와 함께 복도에 기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디 보자…… 슬슬 부를 때가 됐는데.
“자, 잠깐!”
그러면 그렇지.
그곳에는 어느새 무척이나 황녀다운 얼굴을 한 리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름…… 이름이 무엇이냐?”
「일부 독자가 등장인물, ‘일황녀 리안’의 적극성을 응원합니다!」
등장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저런 반응이 붙는 걸 보니, 확실히 금수저가 좋긴 좋은 모양이었다. 물론, 나라고 해서 금수저인 데다 예쁜 게 싫은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내가 일부러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반, 아인즈 반.”
“반, 반…… 알겠다.”
그러면서 사람 앞에 두고 면전에서 대놓고 티 날 정도로 내 이름을 되새기는 걸 보니, 오히려 내가 다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무리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베른과 함께 리안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마치 버터를 기름에 튀긴 것 같은 느끼함으로 속삭였다.
“다음에 또 봐.”
「대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오글거리는 발언에 손발을 오그립니다!」
「일부 독자가 지나친 당신의 느끼함에 헛구역질을 합니다.」
「극소수의 독자가 당신의 발언을 좋아합니다!」
……어째 평가가 박한 것 같기는 했지만 그나마 좋아하는 놈들이 있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그렇게 일황자의 처소인 궁 밖을 나오자, 역시나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황당하다 못해 굳어 버린 베른의 얼굴이었다.
“너…… 그런 놈이었구나.”
멸시까지 느껴지는 그 시선을 보니 어째 단번에 평가가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지만 굳이 변명할 필요성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걱정 마. 그러고 있으니까.”
……이 망할 아저씨가.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당연한 걸 묻는 저 뻔뻔한 낯짝을 보니 다시 한번 욕이라도 퍼부어 주고 싶었지만,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전대 용사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는 베른의 존재가 필요하긴 했기 때문에 참을 인을 세 개 삼키며 말했다.
“우선, 혼자만의 시간을 줘야죠.”
“혼자만의 시간이라고?”
내가 별다른 생각 없이 물러난 것이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첫 대면부터 무식하게 밀어붙이는 짓은 초심자나 하는 짓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격적인 조우로 확실한 존재감을 알린 내가 이후에 해야 할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사람은 말이죠. 쓸데없이 상상력이 풍부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면 별 의미도 없는 상상을 해요.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말이죠.”
당연한 이야기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애타는 쪽은 늘 기다리는 쪽이다.
「일부 독자가 당신의 능숙한 밀당에 과거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칩니다!」
뭐 있었던 척하기는, 니들이 한 건 밀당이 아니라 망상이야.
「일부 독자들이 침묵합니다!」
……내가 말실수했다. 힘내라.
그 와중에 베른이 나를 보며 말했다.
“너…… 진짜 나쁜 놈이구나.”
아마 황녀 건에 대한 것으로 말한 것일 테지만, 어째 타이밍이 기묘하긴 했다.
「일부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발언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소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에게 호감을 가집니다!」
「소신 있는 발언을 하였습니다!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비중]이 증가합니다!」
「현재 비중: 5.9%」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쩌다가 기막히게 맞아떨어진 베른의 말에 그의 [비중]이 늘어가는 꼴을 보고 있자니, 지금까지 아등바등 살아온 내가 미련해 보일 정도였다.
“……쪼잔한 어느 아저씨보다는 낫죠.”
“그게 나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진부한 얘기라면 지긋지긋했지만, 왠지 이번만큼은 뻔한 대답을 해 주고 싶었다.
“왜 아니겠어요.”
* * *
황궁을 빠져나온 나는 루와 합류한 후에, 일부러 제도에서 가장 큰 최고급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그 이유는 루의 존재 덕에 더 이상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져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찾기가 쉬워서였다.
하이디가 말했다.
“이렇게 놀고먹고만 있어도 되는 거야?”
양손에 제도에서 가장 비싼 고급 케이크를 한 조각씩 들고서 하는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물음이었으나, 하이디가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걱정 마. 슬슬 올 테니까.”
변경에서 올라온 귀족들이나 부호들이 황실 행사에 참여하기 전에 잠시 머문다는 제도 최고의 여관인 ‘별빛 바람’은 그 명성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이 세계에서 샤워를 할 수 있으리라고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규모를 생각하면 아무리 봐도 여관보다는 호텔이 어울렸지만, 자기들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아마 너무나도 빈곤한 상상력 덕에 편리한 현대 시설의 동력을 [마법]이라는 편리한 것으로 치환한 빈약한 [설정] 덕분이겠지만, 그 덕에 내가 어느 정도 편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우리가 이곳에 머문 지도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으니, 이제 정말로 슬슬 연락이 올 때가 되긴 했다.
그때였다.
똑똑-.
“누구세요?”
하이디가 손에 크림이 가득 묻은 채로 쪼르르 달려가서 문을 열자, 여관 종업원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아마 귀족들을 상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는 습관인 듯 했다.
“손님, 손님을 찾는 분이 계십니다.”
드디어인가.
방명록에는 일부러 내 이름을 써 놓았으니, 손님이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여관 종업원을 따라서 여관 로비에 내려가자, 비치된 가죽 소파에 깔끔한 검은색 정복을 차려입은 어느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내가 노신사에게 다가서자, 여전히 소파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던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자네가 아인즈 반인가? 반갑네. 빌 세빌스턴 후작이네.”
어쩐지 엉덩이가 무겁다 싶더니만, 귀족이었던 모양이다.
“후작이라고요?”
“따로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되네. 정중하게 모셔오라는 말씀이 있었으니.”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혼자 김칫국 마시기는.
거기다가 모셔오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일부 독자가 등장인물, ‘빌 세빌스턴 후작’의 설레발에 혀를 찹니다!」
어쨌거나 후작이라…… 일개 사용인이나 보낼 줄 알았던 나로서는 의외이긴 했다. 아무래도 생각보다도 훨씬 더 내가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일황자님께서 찾으시네. 같이 가지.”
그러면 그렇지.
안 그래도 기다렸던 일이었기에, 내가 망설임 없이 그가 내민 손을 붙잡은 순간이었다.
「[Chapter 11]의 메인 빌런, ‘파괴왕 빌’을 마주하였습니다!」
「[개연성]을 초과한 만남입니다.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