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Chapter 7: 11번째 빌런 (1)
빌런이라고?
‘이것 봐라.’
짧은 알림이었으나, 그것이 나에게 알려준 사실은 의외로 상당히 많았다. 내가 지금까지 미처 잊고 있거나, 자연스럽게 인지하지 않고 있던 사실들.
그건 바로 [메인 시나리오]의 각 챕터와 그에 해당하는 [빌런]의 존재였다. 생각해 보면, 존재하는 것이 당연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들을 만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만큼 내가 메인 시나리오에서 한참은 동떨어진 존재였다는 거겠지.’
그것도 엑스트라 수준에도 못 미치는 배경 설정 수준. 원래라면 [주인공]과 마주치는 것조차도 첫 만남을 제외한다면 없어야 정상일 터였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인 시나리오]에 이 정도까지 개입하지 않고도 내가 [조연]까지 올라갔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내가 지금까지 상당한 깽판을 쳤다는 반증이기도 했으니 썩 나쁠 것도 없었다.
「소수의 독자가 멍하니 얼을 타고 있는 당신의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조용히 좀 해 봐. 생각 좀 더하게.
「일부 독자가 사색에 잠긴 당신의 모습에 신비로움을 느낍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신비주의] 성향이 증가합니다.」
……아무튼 이놈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응당 모든 이야기에는 [주인공]과 함께 그의 적수인 [악당]이 존재한다. 그 [악당]은 [주인공]의 첫 여행길에 만난 산적 두목이 될 수도 있고, 귀족 가문의 철없는 망나니 도련님일 수도 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빌 세빌스턴 후작은 바로 그 수많은 [악당] 중에서도 [메인 시나리오]에 직접적으로 적으로서 등장하는 인물인 [빌런] 중 하나였다.
그것도 ‘파괴왕 빌’이라는 거창한 별명까지 있는.
나도 모르게 너무 빤히 응시해서일까.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빌 세빌스턴 후작이 말했다.
“무슨 일 있는가?”
“아닙니다. 계속 가시죠.”
그렇게 빌 세빌스턴 후작의 안내를 따라서 여관을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마차 한 대가 우리를 마중했다.
“타게.”
검은 사자 무늬가 양각된 마차.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저게 세빌스턴 가를 상징하는 문양일 터였다.
마차 안으로 들어서자, 좁아터지고 덜컹거리는 최악의 승차감을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상당히 쾌적했다.
“좋군요.”
“그렇게 평해 주니 고맙군. 가문의 마법사들이 좋아하겠어.”
당연히 마차를 타 본 적 없었던 나에게 비교 대상은 어디까지나 옛 기억에 있는 현실의 승용차나 버스 등의 이동 수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꽤 괜찮다고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는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이 마차가 마법까지 사용된 최상급에 속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빌 세빌스턴 후작의 위세를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제도에 드래곤이 나타났던 일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벌써부터 본론인가.
여기서 처음 듣는 이야기마냥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었다.
“남들만큼은 아는 편이죠.”
“그렇다면 얘기가 빠르겠군. 바로 그 때문에 황궁과 제도 내에서 혹시 일황자께서 드래곤의 분노를 산 게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고 있네.”
“드래곤의 분노?”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퍼트린 소문이지. 하지만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소문이기도 하네. 바로 그 때문에 일황자님의 자질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생기고 있거든.”
그런 얘기인가.
아무래도 본의 아니게 내 행동이 일황자, 아니 일황녀에게 상당히 악영향이 간듯했다. 뭐, 어차피 그 점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그다지 거리낄 것은 없었다.
「일부 독자가 당신의 민폐에 불편함을 표합니다!」
난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일일이 반응하는 니들이 더 불편하다.
내가 그런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마차 맞은편에서 짧게 내 기색을 살피던 빌 세빌스턴 후작이 말했다.
“아, 별다른 의미는 없네. 그저 황자님과 상당히 특별한 친분이 있어 보이기에 현재 상황을 알려주고자 했을 뿐. 혹여 이미 알고 있었다면 황자님 앞에서는 특별히 조심해 주길 바라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한마디로 말하자면, 현재 일황자에게 닥친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건, 모르고 있건 간에 일단 조용히 하라는 말이었다.
“조용히 해라. 그 말이군요.”
“말귀가 밝아서 좋군. 자네의 말귀가 앞으로도 쭉 밝다면 우리는 꽤 괜찮은 관계로 지낼 수 있을 게야.”
이제야 대충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빌런]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소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빌 세빌스턴 후작’의 기묘한 발언에 주목합니다!」
당연하지만, 왕이라는 호칭이 붙으려면 응당 그에 상응하는 세력이나 권위가 존재해야 한다. 물론 제국의 후작이라 함은 지역에 따라서 충분히 왕이라고 불릴 만한 존재이긴 했으나, 문제는 그 앞에 붙은 수식어였다.
‘파괴왕이라.’
그 정도의 호칭이라면 반란 혹은 그에 준하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선 어지간하면 붙지 않을 호칭이었다. 더군다나 [빌런]이라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성향이 어떨지는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충분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더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후작님께서는 현재 일황자님을 따르고 계신 건지요?”
“이 제국의 앞날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바쳐서 충성하고 있지.”
당연하지만, 저렇게 거리낌 없이 충성한다고 말하는 놈이 제대로 된 놈일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일황자가 황제가 될 수 없는 이유 중에서 과반수 이상을 눈앞에 있는 녀석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황자님께 사실을 숨기려는 겁니까?”
“매우 혼란스러운 정세에 더 이상 황자님의 심기를 어지럽게 하고 싶지 않네. 진정한 신하라면 이 정도의 사소한 소문은 자기 선에서 막아야 하지 않겠나?”
「소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빌 세빌스턴 후작’의 발언을 미심쩍어 합니다!」
바로 눈치챌 정도로 어설픈 연기라니.
하기야…… 저런 연기에 다 속아 넘어가 주는 다른 놈들이 더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렇군요. 후작님의 깊은 뜻, 잘 알았습니다.”
“내 충의를 알아주니 기쁘군.”
충의는 개뿔이.
내가 어차피 눈앞에 있는 [빌런]이 대강이나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굳이 위험부담을 지고서 이렇게 민감할 수도 있는 질문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민감한 질문 이후에 별것 아닌 질문을 던지면, 사람은 으레 그렇듯이 긴장을 놓아 버리고 별생각 없이 대답하기 마련이었으니까.
“아, 그렇다면 혹시 ‘용사’의 소문에 대해서 들어 보셨습니까?”
그러자 빌 세빌스턴이 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이 되물었다.
“용사? 서쪽 마왕의 땅으로 떠났다는 그 용사를 말하는 건가?”
“네, 그 용사 말입니다.”
“페론 마탑에 잠시 들렀다는 이야기까지는 들었다만, 그 이후로는 듣지 못했군. 그가 정말로 ‘마왕’을 퇴치할 수 있다면, 이 혼란스러운 제국에도 조금은 안정이 찾아올 텐데 말이야.”
“그렇군요.”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것을 보니, 거짓말은 아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내가 알고자 한 정보를 모두 확신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파괴왕 빌’이 아직 [주인공]을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그 사실은 내가 앞으로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혹시 ‘적의 적은 나의 친구다.’라는 말 아십니까?”
“내가 좋아하는 말일세. 하지만 우리는 일황자님이라는 같은 배를 탔으니, 친구의 친구라고 보는 게 옳지 않겠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기는. 하지만 그쪽이 그렇게 말하겠다는데 굳이 막아설 생각은 없었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역시, 저희는 앞으로도 꽤 좋은 관계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무척이나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