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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이후의 소설 속-22화 (22/164)

◈ 22화 Chapter 7: 11번째 빌런 (2)

손님으로서 다시 한번 찾아온 황궁의 풍경은 그날과는 사뭇 달랐다. 드래곤이 출현했다는 영향 때문인지 경비도 훨씬 더 삼엄해졌고, 곳곳에 방어 마법진으로 보이는 육망성들이 성벽을 비롯해 황궁 이곳저곳에 새로이 그려져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내가 빌 세빌스턴 후작의 뒤를 따라서 황자궁 내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곳에서 내 얼굴을 알아본 몇몇 시녀들과 시녀장의 몸이 움찔했다.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다.

“……일황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빌 세빌스턴 후작이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여기서 기다리겠네. 이 안쪽으로 들어가면 황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거네.”

“바쁘신 것 같은데, 이만 가 보셔도 상관없습니다만.”

“내가 어찌 직접 데려온 황자님의 손님을 배웅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차라리 대놓고 감시하겠다고 말을 해라.

뭐, 일단은 그다지 상관도 없는 일이었기에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부디 황자님과 유익한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군.”

입조심하라는 말도 참 어렵게 한다.

「일부 독자가 등장인물, ‘빌 세빌스턴 후작’의 미묘한 화법에 경계심을 표합니다!」

아무래도 이제 슬슬 [독자] 놈들도 ‘빌 세빌스턴’의 정체를 조금이나마 짐작해 가고 있는 듯 했다.

아무튼 [악당] 놈들은 저게 문제다. 착한 척을 할 거면 제대로 하던가, 저렇게 어설프니까 매일 [주인공] 같은 머저리한테 당하는 것 아닌가.

“일황자님, 모셔오라 명하신 손님이 도착하였습니다.”

“들라 하라.”

일황자 리안이 머물고 있는 방 안은 의외로 평범했다. 물론, 그건 제국 황자의 방이라고 생각했을 때 평범하다는 것이지 결코 소박하다거나 하는 것과는 한참은 거리가 있었다. 내가 말하는 평범함이란, 그냥 딱 보았을 때, ‘아, 부잣집 도련님 방이네.’라고 떠올릴 법한 풍경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리안은 그중에서도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접대용 테이블 맞은편에 여성복도, 남성복도 아닌 미묘한 잠옷 같은 옷을 걸친 채로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내가 그, 아니 그녀를 바라보며 슬쩍 웃었다.

“생각보다 일찍 만났네?”

“……읏.”

고작 인사 한마디 했다고 순식간에 귀까지 빨갛게 변하다니. 쉬워도 너무 쉬운 것 아닌가.

「로맨스 소설을 애독하는 일부 독자가 당신의 갑작스러운 미소에 반칙을 선언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무리 써도 옐로카드도 안 받는 반칙이 있다면 망설일 이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나를 보자고 했다면서?”

“그, 그렇다.”

“왜?”

「로맨스 소설을 애독하는 일부 독자가 이 미묘한 간질거림에 흥분합니다!」

사랑 고백하는 것도 아니면서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라니.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를 어떻게 할까…….

내가 그렇게 고민 아닌 고민을 하는 사이,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리안이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그때…… 했던 얘기 말인데…….”

무엇을 얘기하는지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대답해 줄 리가 있겠는가.

“무슨 얘기? 아아, 황제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던 얘기?”

「다수의 독자가 여심을 모르는 당신의 답답함에 불만을 토로합니다!」

「일부 독자가 당신의 무신경함에 고구마를 선언합니다!」

「러브코미디를 사랑하는 한 독자가 당신이 고자가 아닌가 의구심을 가집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무성욕자] 성향이 증가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조금 심하지 않냐.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고자] 성향이 증가합니다.」

“…….”

망할 놈이.

내가 그렇게 짧은 불만을 토로하는 사이, 어느새 얼굴이 완전히 익어 버린 리안이 숨넘어갈 것처럼 말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골려주고 싶었지만, 더 이상 놀려댔다가는 성난 [독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기 때문에 참기로 했다.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

리안이 저런 말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불안하니까.

아마 지난 일주일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내가 했던 말로 인해서 나에 대한 온갖 기억과 추측들이 범람했을 것이다.

내가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내 목적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렇게 부풀어 오른 쓸데없는 상상력은 결국 나를 이 자리까지 다시금 오게 만들었다. 때문에 그녀는 지금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했던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녀의 목적이 그렇다면, 나는 그녀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면 된다.

“안다고……?”

“물론, 그때 내가 했던 말은 진심이야.”

「대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발언에 기괴한 비명을 내지릅니다!」

「남녀 간의 미묘한 간질거림을 기대하던 일부 독자들이 당신의 거침없는 발언을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뭐, 뭣…….”

“그리고 나는, 너를 반드시 황제로 만들 거야.”

물론, 나를 위해서지만.

「거침없는 발언을 했습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상남자] 성향이 증가합니다.」

「당신의 행보를 흥미롭게 지켜보는 한 독자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당신의 묵직한 돌직구에 후원금을 전달합니다!」

「현재 적립된 후원금: 11,100G」

한 번의 폭풍이 지나간 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런 정적이 찾아왔다.

“…….”

이것 참.

어지간히도 부끄러웠는지, 나름대로 숨는다고 숨었지만 다 보이는 리안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하하.”

“……이게 웃겨?”

“응, 엄청.”

“……나한테 그딴 식으로 말한 건 네가 처음이야.”

어련하실까.

「등장인물, ‘일황녀 리안’의 [츤데레] 성향이 증가합니다!」

어쨌거나 간신히 대화의 장으로 나온 리안은 여전히 붉은 홍조를 띠고 있었지만, 방금 전과는 사뭇 달랐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거겠지.

“자, 그러면 이만 본론을 말해도 될까?”

“본론?”

“내가 말했었잖아? 나는 너를 반드시 황제로 만들 거라고.”

“그렇지만…… 어떻게?”

“냉정하게 현재 상황을 분석해 보면, 네가 황제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분명히, 세간에 알려진 객관적인 평가로는 눈앞에 있는 ‘일황자 리안’이 가장 유력한 황태자 후보가 맞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간에 알려진 평가일뿐이고, 실상은 황자조차 아닌 황녀.

애당초 황태자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요건조차도 갖추지 못한 상태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나는 리안이 황자가 아닌 황녀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형편 좋은 일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즉, 정면승부는 처음부터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이황자와 삼황자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모조리 다 말해 봐.”

“……그건 왜?”

왜긴.

“경합이라는 건 말이야, 어디까지나 제대로 된 상대방이 있어야 성립될 수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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