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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이후의 소설 속-23화 (23/164)

◈ 23화 Chapter 7: 11번째 빌런 (3)

“……이게 내가 알고 있는 전부야.”

그렇게 리안에게 황자들에 대한 대강의 정보를 듣고 나니,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상당히 명확해졌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이황자 사이먼은 현재 가출한 상태이고, 삼황자 닐은 맨날 방구석에 처박혀서 나올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이거지?”

“맞아.”

“허어.”

남장여자와 가출 소년에 이어서 은둔형 외톨이라니, 명색이 제국의 황가라면서 실상은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그렇다면 이황자 사이먼이 어디로 떠났는지 알아?”

“모른다.”

하긴, 이 삼엄한 경비를 모두 뚫고 한 가출인데 알고 있는 게 더 이상하긴 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짐작 가는 게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대충 알겠네. 아마 서쪽으로 갔을 거야.”

“……그걸 어떻게 알지?”

이 점에 대해서는 별로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지금까지 나와 있는 단서 몇 가지만 조합해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첫 번째로는 사이먼이 차기에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황자 중 한 명이라는 것.

두 번째로는 일신의 무력이 출중하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이황자 사이먼은 현재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마냥 자기 잘난 줄 알고 철없이 홀로 마왕의 땅으로 쳐들어갈 만큼.

이 사실들이 말하는 바는 분명했다.

“그래야 어떤 망할 놈을 만날 테니까.”

“망할 놈?”

“있어. 호구인 주제에 성격 나쁘고, 자기 잘난 맛에 살고, 보고 있으면 절로 암에 걸릴 것 같은 녀석.”

내가 말하는 게 누구인지는 뻔했다.

「일부 독자가 당신의 신랄한 평가에 동의합니다!」

「대다수의 독자가 [주인공]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을 불쌍히 여깁니다!」

……멋짐은 개뿔이.

내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독자]들의 안목을 의심하고 있을 때, 리안이 말했다.

“그래서 사이먼이 그 망할 놈이랑 만나면 어떻게 되는데?”

어떻게 되긴.

“황제가 되겠지.”

“……뭐? 이야기가 어떻게 그렇게 되는데?”

“낸들 알아?”

직접 말하고도 참 놀라운 비약이긴 했다.

그럼에도 굳이 그 과정에 사족을 덧붙여 보자면, ‘[주인공]이니까.’ 정도려나.

정리를 해 보면, 현재 황위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서쪽 땅으로 떠난 이황자가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흐음.”

물론, 걸리는 것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바로 [빌런]의 존재였다.

11번째 챕터가 어느 시점인지는 몰라도, 후일에 ‘파괴왕 빌’이 서쪽 땅에서 돌아온 [주인공]과 대적한다는 것은 이미 예정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왜?

물론 ‘파괴왕 빌’이 단순히 [악]이어서 [주인공]과 대적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아무래도 이에 대해서 알려면 우선 ‘빌 세빌스턴 후작’과 ‘삼황자 닐’에 대해서 더 알아봐야 할 듯싶었다.

할 일도 정해졌겠다, 내가 리안에게 말했다.

“이만 가 볼게.”

“……벌써?”

너무 대놓고 아쉬워하니까 내가 다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이었다.

「음란서적을 좋아하는 한 독자가 밀폐된 공간에 젊은 남녀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한 [개연성] 의혹을 제기합니다!」

개소리도 참 길게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요즘 먹고살 만해졌다는 뜻이겠지.

뭐, 어차피 평소대로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일부 독자가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개연성]이 요동칩니다!」

……그래야만 했다.

“반.”

“어, 응?”

갑자기 얼굴을 홍시처럼 물들인 채로 내 옷자락을 잡는 리안을 보자, 나도 모르게 순진무구한 15살 소년이나 할 법한 반응이 나왔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

여전히 내 옷자락 끝을 붙잡은 채로 마치 사슴 같은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는 리안의 얼굴. 그 얼굴을 보자,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이건…… 위험하다고.

「음란서적을 애독하는 한 독자가 등장인물, ‘일황녀 리안’의 용기 있는 행동을 응원합니다!」

「일부 독자가 예리한 지적을 한 ‘음란서적을 애독하는 독자’를 열렬히 지지합니다!」

「일부 독자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음에 따라, ‘음란서적을 애독하는 독자’의 등급이 [네임드]로 승격됩니다!」

「‘음란서적을 애독하는 독자’의 등급이 [네임드]로 승격됨에 따라, ‘음란서적을 애독하는 독자’의 명칭이 ‘야설 빌런’으로 변경됩니다.」

……미친.

어이가 없다 못해 말 그대로 욕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

솔직히 말해서 이대로 욕망에 몸을 맡기는 것도 제법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지만, 문제는 주변에 있는 눈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야설 빌런이 당신의 행동을 응원하며 환호성을 지릅니다!」

「야설 빌런을 추종하는 일부 독자가 그 의견에 맹렬하게 동의합니다!」

……이젠 하다 하다 추종자까지 생겼냐.

내가 짧은 투정을 하는 그 와중에도 위기는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반.”

부끄러움이 가득 묻어난 그 목소리.

무언가에 씌었는지 왠지 오늘따라 더 예뻐 보이는 얼굴.

나도 모르게 간신히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릴 뻔했다.

“우, 우선 진정 좀 해 볼래?”

“나는 지금 굉장히 침착한 상태야.”

이 아가씨 봐라, 누가 봐도 아닌 것 같은 소리를 제법 그럴듯하게 하는 재주가 있네.

“……그러면 우선 앉아 볼래?”

“지금 가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그 집념으로 황제가 되고자 했으면 진작 됐을 거다. 이 망할 아가씨야.

무의식적으로 넘어서는 안 될 선이 느껴졌기에 건너지 않았던 금단의 영역이 이제는 정말로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천천히 움직이는 손과 아무런 저항 없이 서서히 다가오는 리안의 모습.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정말로 한계였다.

「야설 빌런을 비롯한 일부 독자가 침을 꿀꺽 삼킵니다!」

그렇게 내가 모든 것을 놓아 버리려던 찰나였다.

「절제할 수 없는 욕망이 당신의 행동을 재촉합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청소년 등급 관람 불가로 물들어 가던 내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잠깐.”

“……응?”

“이만 갈게.”

내가 재빨리 리안을 떨어뜨려 놓은 채로 도망치듯이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야설 빌런을 비롯한 일부 독자들이 용기 없는 당신의 행동을 맹렬히 비난합니다!」

「남자로서 이해가 가지 않는 행위를 하였습니다! [고자] 성향이 증가합니다!」

「당위성이 없는 행위를 행했습니다!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0.39%」

역시 예상대로이긴 했으나,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아주 약간이지 결코 크게 아쉽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정말로.

「관리자가 출동하였습니다! ‘야설 빌런’에게 일시 정지를 선고합니다.」

그렇게 뒤늦게나마 출동한 관리자에 의해서 어느 정도 사태가 진정되어 가는 듯 했다.

「일부 추종자들의 열렬한 반박으로 ‘야설 빌런’의 정지가 보류됩니다.」

……이 더러운 세상아.

“응? 생각보다 일찍 나왔군.”

빌 세빌스턴 후작이 의아하다는 듯이 묻자, 내가 진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정이 있어서요.”

“사정?”

「야설 빌런이 당신의 뛰어난 단어 선택에 매우 흡족해합니다!」

“……이상한 단어 아니고요.”

“누가 뭐라고 했나? 그러면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아, 그 전에 저랑 어디 좀 같이 가시죠.”

“나와 말인가?”

비록 일련의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할 건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같이 가서 나쁠 건 없을 겁니다.”

“의아하군. 하지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어차피 빌 세빌스턴이 의심 많은 늙은이일 것이라는 사실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미끼를 던지면 될 뿐.

“당신 목적이 뭔지 압니다.”

“내 목적이라고? 하하. 오직 제국의 안정과 번영만이 내 목적일세. 자네가 그것을 나에게 줄 수 있다는 건가?”

“고작 그 정도일 리가 없을 텐데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빌 세빌스턴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훗날에 [개연성]에 의해서 ‘파괴왕 빌’이 [주인공]에게 사냥당한다는 사실만 알 뿐.

뭐, 그거면 충분하긴 했지만 말이다.

“고작? 이 제국의 안정과 번영을 지금 고작이라고 폄하하였는가?”

거참, 누가 귀족 아니라고 할까 봐 말 한마디도 안 지려고 하기는.

그렇게 나온다면 나에게도 방법이 있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제가 더 드릴 말씀은 없겠군요. 역시 ‘왕’의 이름은 아무나 품을 수 없는 건가 봅니다.”

그렇게 말한 내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돌아서자, 빌 세빌스턴이 약간 망설이는 기색으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왕’이라니?”

그럼 그렇지. 이제 너는 내 손안에 든 쥐다.

내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궁금하면 따라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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