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Chapter 7: 11번째 빌런 (5)
그 후에 찾아온 것은 짧지만 무척이나 길게 느껴지는 정적이었다.
“…….”
「일부 독자들이 이 기묘한 분위기에 거부감을 표합니다!」
누가 아니래.
충격이라도 먹은 건지, 빌 세빌스턴은 한참이나 죽은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혼자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달싹였다. 그런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그의 입가에는 어느새 허허한 웃음기가 깃들어 있었다.
“하하.”
……웃어?
어딜 보아도 정상적으로는 보이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딘가 찜찜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놈이 결코 정상일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어지간히도 내가 우습게 보였나 보군.”
그때였다.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설마 이걸 쓰게 될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일부 독자들이 등장인물, ‘빌 세빌스턴 후작’의 기묘한 발언에 주목합니다!」
그가 품에서 꺼낸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색 구슬이었다. 저것의 용도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저대로 쓰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염려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전혀 기다려 줄 생각이 없다는 듯이 곧바로 검은색 구슬에서 짙은 어둠과 같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이거 설마…….
불길한 예상은 언제나 적중한다고 하던가.
「[Chapter 11]의 메인 빌런, ‘파괴왕 빌’이 각성합니다!」
그 말이 딱 맞았다.
뜨둑.
그와 함께 빌 세빌스턴이 입고 있던 정복의 단추와 옷소매가 터져 나가며 그의 근육이 폭발적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뜨두득-.
마침내 모든 변화가 끝났을 때, 내 앞에 서 있는 것은 더 이상 아까와 같은 평범한 노신사가 아니었다.
“후우…….”
노인은커녕 인간이라고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근육.
외형뿐만이 아니었다. 인자함을 머금고서 그 속내를 감췄던 눈동자는 이제 흉흉한 광기로 물들어서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소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빌 세빌스턴 후작’의 파격적인 변화에 놀라움을 표합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나는 내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그 [주인공]의 적수 중 한 명이었다. 당연히 그만한 비장의 수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어야 했건만, 내가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실수를 하고야 만 것이다.
“아까 나에게 왕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었지? 그 질문은 틀렸네.”
「소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파괴왕 빌’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나는 이미 왕일세.”
“그게 무슨 말이죠?”
“말 그대로일세. 자네는 지금 이 제국의 주인이 몇 명이라고 생각하나?”
……과연, 그렇게 된 거였나.
빌 세빌스턴의 말로 나는 지금껏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지금껏 빌 세빌스턴이 황위 다툼과 관련해서 [빌런]이 된 줄만 알았건만, 진실은 아니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기에 몇 가지 정보를 더 캐낼 필요성이 느껴졌다.
“마치 그중 하나라도 된다는 듯이 말하시는군요. 뭐, 암흑가라도 장악하고 있는 겁니까?”
“암흑가라…… 썩 듣기 좋은 어감은 아니군. 음지의 길드 정도로 해 두지.”
그거나, 이거나.
어쨌든 이 대화로 결국 확신할 수 있었다. 어째서 ‘빌 세빌스턴 후작’이 [빌런]으로서 [주인공]과 대적하게 되는지.
즉, 눈앞에 있는 이놈은 에누리 없이 태생부터 [악]이었다는 소리였다.
「다수의 독자가 드러난 흑막에 대하여 [정의 구현]을 원합니다!」
「다수의 독자가 [악]의 성향을 지닌 당신과 ‘파괴왕 빌’이 양패구상하기를 바랍니다!」
……어째 이상한 바람이 섞여 있는 것 같은데.
어쨌거나, 어느새 완벽한 [빌런]으로서 자리에 선 ‘파괴왕 빌’이 그 흉악한 근육을 드러낸 채로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 이제 진정한 대화를 나눠 볼 시간이군.”
공기 너머로도 충분히 느껴지는 명백한 위협.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그와 함께 경고처럼 울려 퍼지는 귓가의 소리.
나도 안다.
지금 이 전개가 나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위험하다는 것을.
안광을 붉게 물들인 ‘파괴왕 빌’이 나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일부 독자가 긴장으로 숨을 죽입니다!」
그렇게 마침내 나와 그 사이의 거리가 지척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쿠웅!
묵직하게 울려 퍼진 굉음과 함께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꾸엑!”
물론, 내 비명소리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0.48%」
……엥?
나도 모르게 나갔던 정신을 차리자, 눈앞에는 어느새 드래곤의 흉악한 앞발이 빌을 사정없이 깔아뭉갠 뒤였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시시한 장난에 장단을 맞춰 줄 생각이지?]
[빌런]으로 각성한 빌의 모습이 너무 파격적이어서 미처 인지하지 못했는데, 제아무리 근육이 부풀어 봤자 인간은 인간이었다.
물론, 그 상대가 원래 예정 대로인 [주인공]이었다면 제법 [빌런]다운 면모를 선보이며 맹렬한 전투 끝에 주인공이 성장하기 위한 훌륭한 [경험치]가 되었을 테지만, 제깟 놈이 산만한 드래곤이 깔아뭉개는데 별수 있었겠는가.
굳이 말하자면 강함보다는 상성의 문제였다.
“끄윽…….”
과연 빌런은 빌런인지, 저 지경이 되고도 숨이 붙어 있는 것을 보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내가 이깟 것에…….”
그 상황 속에서도 엄청난 힘으로 어떻게든 드래곤의 앞발을 조금씩 들어내고 있는 빌 세빌스턴의 모습은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일부 독자들이 등장인물, ‘파괴왕 빌’의 끈질김에 치를 떱니다!」
물론, 그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쿠웅!
“꾸엑!”
다시금 사정없이 내려친 루의 앞발에 의해서 빌의 몸이 쥐포처럼 바닥에 처박혔다. 역시 국제 깡패 드래곤답게 일 처리도 시원하기 짝이 없었다.
“끄륵…….”
[제법 끈질긴 벌레로군.]
쿠웅!
“꾸에엑!”
「다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블랙 드래곤 루’의 시원한 [정의 구현]에 환호합니다!」
……안 될 걸 알면서도 굳이 덤비는 [악당]의 심리는 참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어쩌겠는가, 자기들이 그렇게 살겠다는데.
무언가 멀리 돌아온 기분이 들긴 하지만, 어쨌거나 소기의 목적은 이루었다.
내가 쥐포가 된 빌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너와 나의 눈높이 차이다.”
* * *
일련의 소동이 지나가고 시간이 지나자 빌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근육 갑옷은 어느새 수그러들고 다시금 빈약한 노인의 몸으로 되돌아갔다.
사람 몸이 무슨 풍선도 아니고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긴 했으나, 이 세계에 이상한 게 한두 개도 아니었기에 딱히 일일이 걸고넘어질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후작님께서는 삼황자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얘기죠?”
“그, 그렇다네.”
“그렇다네?”
“그, 그렇습니다.”
“좋아요.”
역시 교육의 중요성이 이런 곳에서 나오는구만. 왠지 교육열에 온 힘을 쏟는 부모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일부 독자가 당신의 신박한 개소리에 반박합니다!」
“그러면 삼황자에 대해서 아는 건 전부 다 말해 봐요.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중심으로.”
“……황궁 내에서 떠도는 소문 중에서 삼황자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있습니다.”
“그게 뭐죠?”
“그게…… 워낙 허무맹랑한 말이라서…….”
절대로 믿어도 된다는 뜻이다.
“괜찮으니까 말해 봐요.”
“……아무도 믿지는 않지만, 삼황자님께서 ‘검은 마탑’과 모종의 교류를 하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검은 마탑?”
“오백 년 전에 있었던 썩은 이들의 군주와 전쟁에서 활약했던 자들로, 금지된 마법을 연구하는 자들입니다. 정말로 끔찍한 자들이죠. 그런 자들과 삼황자님이 관계되어 있다니…… 제가 모시는 분은 아니지만 터무니없는 소문이기는 합니다.”
대충 그런 [설정]인가.
별로 듣지도 않았는데 어떤 집단인지 훤히 보이는 걸 보니, 참 진부하긴 진부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검은 마탑]의 정체를 [흑마법사]로 추측합니다!」
「일부 독자들이 해당 추리에 감탄하며 그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 니들 잘났다.
어쨌거나 빌의 말대로라면, 생각보다도 일이 훨씬 더 쉬워질 듯 했다.
요는, 삼황자가 아주 나쁜 놈이라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사실은 내가 아주 유용하게 이용해 먹을 수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가시죠.”
“어, 어디로 말입니까?”
“어디긴.”
지금 내가 갈 곳이 한 곳밖에 더 있겠는가.
“설마…….”
“우린, 삼황자의 처소로 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