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Chapter 8: 검은 황제 (1)
「“드디어 찾았다.”」
「고난, 역경. 디오가 이곳까지 다다르기 위해서 행했던 일들은 단순히 그런 말들로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지상의 지옥. 서쪽 마왕의 영토인 이곳은 충분히 그 말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그건…….”」
「마침내 떨리는 손으로 유리병 안에 들어 있는 종이를 꺼낸 디오가 침을 삼켰다. 마침내, 마침내 돌아갈 수 있겠구나. 이 끝을 알 수 없었던 기나긴 여행의 끝이 다가오자, 그는 환희에 잠시 몸을 떨었다. 그의 곁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던 키리엘이 물었다.」
「“……볼 거야?”」
「그녀의 물음이 무슨 뜻인지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처럼 그저 작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표정을 본 키리엘은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어떤 말을 간신히 씹어 삼켰다.」
「마침내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펼친 디오는 내용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그것을 불태웠다. 그를 조용히 지켜보던 고대 정령 물이 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뭐라고 적혀 있었어?”」
「그렇게 말한 물이 침묵을 지키고 있던 디오의 표정을 본 순간, 억겁과도 같은 삶을 살아왔던 그녀는 지금껏 겪어 보지 못했던 공포라는 감정을 느꼈다. 그 표정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물은 감히 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디오?”」
「상황을 지켜보던 키리엘이 억지로 짜낸 용기로 간신히 이 정적을 깨자, 그제야 어느새 평소와 같은 미소를 머금은 디오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 잠깐 피곤해서. 별 내용 아니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
「거짓말. 키리엘은 디오의 그 말이 언제나처럼 하는 거짓말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이 속은 척 호들갑을 떨었다.」
「“정말! 그러니까 강행군은 무리라고 했잖아.”」
「“하하. 미안해.”」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별 내용 아니었다면 역시 그 소년에게 속았다는 거야?”」
「“아무래도 그랬던 모양이야.”」
「“역시 그랬구나.”」
「여전히 거짓인지 진실인지 모를 디오의 말이었으나,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했다. 아직, 아직은 때가 아니구나. 그 사실을 확인한 키리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키리엘이 말했다.」
「“그러면 역시 예정대로 서쪽의 마왕을 토벌하러 갈 거야?”」
「그녀의 마음 같아서는, 물음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좋으니 지긋지긋한 ‘용사’로서의 의무를 끝내자고 말하고 싶었다. 물론 어려운 일이었으나, 지금까지의 여정으로 충분히 성장한 자신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한시라도 이 의무를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그녀가 생각지도 못했던, 그리고 절대로 바라지 않았던 대답이었다.」
「“아니, 아무래도 그건 나중으로 미뤄야겠어.”」
「“……뭐?”」
「코앞까지 와서 미룬다고? 여기서 더? 디오의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 왜인지 모를 불길함이 엄습했다. 왜일까. 정작 본인인 그녀조차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그녀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리고 어느새 끼어든 물이 신난다는 듯이 외쳤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키리엘은 물이 저런 말을 하는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그녀가 너무나도 미웠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디오가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그 소년, 이름이 반이라고 했었지?”」
* * *
「대다수의 독자가 5일은 족히 될 법한 기나긴 꿈에 큰 불만을 토로합니다!」
……대체 무슨 놈의 꿈이 이렇게 긴지. 라이브로 꼬박 5일은 지켜본 기분이었다. 더군다나 또 개꿈 같기는 한데, 이번에는 아주 쓸모가 있는 개꿈인 듯 했다.
「일부 독자가 등장인물, ‘용사 디오’가 펼친 유리병 속의 내용을 궁금해합니다!」
그나저나 [마왕]을 앞에 두고서도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돌아오다니…… 아무래도 약이 올라도 바짝 오른 모양이었다.
「일부 독자가 당신의 정체에 궁금증을 표합니다!」
비록 예상과는 [주인공]의 행보가 달라지기는 했으나, 이 사실이 호재가 될지 악재가 될지는 아직은 판단할 수 없었으니 일단은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마왕]과 마주하지 않은 [주인공]은 그만큼 성장이 더뎌질 테고, [주인공] 파티의 전력에서 [마왕]도 제외될 테니 단순 계산으로도 나에게 있어서는 전혀 나쁠 게 없었다.
물론, 변수가 좋은 쪽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왕]을 토벌하고 돌아왔어야 할 [주인공]이 그 과정을 과감히 생략해 버렸으니, 당연히 그 시간은 비약적으로 단축될 것이 분명했다.
즉, 처음의 예상과는 다르게 이제 나에게 남겨진 시간이 그다지 많지만은 않다는 뜻이었다.
[도착이다.]
드디어인가.
칠흑색의 비늘을 지닌 루가 황궁 하늘에 모습을 드러내자, 다시 한번 황궁에 큰 혼란이 찾아왔다.
“드래곤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삼황자님의 처소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이미 대비가 되어 있었는지, 병사들의 움직임은 훨씬 더 침착했다.
“어서 황자님을 대피시켜!”
“마법진을 가동시켜라!”
그 침착함 덕분일까. 루가 나타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이내 황궁을 둘러싼 외벽에 그려진 마법진에서 일제히 방어 마법이 발동하며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지이잉-.
준비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을 텐데, 얼핏 보이는 규모만 해도 무려 천 년 동안이나 드래곤의 침입에 대비했다는 페론 마탑의 규모를 몇 배나 뛰어넘을 정도였다.
확실히 돈이 좋긴 좋은 모양이다. 아니면 개연성이 개판인 거거나.
[흥.]
하지만 단지 그것뿐, 루의 코앞까지 다다른 마법들은 이내 루가 펼친 마나 쉴드에 의해서 허무하게 가로막혔다.
물론, 이것도 언제까지고 버틸 순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차고 넘쳤다.
“가시죠.”
그렇게 루가 시선을 끄는 사이에 루의 등에서 은근슬쩍 내린 나와 빌은 아무런 제지 없이 삼황자의 궁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소란에도 불구하고, 도착한 삼황자의 궁 안에는 냉랭함만이 감돌고 있었다.
“……근위기사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빌의 말대로, 이런 소란에도 불구하고 정작 삼황자의 처소 안에는 삼황자를 대피시키려는 몇몇 시녀들만이 보일 뿐, 삼황자를 찾으러 뛰어 들어갔던 근위기사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일부 독자들이 이질적인 삼황자 궁의 분위기에 불길함을 표합니다!」
누가 아니래냐.
솔직히 말해서, 이쯤 되면 아예 대놓고 하는 경고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당연히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도 크게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다.
「일부 독자들이 당신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만약 여기서 물러나더라도 일정 부분의 [클리셰]는 파괴될 테니, 나에게 있어서는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나쁠 게 없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당연히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리가 없었다.
“시녀들을 따라가 보죠.”
「일부 독자들이 당신의 어리석은 선택에 고구마를 외칩니다!」
나라고 모르겠는가, 척 봐도 불길해 보이는 저 안쪽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얼마나 답답해 보이는 행위인지.
하지만 목적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뻔한 행동으로 일부 클리셰가 복원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0.46%」
출혈이 제법 있기는 했으나,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하면 크게 나쁠 건 없었다. 어차피 삼황자를 만나고 나면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 받아낼 테니 말이다.
“……내가 알고 있던 황자 궁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빌이 말하는 ‘무슨 일’이란 드래곤이 습격한 일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전에 일어난 일.
그리고 그것은 아마 삼황자가 황제가 되기 위한 사전 작업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황자 궁 안쪽으로 더 발걸음을 옮기자, 마치 일부러 연출이라도 한 것처럼 시녀들의 모습이 어느새 하나둘씩 사라지더니 이내 복도가 점점 더 어둠으로 물들어 갔다.
일황자 리안의 궁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로 작은 궁이었기에, 안쪽까지 다다르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안쪽에 다다르자, 굳건하게 닫힌 강철 문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보통 황자의 처소에 저런 쓸데없이 큰 강철 문이 있을 필요가 있던가?
그 이유는 그다지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될 듯 했다.
‘보나 마나 음침한 짓거리나 하고 있겠지, 뭐.’
그것도 생체 실험 정도면 아주 약과이리라.
내가 멍하니 서 있는 빌을 향해서 말했다.
“뭐해요?”
“무엇이 말인가?”
태연한 표정으로 나에게 되묻는 빌의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자신의 위치를 상기시켜 줘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무엇이? 말인가?”
“……무슨 일 때문이십니까?”
「일부 독자가 당신의 뛰어난 교육 성과에 감탄합니다!」
내가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강철 문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안 열고 뭐 하냐고요.”
“아! 당장 열겠습니다.”
제아무리 강철 문이라지만, 고작해야 문짝이다. ‘파괴왕 빌’이라는 거창한 별명까지 있는 빌의 힘에 버틸 리가 만무했다.
까강-!
흉기라고 불려도 모자라지 않은 빌의 손아귀가 강철 문을 붙잡고 비틀자, 순식간에 강철 문의 이음쇠가 흉악하게 찌그러지더니, 이내 허무할 정도로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내가 활짝 웃으며 빌에게 강철 문 안쪽을 안내했다.
“먼저 들어가시죠.”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데, 함부로 나부터 들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 놈들도 전혀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일부 독자가 연장자에게 친절한 당신의 모습에 호감을 느낍니다!」
……뭐, 상상은 자유라는데 굳이 정정해 줄 필요성은 없겠지.
그렇게 빌이 강철 문 안쪽으로 몇 걸음을 내딛지도 않아서 순식간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그의 몸을 삼켰다.
음침하다 못해 뭐가 튀어나와도 안 이상한 분위기.
「다수의 독자가 당신이 불길한 장소로 출입하는 것을 꺼립니다!」
나라고 대놓고 공포 분위기 조성하는 이런 곳에 발걸음을 디디고 싶겠는가.
[끼끼긱…….]
거기다가 문을 연 순간부터 들려오는 정체 모를 웃음소리까지.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무런 힘도 없는 내가 저 어둠 속으로 겁대가리 없이 발을 디뎠다가는 저 삼류 호러 무비의 희생양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했다.
‘루.’
삼류 호러 무비의 희생양이 되기 싫다면, 장르를 바꿔 버리면 그만 아닌가.
[알았다.]
바깥에서 난동을 피우던 루가 순식간에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내가 있는 곳을 향해서 브레스를 발사했다.
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삼황자 궁의 지붕.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0.51%」
그제야 어둠 속에 물들어 있던 강철 문 안쪽의 풍경이 햇빛에 의해서 낱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피와 시체로 가득한 그곳의 풍경 속에서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빌을 뒤로한 채로 마침내 삼황자 닐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Chapter 15]의 메인 빌런, ‘검은 황제 닐’을 마주하였습니다!」
「[개연성]을 초과한 만남입니다.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0.55%」
“……당신은 누구시죠?”
전혀 황자답지 않게 은근히 예의 있는 말투였으나, 앞서 제시된 증거들을 제외하고도 당연히 저런 놈들이 제일 나쁜 놈이기 마련이다.
그나저나 ‘검은 황제’라……. 이 안의 풍경도 그렇고, 만약 이 녀석이 예정대로 황제가 되었다가는 제국이 어떤 꼴이 될지는 둘째 치고, [주인공] 놈이 황위에 개입할 수 있는 너무나도 충분한 명분이 생겨 버린다.
당연히 내가 그런 꼴을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내가 삼황자 닐을 향해서 성큼성큼 걸어가서 말했다.
“당신? 형님이라고 해. 이 싸가지 없는 놈의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