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Chapter 8: 검은 황제 (4)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삼황자 닐의 모습은 이제 어딘가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크윽…….”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이제 적어도 리안이 생존해 있는 한 삼황자 닐은 제멋대로 날뛰지 못할 것이다.
즉, 삼황자 닐이 예정대로 반란을 일으켜서 ‘검은 황제’가 되는 일도, 그것 때문에 [주인공]인 용사가 개입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내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뒤돌아선 바로 그때였다.
「일부 독자가 이미 예상된 당신의 뻔한 행동에 지루함을 표합니다!」
「당신의 행보를 관심 있게 지켜봐 온 한 독자가 지나치게 반복된 당신의 언행에 지루함을 표합니다!」
「지속적으로 반복된 언행을 일삼았습니다! 일부 [클리셰]가 복원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0.45%」
‘……벌써?’
분명히,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변은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빨리 일어났다.
「당신의 행보를 관심 있게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당신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색다른 행보를 기대합니다!」
……아무튼, 입맛 한 번 맞추기 어렵다니까.
뭐, 요컨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처음에는 파격적으로 보였던 내 행보도 이제는 [독자] 놈들에 있어서는 ‘질렸다’는 이야기였다.
즉, 계속해서 [독자]들의 지지를 얻으려면 앞으로 해 나가야 할 일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을 취해야 한다는 뜻.
어쨌거나 본의 아니게 시기가 앞당겨지기는 했지만, 어차피 슬슬 행동 방침에 변화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기는 했다.
“일어나세요. 빌.”
내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건지,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던 빌 세빌스턴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자세히 보니 피투성이인 외견과는 다르게 실상은 너무나도 멀쩡한 상태였다.
“설마 자네가 삼황자님마저도 설득할 줄은 몰랐군.”
……어쩐지 과할 정도로 쉽게 쓰러져 있다 싶더니만, 아무래도 죽은 척이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부 독자가 등장인물, ‘파괴왕 빌’의 졸렬함을 비난합니다!」
적극적으로 동감하는 바다.
“마치 제가 죽기라도 바랐다는 듯한 말투네요.”
“오해하지 말게. 그저 최악의 상황이 될 경우를 대비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뿐이니.”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당당하게 늘어놓는 걸 보니, 재교육의 필요성이 열렬히 느껴졌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았다.
“그런 셈 치죠.”
“……조금 변한 것 같군.”
「일부 독자들이 급격하게 변화한 당신의 심경 변화에 주목합니다!」
자기들이 바라놓고 새삼스럽기는.
“조금 착하게 살기로 했거든요. 어쨌거나 당신이 해 줄 일이 있습니다.”
“해 줄 일?”
“지금 당장 서쪽으로 떠나주셔야겠습니다.”
“서쪽? 그곳에는 왜?”
“용사 일행에 대한 감시가 필요합니다.”
「대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일부 독자가 [주인공]을 적대하는 당신에게 강한 경계심을 표합니다!」
“나보고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으라는 건가…… 재미있겠군.”
「등장인물, ‘파괴왕 빌’이 [사망 플래그]를 발동합니다!」
……어째 조금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니 그 사실을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을 듯 했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매도 먼저 맞는 매가 낫다고.
이건 절대로 조금 전의 무례에 대한 소심한 복수 따위가 아니다. 정말로.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당신의 찌질함에 안타까움을 표합니다!」
……어찌 되었건 간에 대강의 정리가 끝나자, 내가 닐을 향해서 말했다.
“자 그러면 이제…… 닐.”
내 부름에 어느새 구석에서 의기소침해진 채로 있던 삼황자 닐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것도 쓰러져 있던 시체들을 얼싸안은 채로.
어째 조금 소름이 돋는 장면이었다.
“……뭐죠?”
「다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삼황자 닐’의 [사이코패스] 성향을 의심합니다!」
기껏해야 열셋, 넷으로 보이는 애송이가 조금 의기소침해졌다고 시체들이랑 놀고 있으니 저런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조차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으니, 오죽하겠는가.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것 말고도 네가 할 일이 있어.”
“……할 일이라고요?”
“검은 마탑, 그들을 만나게 해 줘.”
* * *
삼황자 닐과의 조우가 끝난 후, 루와 함께 숙소로 돌아온 나는 가장 먼저 베른과 대화를 나눴다. 일황자 리안에 관한 일부터 시작해서, 삼황자 닐을 비롯한 검은 마탑에 관한 이야기까지.
말하자면 일종의 작전회의였다.
그 모든 말을 들은 베른이 짧게 감상을 말했다.
“그러니까…… 디오, 그 망할 자식이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거지?”
어째 앞뒤 싹 다 잘라먹고 듣고 싶은 것만 들은 기분이지만, 어차피 베른에게 있어서는 그 정도면 충분하긴 했다.
“맞아요.”
“그나저나 ‘검은 마탑’ 녀석들과 접촉하겠다고? 위험할 텐데…….”
정작 본인은 세계관 공식 깡패인 [주인공]과 적대하는 주제에 말은 잘한다.
“나도 예전에 그들을 마주한 적이 있었어. 정말로 위험한 녀석들이지. 그런데도 굳이 접촉하려는 이유가 뭐야?”
“아무래도 당장 써먹을 수 있는 패는 모조리 써먹어야 그나마 승산이 있거든요.”
“설마…… 녀석들과 손을 잡겠다고? 그렇다면 나는 너를 도울 수 없어.”
「일부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정의]의 신념에 주목합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당연히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베른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냈을 리가 만무했다.
“손을 잡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들을 이용하는 거죠.”
“이용한다고? 자세히 말해 봐.”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어요. ‘검은 마탑’은 ‘용사’ 일행을 제국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의 존재 유무와는 상관없이 ‘용사’ 일행은 제국으로 올 것이다.
이유는 바로 나 때문에.
[주인공] 놈의 신경을 그렇게 긁어놨으니, 지금쯤 어떻게든 내 정체를 알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미끼라고?”
“예, 생각해 보세요. 어찌 되었건 간에 당신이 바라는 최종적인 목표에는 결국 ‘검은 마탑’ 같은 무법 집단의 퇴치도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 기회를 이용해서 ‘용사’와 ‘검은 마탑’ 이 두 녀석들을 일망타진하자는 겁니다.”
“용사의 힘을 이용해서 검은 마탑을, 그리고 검은 마탑을 이용해서 용사를 치자는 건가?”
“바로 그겁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머지를 전부 다 이용해서 [주인공]을 친다는 관점이 옳겠지만 말이다.
“……좋아.”
됐다.
그나마 설득하기 까다로운 편인 베른을 설득하였으니, 나머지는 일사천리나 다름없었다.
「다수의 독자가 흉계를 꾸미는 당신이 서둘러 [정의 구현] 당하기를 바랍니다!」
「[악]의 성향이 증가합니다!」
[악]이라…….
안 그래도 슬슬 새로운 행동 방침과 더불어서 내 이미지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할 때가 되긴 했다.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이 진부한 세계에서의 [악]은 결코 승리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좋아요. ‘검은 마탑’이 정기적인 연락이 취할 때까지는 아직 삼 일 정도 남았으니…… 우리는 그때까지 착한 일이나 하죠.”
“갑자기 뜬금없이 웬 착한 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베른을 향해서 내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단언컨대,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