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Chapter 9: 악어의 눈물 (2)
“네 옆에 있는 저 여자가 도대체 누구냐니까?”
「흥미로운 전개에 야설 빌런이 눈을 크게 뜹니다!」
「일부 독자가 등장인물, ‘일황녀 리안’의 [얀데레] 성향을 의심합니다!」
……망할.
지금 이 전개가 무엇을 말하는지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남자친구의 바람을 목격했던 한 독자가 등장인물, ‘일황녀 리안’을 열렬히 응원합니다!」
진정하자, 진정해.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이미 과다출혈로 죽어 있다고 했다.
「엄격, 근엄, 진지를 머금은 한 독자가 당신의 발언에서 오류를 지적합니다!」
……어쨌거나 이럴 때는 당당함이 중요했다.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혼란스러워하는 당신을 보며 즐거워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당황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내가 리안에게 애써 웃으며 말했다.
“여, 여기는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일부 독자가 은근슬쩍 말을 돌리는 당신의 어색함을 동정합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시대상에 맞지 않는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말 돌리지 마. 저 여자 누구냐니까?”
……당연히 씨알도 먹힐 리가 없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던가.
어느새 지척까지 다다른 리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 그러니까…….”
뭐라고 말하지?
본의 아니게 막장 아침 드라마를 찍고 있었지만, 우습게만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상황은 보기보다도 훨씬 더 심각했다.
만약 이대로 리안과의 사이가 틀어지게 되면, 내가 세웠던 계획의 기반이 되는 초석이 무너지게 된다.
즉, 이대로라면 얼마 후에 찾아올 망할 [주인공] 녀석에게 그럴듯한 반항조차 해 보지도 못하고 목이 댕강 잘리게 될 가능성이 무한히 높아진다는 뜻이었다.
‘……망할.’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했다.
무슨 놈의 소설이 목숨이 걸린 위기조차도 이렇게 뜬금없이 찾아온단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억지로라도 [개연성]을 마구 꼬집어서 이 모든 일을 없었던 것으로 되돌리고 싶었으나, 문제는 그것조차도 아예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대다수의 독자가 ‘전쟁과 사랑’을 방불케 하는 치정극을 흥미롭게 지켜봅니다!」
놈들이, 이 말 같지도 않은 치정극을 열렬히도 보고 싶어 하니까.
나로서는 참으로 망할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나.’
하이디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서 현재 상황으로 보았을 때는 보다 현실적인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얘가 누구냐면, 아는…….”
그때였다.
“반, 아는 분이야?”
그와 함께 마치 보라는 듯이 내 옆에 찰싹 달라붙은 하이디의 모습을 지켜보는 내 심정은 마치 화약고에 불이 번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다수의 독자가 막장으로 치닫는 치정극에 크나큰 흥미를 표합니다!」
그 모습을 본 리안의 얼굴이 더없이 흉악해졌음은 당연했다.
“……꽤 친해 보이네?”
아아, 망했다.
내가 짧게 감상을 늘어놓는 동안, 하이디가 내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듯이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다.
마치 자기가 하는 말이 어떤 파괴력을 가졌는지는 전혀 관심도 없다는 듯이.
“그럼요. 거의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했는걸요.”
……그것참 나도 몰랐던 사실인걸.
그런데 말이야. 하이디, 그 사실을 말해 주는 게 이 상황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이디가 여전히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올리며 나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치?”
……요 기집애 봐라.
천진난만하다 못해 이제는 어떤 악의마저 느껴지는 그 미소에 나는 화답은커녕 석상마냥 굳을 수밖에 없었다.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는 일부 독자가 등장인물, ‘하이디’의 영악함에 감탄합니다!」
「야설 빌런이 기묘한 긴장함이 흐르는 이 구도를 흥미롭게 지켜봅니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 ‘그 방법’ 뿐이다.
“응? 뭐라고?”
* * *
그 후에 찾아온 것은 짧지만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기나긴 적막이었다.
“…….”
“…….”
「인싸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분위기가 싸해졌음을 공표합니다!」
그 메시지를 시작으로 마침내 기나긴 적막이 끝나자, 마치 융단폭격 같은 폭발적인 메시지들이 쏟아져 내렸다.
「당신의 행보를 흥미롭게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당신의 실망스러운 대처에 맹렬히 분노합니다!」
「다수의 독자가 썩어 문드러진 낡은 전개에 깊은 우려를 표합니다!」
「‘전쟁과 사랑’을 애청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뻔뻔함을 맹렬히 비난합니다!」
「[바람둥이] 성향이 증가합니다!」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 숨고 싶고, 밧줄이 있다면 당장 목이라도 매고 싶을 정도의 쪽팔림이 전신에 엄습했다.
나도 안다.
이 방법이 되돌릴 수 없는 최악의 방법 중 하나였다는 것쯤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행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물론, 시간을 조금 벌었다 뿐이지 현실은 마치 만기 납기 일이 얼마 안 남은 빚더미마냥 확실하게 다가왔다.
리안이 천천히 떨어져 있던 고개를 들며 말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했다고?”
어째 뉘앙스가 천생연분마냥 들리는데, 명백한 오해다.
아니, 설사 ‘반’은 그랬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다.
“오해야.”
“오해?”
그러자 느껴지는 하이디의 따가운 시선은 마치 포식자의 그것과도 같았다.
“반,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벌써 잊은 거야?”
……너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참 파급력 있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하지만 그 재주가 지금 나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야설 빌런이 이미 막장을 넘어선 치정극에 강한 흥미를 표합니다!」
하이디의 말이 결정타였는지, 리안의 몸이 점차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함께한 시간이라고……?”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망할.
그 순간, 몰래 숨어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베른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내가 필사적으로 그에게 눈빛으로 말했다.
‘도와줘요!’
그러자 그가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어떻게?’
‘당장 하이디를 데리고 이 자리를 피해 줘요!’
‘나보고 그곳에 끼라고? 아서라. 여자들의 싸움에 끼어봐서 아는데, 나만 손해야.’
……이, 이해타산주의의 결정체 같으니라고.
그렇게 나오겠다면 나에게도 비장의 수가 있었다.
‘무슨 얘기인지 알아요. 마왕과 관련된 이야기죠?’
바로, 예전에 ‘개꿈’에서 보았던 ‘용사’와 ‘마왕’에 관련된 이야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너, 그걸 어디서 들었지?’
이미 그림자 속에 가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베른의 표정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이 상황을 도와주시면 알려드리죠.’
‘좋아.’
그렇게 내가 베른과 협상 아닌 협상을 하는 동안, 이미 상황은 극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리안의 눈동자에서 무엇인가 또르르 떨어져 내렸다.
“……이제 됐어.”
「대다수의 독자가 여자를 울리는 당신의 악덕함에 분노합니다!」
「[쓰레기] 성향이 증가합니다!」
리안이 조용히 읊조렸다.
“내가 멍청했지. 원하는 건 결코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법인데…….”
「클리셰가 강하게 요동칩니다!」
「등장인물, ‘일황녀 리안’의 [얀데레] 성향이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그 순간이었다.
쐐액-!
바람을 가르고 날아든 작은 조약돌 하나가 내 옆에 있던 하이디의 뒷덜미를 살며시 스치고 갔다.
하이디가 순식간에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수풀 너머에서 어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럴 수가! 하이디!”
진실성이라고는 1g도 섞여 있지 않은 그 영혼 없는 목소리의 주인은 당연히 베른이었다.
“오, 이럴 수가! 아무래도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야. 하이디는 내가 숙소로 데려갈 테니, 너는 여기서 볼일 다 보고 와!”
「다수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어색하다 못해 끔찍한 연기를 질타합니다!」
「심사위원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에게 ‘안구테러상’을 수여합니다!」
……저 정도면 연기력의 문제가 아니라 거의 성의의 문제였다.
그리고 더욱 경악할 만한 사실은, 저 빌어먹을 연기가 리안에게는 먹혔다는 점이었다.
“……괜찮은 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진심인 듯 했다.
“아아, 예! 괜찮고말고요. 걱정하지 말고 대화마저 나누시죠.”
……너 누구세요?
「일부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어색한 연기에 안과전문의의 진단을 호소합니다!」
그렇게 베른이 하이디를 업은 채로 마치 바람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나자, 단둘이 남은 나와 리안 사이에 짤막한 정적이 흘렀다.
하이디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그것을 본 리안이 말했다.
“……저 여자아이가 걱정되나 보구나.”
어째 다른 식으로 해석한 듯 했지만, 굳이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걱정돼. 하이디는…… 사실 내 동생이거든.”
「일부 독자가 갑작스럽게 밝혀진 충격적인 진실에 경악합니다!」
……니들이 믿으면 어쩌자는 거냐.
“뭐? 그렇다면 태어날 때부터 함께했었다는 것도…….”
“맞아. 하지만 하이디는 그 사실을 몰라. 내가 지금까지 비밀로 하고 있었거든.”
“……어째서?”
당연히 나도 모르지.
“그럴 만한 사정이 있거든. 하지만 묻지는 말아 줘.”
다른 사람이었다면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소리였지만, 상대는 당장 복잡한 가정사를 누구보다도 열렬히 겪고 있는 리안이었다.
제아무리 말 같지 않은 말일지라도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힘들었겠구나.”
눈망울을 촉촉이 적시고 있는 리안의 눈동자를 보자 어째 죄악감이 밀려들어 왔지만, 어쩌겠는가.
다 내가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그리고 이 이야기는 하이디에게 비밀로 해 주었으면 해.”
“……알았어.”
「일부 독자가 홀로 어떤 비밀을 짊어진 당신에게 강한 흥미를 표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딴 게 있을 리가 있나.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겠다는데 굳이 말릴 생각은 없었다.
「[신비주의] 성향이 증가합니다!」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0.53%」
……드디어 끝난 건가.
어쨌거나 가능하다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다. 만약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았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는 상상하기도 싫었다.
「야설 빌런이 큰 아쉬움을 표하며 퇴장합니다!」
……그래, 빨리 가라.
내가 말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태자 책봉 일이 결정됐어.”
그것참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물론, 이런 식으로 직접 전해 주지만 않았다면 말이지만.
“그게 언제인데?”
“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