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Chapter 9: 악어의 눈물 (3)
-“그러니까…… 반드시 와야 해.”
리안이 그 말을 남겨두고 훌쩍 떠나간 후, 홀로 남겨진 자리는 마치 태풍이라도 한바탕 쓸고 지나간 것처럼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반드시 오라고?’
왠지 가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았지만, 가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귀찮은 일이 그것을 훌쩍 넘어설 게 분명하니 아무래도 가야 할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나중의 일.
“내일 일은 내일 하지 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했다.
얼핏 들으면 부지런함을 강조하는 말 같지만, 실상을 알아보면 무섭도록 잔인한 말이 아닐 수가 없다.
왜냐고? 그 말은 즉, 일찍 일어난 벌레가 결국 새에게 잡아먹힌다는 말이었으니까.
때문에 내가 이렇게 일을 미루는 것도 잡아먹힌 벌레 꼴을 면하기 위해서지, 결단코 지금 내가 당장 뭘 하기 귀찮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정말로.
「도서관에서 막 탈출한 한 고시생 독자가 당신의 발언을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중간고사를 앞둔 한 학생 독자가 당신의 바람직한 사고방식에 공감합니다!」
「당신의 사상에 깊게 감명받은 일부 독자가 당신에게 후원금을 전달합니다!」
「현재 적립된 후원금: 12,200G」
……어째 묘한 죄책감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겠지.
어쨌거나 그사이에 어느덧 시간도 꽤 흘러서, 석양이 완전히 지고 밤과 함께 찾아온 싸늘함에 나도 모르게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볼일은 끝난 모양이군.”
그제야 모습을 드러낸 베른의 이마에는 숙소까지 전력 질주라도 하고 온 건지 땀방울이 살며시 맺혀 있었다.
급하긴 어지간히도 급했던 모양이었다.
“하이디는요?”
“걱정하지 마라. 잠깐 의식만 잃게 했던 것뿐이니까. 지금 숙소에서 잘 자고 있어.”
어째 목소리에 깃든 확신에서 상습범의 향기가 물씬 풍겨오지만, 기분 탓이겠지.
「일부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미묘한 발언에 주목합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과거 행적에 의구심을 표합니다!」
갖가지 개드립에 가까운 메시지들이 오가는 와중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베른의 표정은 무겁기 짝이 없어서 인지부조화가 일어날 지경이었다.
“이제 말해라. 도대체 어떻게 그 이야기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건지.”
사실, 까놓고 말해서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고는 그냥 꿈에서 본 베른과 어떤 여자가 나오는 장면 몇 개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했다가는 지금 눈앞에 있는 꼬장꼬장한 아저씨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뻔했다.
‘죽이려 할지도.’
웃음기 쫙 빼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악의 경우에는 내 곁을 떠날 가능성도 있었다. 지금 베른이 보이는 반응이 그 정도이리라는 것쯤은 아무리 둔해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기회라면 기회인가.’
비록 상황에 밀려서 얼떨결에 이렇게 되기는 했지만, 어차피 그때 보았던 ‘꿈’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당장 그때야 대놓고 밀어닥치는 클리셰를 따르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무시했다지만,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서두는 언제나 그랬듯이 질문이었다.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뭐지?”
“용사와 마왕, 그 두 존재는 도대체 뭐죠?”
예전에야 그냥 흔히 있는 [설정]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지만, 베른과의 조우 이후부터 조금씩 알아갈수록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마치 [설정] 그 자체가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네가 아는 것과 같다. 선과 악, 단지 그것뿐인 관계야.”
은근슬쩍 원론적인 이야기로 말을 돌리는 걸 보니, 확실히 무언가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일부 독자가 무엇인가를 감추는 ‘전대 용사 베른’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정말로 그것뿐이에요?”
“……무언가 캐내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다면 순서가 틀렸어. 너는 분명히 나와 약속을 했고, 그것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먼저 내 질문에 대해서 대답해야 할 거야.”
깐깐하긴.
예전부터 느끼지만, 베른은 그 태생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세계에 존재하는 여타 다른 인간들과는 다르게 상당히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늘 뻔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인간군상만 등장했었던 이 쓰레기 같은 소설에 어울리지 않게 말이다.
‘잠깐…….’
까다롭다고?
그때, 어떤 한 가지 가정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지금껏 내가 베른의 존재에 대해서 너무 가볍게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씀드리죠. 제가 어떻게 당신의 이야기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지.”
내가 이어서 말했다.
“봤어요. 직접”
허무하다면 허무한 그 말을 들은 베른의 표정이 더없이 이상해졌음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평소 내 행실을 지켜봐 온 덕에 별 해괴한 대답을 예상했을지언정, 열네 살배기의 소년이 몇 년 전인지도 모를 당시의 일을 직접 보았다는 말은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직접 봤다고?”
“예, 이 두 눈으로 똑똑히요.”
“어물쩍 넘기려는 생각은 통하지 않아. 네가 그곳에 있었던 일을 직접 봤다고? 거짓말을 하려거든 적어도 그럴듯하게 해.”
확신으로 가득 찬 베른의 말.
즉, 내가 꿈에서 보았던 그 장소는 적어도 일반인이 섣부르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예를 들면 지금 서쪽 대륙 중앙에 위치한 마왕의 성이라던가.
“대체 무얼 감추고 있는 거죠?”
“뭐?”
“제가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베른, 당신은 분명히 용사로서 마왕을 죽였어요. 하지만 그때 마왕이 죽었다면 지금 있는 ‘서쪽의 마왕’은 도대체 뭐죠?”
나는 분명히 보았다.
용사가, 당시에 용사였던 베른이 마왕이라고 불린 여자를 죽이는 모습과 절망에 빠진 채로 절규하는 베른의 모습을.
「일부 독자가 이미 지나간 떡밥을 회수하는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개연성]이 미약하게 진동합니다!」
베른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네가 알 필요 없어.”
「대다수의 독자가 뜬금없이 삼천포로 빠진 줏대 없는 전개에 대해 큰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나도 안다.
지금 나에게는 이것 말고도 태자 책봉식, 검은 마탑과의 접촉,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향해서 착실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주인공]에 대한 일처럼 할 일이 산더미라는 것을.
하지만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지 않던가.
더군다나 왜인지 모르게 베른이 지니고 있는 비밀을 파헤쳐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굳이 말하자면,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모든 일이 잔가지에 불과했다면, 지금 이 일이야말로 어쩌면 진짜 나무의 기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내가 말했다.
“그래요? 그러면 궁금하던 일도 해결했을 테니, 우리가 더 나눌 이야기는 없겠네요.”
“…….”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뭐해요? 이만 숙소로 돌아가죠. 하이디 혼자만 내버려 두는 것도 조금 걱정되기도 하고.”
그렇게 내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기자, 뒤늦게 나를 따라오기 시작한 베른의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의 행보를 관심 있게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당신의 자연스러운 밀당에 강한 흥미를 표합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도착한 제도의 번화가에서는 밤거리를 비추는 반짝이는 불빛들이 이리저리 춤사위를 추며 흔들렸다.
밤거리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정처 없이 걸었던 적은 이곳에 오고 나서는 없었기 때문에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돌아갈 수 있는 걸까.
이 세계는 도대체 뭘까.
이런 쓰잘머리 없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다 밤이 되니까 쓸데없이 센티해져서겠지.
「일부 독자가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당신의 중2병 감성에 오글거림을 표합니다!」
……나도 아니까 내버려 둬.
그렇게 한껏 중2병으로 치닫던 내 독백이 마침표를 찍은 것은 굳은 결심을 머금은 베른의 목소리가 들려온 후였다.
“반.”
그렇게 발걸음을 멈춘 그의 얼굴이 번화가에서 비치는 불빛에 일렁였다.
“할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당연히 할 말이 있으니까 불러 세웠겠지만 말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오직 너만 알고 있어야 해.”
“물론입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세상에 완전한 비밀이 어디 있겠는가.
「대다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이 품은 비밀에 강한 흥미를 표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굳건한 비밀을 지키고 있던 베른의 입이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천천히 열렸다.
* * *
비몽사몽 했던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눈앞에는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예복을 차려입은 리안이 수많은 왕족과 귀족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붉은색 카펫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지금부터, 태자 책봉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아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흐아암…….”
졸리구만…….
비록 비공식적인 초청으로 왔다지만 이런 자리에서까지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 내 복장은 귀족들이나 입을 법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정장이었다.
그나마 고르고 골랐기에 망정이지, 다른 귀족들의 꼬락서니를 보니 고개를 들고 서 있는 것도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이거 맛있다.”
그 와중에 케이크 품평을 하는 하이디의 모습은 어찌 보면 대범해 보이기까지 했으나, 정작 하이디를 초대한 것은 리안 본인이었다.
“그래, 그래. 많이 먹어 둬.”
태자 책봉식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시시했다.
수많은 각국의 왕족이나 귀족들이 모여서 자기들끼리 수다나 떨다가 행사 순서가 오면 잠깐씩 박수나 몇 번 치는 게 전부였다.
말 그대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허례허식, 그 자체였다.
물론, 그 와중에도 즐기는 사람은 있는 법.
“반, 이것 좀 먹어 봐.”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를 누구보다도 열렬히 실천하고 있는 하이디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히 쓸데없이 생각만 깊어지고 있는 내가 멍청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황자 전하, 만세! 만세! 만세!”
“태자 전하, 만세! 만세! 만세!”
원래였다면 지금 있는 태자 책봉식이야말로 앞으로의 내 계획에 있어서 가장 큰 변환점이나 다름없었건만, 어젯밤에 있었던 베른과의 대화 때문인지 왠지 모르게 더없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물론, 이것이 전혀 의미 없는 일은 아니었다.
「제국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0.98%」
분명히, 지금까지의 내 행적을 전부 합친 것과 맞먹는 어마어마한 [클리셰 붕괴율]의 수치는 결코 가볍게 넘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신경은 온통 지난밤 베른과 나눴던 대화로 가 있었다.
-“내가 죽였던 마왕의 이름은 줄리아.”
-“……마왕과 잘 아는 사이였나요?”
-“잘 알고 있었냐라…… 하하. 그럴 수밖에 없지. 그녀는…… 내 아내였던…… 아니, 내 아내였으니까.”
「대다수의 독자가 밝혀진 진실에 충격을 금치 못합니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저 용사니까, 용사니까 마왕을 죽여야만 하는 건 줄 알았지. 하지만 아니었어.”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베른은 그 탄생부터 결코 정상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원래였다면 존재하는지조차도 확실하지 않은 존재.
내가 마구 끄집어낸 [개연성]이 만들어 낸 혼돈의 존재.
적어도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전대 용사 베른’의 본질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그때의 나는 뒤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거야.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도록.”
그가 마주한 진실이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