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Chapter 9: 악어의 눈물 (4)
베른이 한 말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이 세계는…… 무언가 잘못됐어.”
어째서 용사와 마왕은 서로를 끊임없이 죽여야만 하는지.
이미 죽었다던 마왕은 어째서 계속해서 새로이 탄생하게 되는 건지.
비록 조금이지만, 그는 결국 알아버린 것이다.
이 비정상적인 세계가 가진 본질적인 불합리함에 대해서.
「일부 독자가 ‘전대 용사 베른’의 의문에 주목합니다!」
「[개연성]이 거칠게 요동칩니다!」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설정]이 요동칩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에게서 미묘하게 흔들리는 제4의 벽을 감지합니다!」
「관리자의 권한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작품이 비공개 처리됩니다.」
「대다수의 독자가 갑작스러운 작품의 비공개 처리에 맹렬한 비난을 쏟아냅니다!」
어떻게 하지?
결코 심상치 않은 내용이 담긴 메시지들이 쏟아지는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내 머릿속에는 오직 베른을 이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만약 그를 이 상태로 방치한다면, 결국에는 이 세계가 허구에 불과한 소설 속이라는 사실까지도 도달할 것이다.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지금 베른이 가진 의문의 결론은 결국 그것에 도달하게 돼 있었다.
만약 이대로 베른이 그 사실에 도달하게 된다면 내가 지금처럼 그를 통제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불확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때문에 내가 뱉은 말도 처음에는 그저 그의 시선을 잠깐 돌려보려 했을 뿐이었다.
-“베른, 당신의 아내가 마왕이었다는 이야기는…… 그녀가 마족이었다는 말입니까?”
그 말이, 괜한 벌집을 건드리는 일이었다는 것도 몰랐던 채로.
이내 들려온 베른의 말은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마족? 그게 뭐지? 처음 듣는 종족이군. 그녀는 나와 같은 인간이었어.”
……뭐?
-“그게 무슨 말이죠? ‘마왕’이라 함은, 당연히 마족들의 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까?”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그것이 이 뻔한 세계에서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모범 답안’이었으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나야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마왕’이라 함은, 모든 ‘악’의 정점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게 도대체 무슨…….”
베른이 말한 진실은 간단했다.
우습게도, 이 망할 놈의 [세계관]에는 처음부터 ‘마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한 명의 ‘마족’을 만난 적이 있었으니까.
* * *
“반.”
“어?”
긴 회상에서 나를 깨운 것은 다름 아닌 하이디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현실로 되돌아온 내 눈앞에는 입가에 생크림을 가득 묻힌 채로 케이크에 파묻히다시피 한 하이디가 세상 물정 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서 있었다.
“표정이 많이 심각해 보여서. 무슨 일 있어?”
“신경 쓰지 마. 조금 피곤해서 그래. 조금…….”
「당신의 행보를 관심 있게 지켜봐 온 한 독자가 초췌한 기색의 당신을 걱정합니다!」
시선을 돌리자, 태자 책봉식은 어느새 막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황실 근위 기사단이 펼치는 군무가 끝난 후, 지금 제국을 다스리고 있는 카이로 2세가 단상 앞에 섰다.
깔끔하게 뒤로 넘겨진 백발과 자라난 수염과 대비되는 위풍당당한 모습은 과연 저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네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현 제국의 황제, 카이로 2세가 말문을 열었다.
“먼저, 이 자리에 지금까지 함께 해 준 경들에게 친애의 말을 전하겠소.”
그 말을 시작으로 시작된 연설은, 마치 학창 시절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지금까지 이 제국이 이토록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다 경들의 공이며, 또한 짐의 복이라 할 수 있소. 또한 이토록 강건하게 자란 적통 황자가 태자 자리를 잇게 되었으니, 이 또한 제국의 홍복이 아닐 수가 없소. 짐은 앞으로 태자가 황제 자리에 오르더라도, 경들의 충심이 변하지 않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소. 하지만 몇몇 제후들께서는 아직까지도 태자의 능력을 의심하시는 분들이 있으신 걸로 알고 있소. 하지만 이 자리를 빌려서 짐이 직접 말하겠소. 훗날 이 제국을 이끌어 갈 태자의 책봉은 제국의 황제인 짐이 숙고하고 또 숙고한 결과라는 것을 말이오. 경들이라면 아실 것이오. 짐이 이 제국을 얼마나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지. 때문에 짐은 믿고 있소. 태자라면, 일황자라면 반드시 이 제국을 번영시키고, 짐이 미처 해내지 못했던 서쪽 대륙의 정벌 역시도 해낼 것이라고 말이오.”
「대다수의 독자가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는 기나긴 연설에 짜증을 표합니다!」
……누가 아니래냐.
물론, 불평한다고 해서 짧게 끝날 연설이었다면 진작 시작도 안 했을 것이다.
“자, 이 이야기는 짐이 동쪽에 있는 엘즈 에브람 왕국을 정벌할 때 있었던 이야기인데…….”
「등장인물, ‘황제 카이로 2세’의 [투머치토커] 성향이 증가합니다!」
본의 아니게 교장 선생님 훈시를 듣고 나자, 안개가 가득 낀 날에 찾아온 미세먼지마냥 복잡했던 생각이 단숨에 날아갔다.
역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때는 교장 선생님 훈시만 한 것이 없었다.
「학창 시절을 회상하던 일부 독자가 당신의 발언에 공감합니다!」
대강이나마 생각이 정리되자,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비교적 담백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어쨌거나 처음의 계획대로 일황자 리안은 내 도움을 얻어서 태자가 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원래 역사처럼 삼황자 닐이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서 황제가 급사하지는 않을 테니 리안이 황제가 되기까지는 비록 시간이 어느 정도 더 걸릴 것이 분명했으나, 황제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그다지 먼 얘기는 아닌 것 같았다.
‘여차하면 직접 손을 써도 되고.’
물론, 그 경우에는 여러 가지 방향에 있어서 상당히 큰 리스크를 짊어질 테니 별로 쓰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다.
어차피, 이미 제국은 내 손에 반쯤은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일부 독자가 당신이 가진 야망에 주목합니다!」
「당신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입가에 걸린 기분 나쁜 미소에 혐오감을 표합니다!」
……안티도 생기고, 나도 제법 출세한 모양이야.
물론, 그러던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서 어느새 이 쓸데없이 규모만 크고 실속은 별로 없었던 태자 책봉식이 마침내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상으로, 태자 책봉식의 폐막을 선언하겠습니다.”
태자 책봉식의 끝을 알리는 실베스턴 공작의 목소리와 함께 이 지긋지긋한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환희가 밀려왔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었지만.
“벌써 끝이야?”
유난히 아쉬워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당연히 하이디였다.
대체 어느새 먹어 치운 건지, 그녀의 눈앞에 널려 있는 케이크와 각종 디저트의 잔해들만 보아도 일반인이 몇 날 며칠은 우습게 먹을 양이었다.
“……이거 네가 다 먹은 거야?”
“응!”
당당하다 못해 자랑스러워하는 표정.
누가 보면 칭찬하는 줄 알겠다.
「일부 독자가 ‘하이디’의 기습적인 먹방에 위꼴을 호소합니다!」
「등장인물, ‘하이디’의 [대식가] 성향이 증가합니다!」
도저히 저 체구에 저 양이 어떻게 들어가나 의구심이 절로 생겼으나, 왠지 깊게 생각해 봐야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하이디, 먼저 숙소로 가 있을래?”
“너는?”
“나는 잠깐 볼일이 있어서.”
정확히는, 하이디가 있으면 왠지 귀찮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가 정답이었지만 말이다.
“알았어.”
그렇게 하이디를 먼저 보낸 후, 나는 이미 태자 책봉식이 끝난 후의 한적한 황궁 내부를 거닐었다.
원래였다면 닥쳐왔어야 할 ‘검은 황제’, 즉 삼황자 닐의 위협에서 벗어난 황궁 안의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런 평화롭기 그지없는 황궁 안을 내가 이렇게 유유자적하게 거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지금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하던가.
어느새 거추장스러운 예복을 벗어 던지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리안이 양 옆에 시녀들을 대동한 채로 나타났다.
“너희들은 먼저 들어가 있거라.”
리안의 명령에 시녀들이 물러나자, 그제야 태자라는 이름의 굳건한 가면을 쓰고 있던 리안의 표정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태자 책봉 축하해.”
어째 황녀에게 하는 축하치고는 조금 묘하긴 했으나, 괜히 엄한 소리를 했다가 누가 듣기라도 하면 큰일이었으니 우선은 입조심 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는 태자가 된 리안이 궁금한 것이 있다는 듯이 물었다.
“……이제 와 묻기는 조금 그런데, 도대체 어떤 수를 쓴 거야?”
무엇에 대한 질문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녀의 질문은, 도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굳건하게 균형을 지키고 있었던 태자 책봉에 대한 균형을 깨뜨렸냐는 것이었다.
“다 방법이 있지.”
정확히는, 내가 직접 손을 썼다기보다는 삼황자 닐의 힘이었다.
뭐, 삼황자 닐을 움직이게 한 것이 나였으니 어찌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물론, 단순히 그뿐이었다면 삼황자 닐이 반란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취할 필요도 없이 정당하게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즉, 리안이 이렇게까지 쉽게 태자로 책봉된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적통성을 가지고 있는 장자였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날 찾아온 용건이 뭐야?”
“어제는 오라며?”
“단순히 그것뿐이었다면 태자 책봉식이 끝나고 돌아갔을 거 아니야?”
이미 예상한 반응이었지만, 내가 일부러 멋쩍게 웃어 보였다.
“하하, 당해낼 수가 없네. 맞아.”
“……그러면?”
어째 눈빛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드는데…….
「야설 빌런이 눈을 크게 뜹니다!」
「로맨스 소설을 애독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다음 행동을 주시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요즘 조금 잠잠해졌다 싶더니만 금세 또 난리다.
만약 이대로 조금만 방치했다간 금세 분위기에 휩쓸려서 또 어떤 일이 생길지는 뻔했다.
「야설 빌런이 [야외 플레이]를 기대합니다!」
……시끄럽다, 요놈아.
본능으로 날뛰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간신히 승리한 이성의 내가 말했다.
“귀족들을 소집해 줘.”
만약, 리안이 태자가 아닌 평범한 황자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개 황자가 함부로 귀족들을 소집했다가는 역모죄를 뒤집어써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태자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귀족들을?”
“무척이나 중요한 할 말이 있거든.”
“할 말이라고?”
내가 말했다.
“제국의 모든 신하와 귀족들에게 전해. 서쪽 땅으로 마왕을 토벌하러 떠났던 용사가, 인간을 배신하고 마왕과 손을 잡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