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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이후의 소설 속-34화 (34/164)

◈ 34화 Chapter 10: 조연의 전쟁 (1)

“……그게 사실이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리안의 물음에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용사는 마왕의 천적이다. 그 사실은 이 진부한 세계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런 용사가 마왕과 손을 잡았다니?

이 진부한 세계의 주민으로 살아온 그녀로서는 도저히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사실이야.”

“어떻게 용사라는 작자가…… 끔찍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믿어 버리는 걸 보면, 리안에게 있어서 내 신뢰도는 높다 못해 맹신 수준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이느냐.

단지 그뿐이었다.

「대다수의 독자가 [주인공]의 행보를 가로막는 당신에게서 고구마를 느낍니다!」

「다수의 독자가 당신이 [정의 구현] 당하기를 강렬하게 기원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말하기도 새삼스럽지만, 대다수 독자에게서 저런 반응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누가 뭐라고 해도 상대는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면 처음부터 내가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당신의 선행을 지켜봐 온 일부 독자가 당신의 선택에 의아함을 표하며 사태를 관망합니다!」

「일부 독자가 [선] 성향을 지닌 당신의 행동에 어떤 깊은 뜻이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극소수의 독자가 당신의 행보를 응원합니다!」

지금까지의 선행이 결코 의미 없지 않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과거와는 명백하게 달라진 나에 대한 독자들의 온도 차에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지금까지는 긴가민가했었지만, 비로소 확실해졌다.

비록 아직 극소수뿐이라지만 ‘내 편’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주인공]의 호구 짓에 질린 한 독자가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조금 동기는 불순하기는 하지만 뭐, 괜찮겠지.

한동안 질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리안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나 혼자서는 귀족들을 움직일 수 없어.”

당연히 그렇겠지.

소집까지야 태자의 권한으로 어떻게든 한다고 쳐도, 귀족들이 직접 움직이게 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제아무리 대의명분이 확실하더라도 자기 안위를 제일로 중시하는 귀족들이 그리 쉽게 자신들의 병사와 군수품을 내어 줄 리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굳이 그들의 도움이 없더라도 황실과 나를 지지하는 귀족들의 힘만 동원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리안의 말처럼 황실과 리안의 측근들이라면 별다른 설득 없이도 충분히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리안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무리야.”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상대는 용사이자 [주인공]이다.

겨우 그 정도로 가능했다면 애초에 이렇게 복잡하게 돌아가면서까지 제국을 이용할 필요도 없이 루와 베른의 힘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어설픈 준비는 되려 하지 않느니만 못했다.

“귀족들에 대한 문제라면 나한테 방법이 있으니까 걱정 마.”

“방법?”

“그건 영업 비밀.”

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자 리안의 얼굴이 금세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당황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 무엄하다!”

그러면서도 턱이 쓰다듬어지는 고양이처럼 가만히 서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영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야설 빌런이 신분을 초월한 당신의 거침없는 스킨십에 격렬한 응원을 보냅니다!」

「스토리에 집중하고 있던 한 독자가 흐름을 깨는 스킨십에 홀로 외로이 항의합니다!」

「야설 빌런의 추종자들이 스토리에 집중하고 있던 한 독자를 집단 린치합니다!」

……아무튼, 저놈만 나오면 얌전한 날이 없다니까.

어쨌거나 사실 방법이 있다고는 했지만, 이 일은 지금까지 내가 해 왔던 상황과는 상당히 달랐다.

지금까지처럼 일 처리를 한다고 치면 그저 드래곤인 루를 앞세워서 귀족들의 목숨 줄을 쥐어 잡고 협박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예전과는 달리 지금의 나에게는 나를 조금이지만 지지하는 [독자]들이 생겼고, 아직은 그들의 지지를 이용할 필요성이 있었다.

만약 그들의 지지 없이 어설프게 [주인공]에게 덤벼들었다가는 [개연성]이라고는 깡그리 무시한 터무니없는 [작가] 놈의 농간에 비명횡사할 가능성이 다분했기 때문이었다.

즉, 지금까지처럼 무식하지만 제일 쉬운 방법은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슬슬 그걸 쓸 때겠지.’

가급적이면 훗날을 위해서 아껴두고 싶기는 했지만, 괜히 아껴뒀다가 똥 될 가능성이 없잖아 있었기 때문에 시기상 지금쯤이 적절했다.

그때였다.

“태자 전하,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도 모를 시녀장의 목소리에 리안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시녀장의 기묘한 시선이 나와 리안을 훑고 지나갔으나, 아무래도 추궁할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고, 곧 가겠다.”

마치 바람이라도 피다가 걸린 유부녀 같은 반응에 나도 모르게 조금 실소가 흘러나왔다.

“왜 웃어?”

“아니…… 그냥 조금 웃겨서.”

“이, 이만 가 봐야겠어.”

당황함을 넘어서 이제는 어딘가 조금 삐친 말투였지만 난 모르는 척 무시하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래.”

「로맨스 소설을 애독하는 한 독자가 성의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당신의 행동에 분개합니다!」

「솔로부대원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시크한 모습에 매력을 느낍니다!」

내 영혼 없는 손짓에 어딘가 한껏 불만을 머금은 리안이 혀를 빼꼼 내밀고는 그대로 뒤돌아서 총총 뛰어갔다.

……과연 정석 중의 정석이라는 건지, 솔직히 말해서 방금 전은 조금 귀여웠다.

「일부 독자가 등장인물, ‘일황녀 리안’의 사랑을 열렬히 지지합니다!」

그렇게 리안이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내가 기지개를 쭉 폈다.

자아, 밑밥도 충분히 뿌렸겠다.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됐다.

‘돈지랄 좀 해 볼까.’

「[자본주의] 버프가 발동합니다!」

「현재 [자본주의] 버프 등급: [0단계]」

「[자본주의] 버프 등급이 증가할수록, 사용할 수 있는 권한 개수와 등급이 증가합니다.」

「현재 적립된 금액 중 일정 금액을 소요하여 다음과 같은 효과를 발동시킬 수 있습니다.」

+

[미리보기 결제] [0단계] - 「100G」

[개연성 무시] [0단계] - 「500G」

+

[미리보기 결제] [0단계]

-미리보기 분량을 결제합니다.

-현재 등급에 따라서 결제할 수 있는 편수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개연성 무시] [0단계]

-일부 개연성을 무시합니다.

-현재 등급에 따라서 무시할 수 있는 개연성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

이것 봐라?

비록 처음 사용하는 것이기는 했으나, [자본주의] 버프의 위력은 내 예상을 훨씬 상회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물론, 이 [자본주의] 버프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꺼림칙한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당장은 내가 이용해 먹을 수 있는 부분이었기에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다수의 독자가 리안이 지나간 자리를 멍하니 지켜보는 당신의 모습에 아련함을 느낍니다!」

「일부 독자가 멍하니 서 있는 당신에게 다음 행동을 재촉합니다!」

‘보이지 않는 건가.’

아무래도 [자본주의] 버프에 대한 부분은 [독자]들에게 따로 보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자, 그러면 어쨌거나…….’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선]이라는 가면을 유지한 채로 귀족들을 움직이게 할지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정보였다.

‘아깝긴 하지만…….’

공짜로 줘도 안 보던 걸 웃돈까지 얹어주고 보려니까 어째 아랫배가 살살 아파 왔다.

「[미리보기 결제]를 사용하였습니다!」

「[100G]가 소요됩니다.」

「현재 적립된 후원금: 12,100G」

그와 함께, 눈앞에서 미묘하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광경이 펼쳐졌다.

* * *

「실베스터 공작이 회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지방 귀족들과 유력가들이 그를 반겼다.」

「“오셨구려.”」

「“으음.”」

「그들이 맞이한 실베스터 공작의 표정은 결코 밝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돌아선 삼황자 파에 의해서 지금까지 미묘하게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던 태자 책봉이 단숨에 진행되어 버린 것이다. 애당초 일황자의 뒷배 중에서 가장 든든했던 이가 황제인 카이로 2세 본인이었으니, 그다지 이상한 것도 없었다.」

「“그들이 갑자기 일황자를 지지하다니…… 이건 우리를 향한 명백한 기만이 아닐 수가 없소!”」

「“그렇다는 이야기는 역시 일황자 측에서 먼저 그들에게 접촉했다는 뜻이 아니겠소?”」

「“하지만 그것 또한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요. 지금까지 삼황자를 지지한다고 하던 그들이 어째서…….”」

「“어쨌거나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쪽은 그들이오. 우리도 이제 그들과의 약속을 더 지킬 필요는 없어졌소.”」

「이야기가 점점 더 극단적으로 치닫자, 이를 지켜보던 실베스터 공작이 중재에 나섰다.」

「“지금 전쟁이라도 하자는 거요?”」

「“……그건 아니지만, 이렇게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대로 일황자가 황제라도 되었다가는…….”」

「“되었다가는?”」

「“……이 제국이 반으로 쪼개질 겁니다.”」

「황실 재무담당 바실 남작의 말에 실베스터 공작의 표정이 굳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황당무계한 소리라고 할 법도 했지만, 바실 남작은 결코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태자 책봉에 있어서 ‘그들’을 끌어들인 이상 이미 이 사태는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공작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미 이 제국에는 그들이 뿌리까지 깊숙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지난 천 년간 제국의 마탑들이 쇠락했던 경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드래곤의 습격? 하! 고작 도마뱀 한 마리 따위를 어쩌지 못해서 벌벌 떨며 국고를 축내는 것이 현 제국 마법사들의 실태입니다.”」

「“바실 경!”」

「“왜요? 제가 못 할 말이라도 했습니까? 이미 제국은 지난 천 년간 그들에게 대항할 힘을 잃었습니다. 이 썩어 문드러진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황자님께서 황제가 되셔야만…….”」

「“그만하지.”」

「격해진 분위기 탓에 중재에 나선 실베스터 공작이었으나, 그 역시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처음 그가 세웠던 계획대로였다면 뒤통수를 치는 쪽은 그들이 아니라 오히려 이쪽이 되었어야만 했다. 이미 그들의 움직임은 모두 실베스터 공작 자신의 계산 아래에 있었다고 판단했건만, 이렇게 갑작스러운 움직임이라니?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변수가 있군.”」

「실베스터 공작의 혼잣말에 사태를 관망하던 로이드 백작이 물었다.」

「“변수라니요?”」

「“얼마 전, 일황자 궁과 삼황자 궁 하늘 위에 찾아왔던 드래곤.”」

「“그 일이 이번 태자 책봉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생각할 수 있는 머리가 있다면 당연히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겠나?”」

「“그건…….”」

「당황으로 물든 로이드 백작의 얼굴을 바라보던 실베스터 공작이 자신의 인복 없음을 탓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니 우리가 당할 수밖에.”」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적은 이토록 파격적인 행보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당돌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떠벌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를 얕봐서는 안 된다. 상대는 드래곤을 수족처럼 부리며, ‘그들’이 배후로 있는 삼황자마저도 꾀어냈다. 실베스터 공작이 마법으로 촬영된 소년의 영상을 띄웠다.」

「“그 소년.”」

「“소년이요? 드래곤이 아니라?”」

「“자네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쉰 실베스터 공작이 영상에 비친 소년의 얼굴을 확대 시켰다.」

「“반, 아인즈 반.”」

「앳된 외모에 속으면 안 된다. 아니, 냉정하게 생각해서 진짜 외모가 아니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상대는 드래곤의 비호를 받고 있다. 외모를 바꾸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을 터. 그렇다면 오히려 이쪽만 정보를 가지고 있는 지금이 바로 반격의 기회였다.」

「“바실 경, 아까 했던 말 다시 해 보게.”」

「로이드 백작과는 다르게 머리 회전이 빠른 바실 남작이 실베스터 공작의 진의를 알아채고는 몸을 떨었다.」

「“설마…….”」

「“이제 우리 ‘황녀’님도 좋은 배필이 필요하겠지.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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