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Chapter 10: 조연의 전쟁 (3)
“……황당하군.”
동요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내 찾아온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했다.
“…….”
물론, 그 고요함은 당연히 겉보기만이었고 내 시점에서의 현 상황은 시끄럽다 못해 난잡하기 짝이 없었다.
「대다수의 독자가 [주인공]에게 누명을 씌우는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선] 성향에 대해서 크나큰 의심을 품습니다!」
「당신의 선행을 지켜봐 온 일부 독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신념을 지지합니다.」
무려 [주인공]에게 파격적이다 못해 이런 어처구니없는 누명을 씌었음에도 고작 이 정도 반응이라니.
역시 사람은 베풀고 봐야 한다니까.
그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고 하면 긴 그런 침묵을 깬 것은 실베스터 공작의 차가운 목소리였다.
“……내가 그런 말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나?”
보통 이쯤 되면 대놓고 티가 날 법도 했건만, 표정은 물론이거니와 눈썹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을 보니 과연 난놈은 난놈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이미 나에게 넘어와 있었다.
“그렇다면 바로 대답을 하셨겠죠. 이리저리 눈동자 굴리면서 생각을 할 게 아니라.”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당신의 예리한 지적에 감탄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실베스터 공작이 용사와의 연관점이 없음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과 같았다. 물론, 상황이 그렇다는 거지 본인 스스로가 그 사실을 순순히 납득할 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너무 황당한 말이라서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뿐이야. 용사가 이황자를 인질로 잡아? 이보다 더 황당한 말이 어디 있겠나.”
「다수의 독자가 찌라시에 휘둘리지 않는 ‘실베스터 공작’의 명석함에 크게 만족합니다!」
아직 뭘 모르는 모양인데, 찌라시도 찌라시 나름인 법이다.
“황당하다라…… 그렇다면 증거를 보여드리죠.”
“……증거라고?”
그제야 미세한 균열을 드러낸 실베스터 공작을 바라보며 내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용사가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저 우연히 만난 것뿐이겠지.”
“마왕과 손을 잡은 용사가 우연히 만난 이황자와 동행을 한다? 그것참 꿈과 희망이 넘치는 이야기로군요. 어디 날개 달린 요정은 없답니까?”
“비꼬는 솜씨가 상당하군. 하지만 자네야말로 어떻게 용사가 서쪽의 마왕과 손을 잡았다고 확신하는 거지? 고작 그게 증거라는 건가?”
「다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실베스터 공작’의 명석함에 감탄합니다!」
“자신의 의무를 저버린 용사에 대한 믿음이 굉장하시군요.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만큼.”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
내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누가 감히 이 거대 제국의 공작에게 협박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공작님의 안위가 걱정될 뿐입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당신의 뻔뻔한 거짓말에 혀를 내두릅니다!」
「일부 독자가 쩌리들의 치열한 심리전에 흥미를 표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가지고 쩌리가 뭔가. 듣는 쩌리 기분 나쁘게.
쩌리 2호가 말했다.
“……잘도 말하는군. 원하는 게 뭐지?”
이제야 들어줄 마음이 드셨나.
그나저나 원하는 거라…… 내가 바라는 게 뭐 별거 있겠는가.
“세계 평화.”
감격이라도 받은 걸까, 쩌리 2호의 얼굴이 똥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세계 평화.
말 그대로 세계를 평화롭게 하는 것.
이 단순한 말에는 한 가지 오묘한 진실이 숨어 있었는데, 바로 이 말을 외치고 다니는 놈들 중에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놈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렇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명분이 된다.
이 말도 안 되는 미친 소리만큼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없으니까.
「일부 독자가 당신의 대의를 응원합니다!」
「소수의 독자가 당신의 [선] 성향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선] 성향이 증가합니다.」
「[대의명분이 있는 악당] 성향이 증가합니다.」
「장대한 포부를 밝히셨습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비중]이 증가합니다!」
「현재 비중: 10.9%」
정말인지 오래간만에 상승하는 [비중]을 보니, 다시금 내가 얼마나 [메인 스토리]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는지 느껴졌다.
과연 쩌리…… 아니, 조연의 이야기다웠다.
“…….”
그제야 간신히 똥 씹은 표정을 푼 쩌리 2호…… 실베스터 공작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용사가 이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는 건가?”
“그런 셈이죠.”
“그것참, 우스운 말이군. 자네 눈에는 지금의 세계가 평화로워 보이나?”
“그거야 관점에 따라서 다르죠. 제가 보기에는 평온하다 못해 지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루하다라…….”
그리고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인 실베스터 공작이 무엇인가를 결심한 얼굴로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계획을 말해 보게.”
* * *
제국 귀족 회의.
각 지방의 영주들과 각종 대소 신료들이 모이는 자리로서, 겉으로는 제국 내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 사고와 외교적 문제를 논의하고, 내부적으로는 전제군주제를 표방하는 황제의 절대적인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 회의는 본래였다면 아직 열릴 시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안의 중대성에 의해서 황태자 리안에 의해서 임시로 주최되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유감스럽게도 사실입니다.”
“어떻게 용사라는 작자가…….”
충격적인 진실 아닌 진실을 들은 그들은 모두 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기야, 이 세계에서 ‘용사’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단순히 그 힘을 넘어서 어떠한 상징성마저도 가지고 있었으니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당장 이황자님을 구출해야 합니다!”
그 주장이 나온 것은 이황자파의 일원 중 하나인 로이드 백작이었다.
그는 이황자파 인사들 중에서도 강경파로서, 이황자 사이먼에 대한 뒤틀린 충심이 엄청난 인물이었다.
물론, 좋게 말해서 그 정도지 사실은 그냥 앞뒤 구분 못 하는 머저리라고 볼 수 있었다.
“진정하시오. 어설프게 행동에 나섰다가는 이황자님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소.”
“크윽…….”
모두가 이렇다 할 의견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황태자 리안의 수행원 중 한 명으로서 참여한 내가 원탁에 앉은 귀족들의 면식을 훑었다.
과연, 하나같이 얼굴들이 기름으로 번질번질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지나간 시선이 실베스터 공작과 마주치자, 내가 먼저 슬쩍 웃어 보였다.
“흠.”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걸 보니, 아마 지금 실베스터 공작도 나름대로 최선의 수를 찾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이용해 먹을 수 있을지.
하지만 그가 나를 이길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가 한 가지 있었다.
그는 내가 리안을 황제로 만들고, 나아가서 이 제국을 삼키기 위해서 용사를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 그 전제 조건은 틀렸다.
왜냐하면 나는 그저 용사를 잡기 위해서 이 제국을 이용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이상, 실베스터 공작은 결코 나를 넘어설 수 없었다.
내가 슬쩍 리안에게 눈치를 주자 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빌 세빌스턴 후작님께서 곧 서쪽 마왕의 영토에서 돌아오실 겁니다. 용사가 인간을 배신했다는 그의 증언이 확보되면, 더 이상 늦장 부릴 시간이 없겠지요.”
“빌 세빌스턴 후작님께서 직접?”
“그분이라면…….”
우습게도, ‘파괴왕’이라는 이명까지 가진 빌 세빌스턴 후작에 대한 귀족들의 신뢰도는 굉장했다.
만고의 충신.
황실의 방패.
그것이 그들이 빌 세빌스턴 후작에게 가지고 있는 인식이었다.
하기야 원래 진짜 나쁜 놈들은 겉보기로 봐서는 모르는 법이었으니 납득 못 할 바도 아니었다.
「일부 독자들이 등장인물, ‘파괴왕 빌’의 이중성을 다시금 상기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훌륭한 제물이 된다.
자아…… 이제 슬슬 입질이 올 때가 됐는데.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황실 근위기사였다.
“누구냐?”
“황실 근위기사 릭! 결례를 무릅쓰고 다급하게 전할 말씀이 있습니다.”
온몸에서 눈에 보일 정도로 열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니, 그가 얼마나 다급하게 달려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근위기사에게서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실베스터 공작이 말했다.
“무슨 일이지?”
“빌 세빌스턴 후작님께서…… 전사하셨습니다.”
“전사라고?”
전사(戰死).
전투 중 사망을 가리키는 말로써, 전쟁은커녕 서쪽 국경을 제외한다면 이렇다 할 무력 충돌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현 제국의 귀족들에게 있어서는 무척이나 낯선 단어였다.
“자세히 말해 보게.”
“빌 세빌스턴 후작님께서 서쪽으로 향하는 국경 도시를 통과하신 지 일주일이 지난 후, 페론 마탑과 정기적으로 주고받던 연락이 끊겼습니다. 이후 파견된 조사대가 결국 빌 세빌스턴 후작님의 시신을 확인하였고, 마법 포렌식 수사를 통해서 빌 세빌스턴 후작님의 살해범이 용사 디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정말로 용사가 빌 세빌스턴 후작을 죽였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실베스터 공작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차가운 표정과는 반대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손에 잡히듯이 뻔했다.
‘빌 세빌스턴이 어째서 용사에게 죽었는지에 대한 인과관계가 궁금하겠지.’
물론, 실베스터 공작이 아무리 생각한들 그 진실을 깨달을 수는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죽은 것은 빌 세빌스턴 후작이 아니라, ‘파괴왕 빌’이라는 하나의 [빌런]에 불과했으니까.
즉, 빌 세빌스턴의 죽음은 이런저런 거창한 수식어 필요 없이 그저 [빌런]이 [주인공]에게 사냥당한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었다.
그 와중에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의 반응이 마치 용암처럼 타올랐다.
“빌 세빌스턴 후작님께서 살해당하셨다니! 이제 더는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당장 용사를 체포해야만 합니다!”
“어떻게 용사라는 작자가 서쪽의 마왕과 손을 잡은 것도 모자라서 제국의 후작까지 살해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내 시선이 실베스터 공작과 마주쳤다.
명백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의심을 멈추지 않던 그의 눈동자는 이제 진실이라는 무거운 현실 앞에 탁해질 수밖에 없었다.
“진정하십시오.”
“어떻게 진정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제국의 후작이, 그것도 빌 세빌스턴 후작님이 다름 아닌 용사에게 살해당했습니다. ‘타락 용사’가 탄생했다는 말입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진정하시라는 겁니다. 그래야만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논할 수 있을 테니.”
그러면서 실베스터 공작의 시선이 리안에게 향했다.
정확히는,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나에게였지만 말이다.
“……더는 할 말이 없겠군요.”
리안의 목소리는 차갑다 못해 감정조차도 말라붙어 있었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적어도 아직까지 빌 세빌스턴은 리안에게 있어서 몇 안 되는 든든한 신하이자, 아군이었을 테니까.
물론, 리안에게 빌의 진정한 정체에 대해서 말해 주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나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지금 나에게는, 그녀의 분노마저도 이용할 필요성이 있었으니까.
“전쟁을 준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