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Chapter 10: 조연의 전쟁 (4)
쿵! 쿵!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울려 퍼지는 힘찬 말발굽 소리와 함께 실베스터 공작이 자랑하는 중장기병 부대가 온몸에 두른 플레이트 아머만큼이나 찬란한 위용을 뽐내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을 위하여!”
“제국을 위하여!”
하나하나가 작위를 수여 받은 기사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압도적인 무장 상태와 기세에 먼저 합류해 있던 다른 귀족들과 사병들이 몸을 움찔했다.
“검은 창 기병대라니…… 소문으로만 듣던 이들을 이렇게 직접 볼 줄이야.”
“정말로 저들과 함께 싸운다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그닥- 다그닥-
“흥! 어디에서 평화에 찌든 돼지 냄새가 나는군.”
동쪽의 사자라고 불리는 칸달 변경백의 경기병 부대.
가벼워 보이는 무장만큼이나 압도적인 기동성을 지닌 그들은 광활한 동쪽 초원의 주인으로서 수 세기나 야만족의 침입을 막아 온 일등 공신이었다.
본래였다면 동쪽 국경을 떠나지 말았어야 할 이들이 이곳에 와 있다는 이야기는, 동쪽의 일부 국경을 포기하고서라도 이 전쟁에 집중해야 할 만큼 이 전쟁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제국의 전력이 모인 이곳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들이 이내 서로의 존재를 의식했는지, 부대원들 사이에서 온갖 신경전이 오갔다.
“저게 뭐야? 웬 거지새끼들이 여기에 와 있어? 동냥거리를 찾나 보군.”
“살만 뒤룩뒤룩 찐 겁쟁이 돼지들의 지린내가 나는군. 아! 무서워서 오줌이라도 싼 건가?”
“뭐? 겁쟁이? 돼지?! 이 자식들이!”
“해보려고? 자신 있으면 들어와 봐.”
물론, 어디까지나 여기 모인 놈들 중에서 특출하다는 거지 냉정한 시선으로 보면 얄짤 없었다.
「싸움 구경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가진 한 독자가 찐따들의 싸움에 큰 흥미를 표합니다!」
오호…… 싸움 구경 좀 할 줄 아는 놈인가?
“너희 같은 떨거지들과 한 전장에 서야 한다니! 치욕스럽기 짝이 없군.”
“네놈들 시체는 나중에 수습해서 돼지 먹이로 줄 테니까 걱정 마시지.”
“누가 시체가 될지는 두고 보시지!”
“누가 할 소리를.”
어차피 ‘용사’한테 몇 번 두들겨 맞고 나면 그제야 정신 차리고, 진정한 전우니 뭐니 하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불고 짤 놈들이 말은 참 잘한다.
‘글러 먹었어.’
분명히, 지금 모여든 전력은 제국이라는 거대 국가의 힘을 체감할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했다.
여기저기서 모인 보병은 25만이고 기병은 10만을 훌쩍 넘어갔다.
황제가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한 지 고작 하루 만에 모여든 숫자가 이 정도였다.
숫자만으로도 충분히 현실감이 없는 수.
물론, 보급도 충분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려 제국이 벌이는 전쟁이다.
전쟁에는 언제나 돈이 필요하고, 그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상인들이었다.
제국 전역을 아우르는 대상단 ‘제국상인연합’을 비롯해서 크고 작은 상단이 이 판에 끼기 위해서 앞다투어서 물자를 대기 시작한 덕에 전쟁물자는 말 그대로 썩어날 지경이었다.
뭐, 그 썩어나는 물자를 댄 그 상단에 돈을 지불해야 할 황족과 귀족들의 주머니 사정은 정말로 썩게 생겼겠지만 말이다.
때문에 지금 상황은 언뜻 보면 호재만 가득해 보이는 상황이었으나, 문제는 이 전쟁이 평범한 전쟁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 전쟁이 그저 국가와 국가가 벌이는 평범한 전쟁이었다면 강한 군대와 뛰어난 지휘관, 그리고 풍족한 보급까지 갖춰진 현 제국군의 상황은 이미 전쟁에서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상대가 바로 그 ‘용사’라는 점이었다.
내가 슬쩍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실베스터 공작 쪽을 훑었다.
중장기병 부대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는 애정은커녕 그 어떤 자부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패를 아끼고 있군.’
동쪽의 국경마저도 포기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모은 제국 최강의 전력이 겨우 저 정도일 리가 없었다.
당장 그렇게 자랑하던 ‘진짜 마법사’들의 모습조차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지 않은가.
여기 모여든 인간들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타락 용사 토벌전’이 끝난 후를 대비하는 것이 분명했다.
‘여차하면 힘이 빠진 호랑이를 몰아내기라도 할 생각이겠지.’
당연하지만, 고작 그따위 마음가짐으로 용사를 잡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상대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배제하고 보더라도, 상대는 예전과는 다르게 이미 서쪽 마왕의 영토에서 상당한 경험을 쌓은 용사였다.
물론 제아무리 용사일지라도 인간인 이상 압도적인 숫자를 앞세우면 방법이야 있을 것이다.
그도 인간인 이상 지칠 테고, 끊임없이 몰아붙이면 결국 쓰러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비록 장르와 상황에는 많이 차이가 있었지만 실제로 많은 이야기에서 그런 식으로 쓰러져 간 [주인공]도 있었으니, 영 허황된 이야기도 아니었다.
물론, 그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상대가 용사 혼자일 경우였다.
현재 내가 알고 있는 용사 일행의 숫자는 용사를 포함해서 네 명이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인 고대 정령 물.
비대칭 전력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고대 정령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놈들처럼 오합지졸인 놈들을 단신으로 몰살시키기에 최적화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아무리 루가 막아낼 수 있다지만, 그 싸움의 여파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자명했다.
그리고 나머지 일행인 엘프 키리엘과 이황자 사이먼의 경우 역시도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 내가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또 다른 변수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안 그래도 불리한 싸움인데 체급까지 밀리면 싸움을 거는 의미가 있겠는가?
자살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이 싸움에 필요한 것은 저렇게 몸집만 큰 지방 덩어리가 아니라, 확실한 일격을 가할 수 있는 뼈와 근육이었다.
‘그러고 보니, 기사들도 보이지 않는군.’
물론, 황실 근위기사처럼 명문가 자제 놈들이 한자리 차지하려고 온 이름만 기사인 짝퉁들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찾는 것은 그런 가짜가 아닌, 진짜배기로 정식 서약을 맺은 기사였다.
그 베른조차도 인정한 제국의 진정한 강자들.
아무튼…… 썩어 빠진 세계관답게 진짜 쓸 만한 인재들은 언제나 항상 그렇듯이 직접 발품을 팔아야 한다.
‘무슨 삼고초려도 아니고.’
물론, 고작 삼고초려 정도로 공명급 인재를 영입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남는 장사가 있을 수 없겠으나 정작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때문에 차선책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뭣 하지만, 아무래도 안일하기 짝이 없는 저놈들의 썩어 빠진 정신머리에 경각심을 일깨워 줄 필요성이 느껴졌다.
‘루.’
언약으로 맺어진 은밀한 연결고리를 통해서 내 계획을 전해 들은 루가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다.]
그렇게 구름 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루가 힘찬 날갯짓과 함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다수의 독자가 은밀하게 전해진 당신의 계획에 대해서 궁금증을 표합니다!」
실컷 궁금해하라지.
[독자]에 대해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면, 얼핏 보면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만 같은 그들의 시점은 철저하게 등장 인물들에게 맞춰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즉, [독자]들은 이 소설 내에서 거의 [비중]이 없는 루가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설령 그게 용사의 이름을 사칭한 드래곤이 민간인 학살 같은 만행을 저지르더라도 말이다.
‘뭐, 정말로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제아무리 언약자라지만, 인간을 극도로 사랑하는 드래곤인 루가 그딴 일을 벌이고 나중에 [독자]들에게 들켰다가는 [설정] 지적 폭격을 맞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물론, 그전에 루가 들어줄 리도 만무했고 말이다.
그렇기에 내가 루에게 한 일은 그저 ‘연출’에 불과했다.
늘 그렇듯이, 진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당신의 계획에 대해서 추측성 발언을 늘어놓습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그 주장에 반박하며 키보드 배틀이 벌어집니다!」
……먹고 사는 게 편하긴 한가 보다. 별 쓰잘머리 없는 걸로 다 싸우는 걸 보니.
그리고 그 쓰잘머리 없는 걸로 싸우는 놈들은 눈앞에서도 여전했다.
“이 더러운 야만족 잡종 놈들이!”
“그거 고맙군. 우리는 누구네처럼 돼지를 부모로 두지는 않아서 말이야.”
「심판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후자의 발언에 판정승을 선고합니다!」
……어째 두통이 밀려드는 기분인데.
그렇게 안이나 밖이나 똑같이 소란스러운 와중에 내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이들의 한심함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인즈 반.”
시끄럽기 짝이 없는 군중 속에서 나를 찾은 손님의 목소리는 반갑게도 내가 기다리던 이들 중 하나였다.
“오랜만이야.”
내가 인사를 건네자, 나를 찾은 사내가 뒤집어쓰고 있던 검은색 후드를 살짝 걷어서 얼굴을 보였다.
후드 사이로 드러난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삼황자 닐이었다.
닐은 누가 볼세라 금세 후드를 다시 뒤집어쓰고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오늘 밤, 그들이 당신을 찾아갈 겁니다.”
만약 당장 루도 없는 마당에 직접 찾아오라고 했다면 꽤 고생할 뻔했다.
“그것참, 고마운데? 대신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집들이 선물은 필요 없다고 해.”
「일부 독자가 영양가 없는 농담을 거침없이 내뱉은 당신에게 필터링 없는 야유를 쏟아냅니다!」
“……그들 앞에서는 농담도 가려서 하는 게 좋을 거예요.”
「다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삼황자 닐’의 발언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건방도 적당히 떠시죠. 누님만 아니었다면, 당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겁니다.”
「등장인물, ‘삼황자 닐’의 [시스콘] 성향이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어린놈의 친구가 말도 참 예쁘게 하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아빠 미소가 지어졌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네 걱정 덕에 리안도 앞으로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네.”
“……이 쓰레기가.”
“뭘, 모두 다 네 덕이지.”
「다수의 독자가 자연스럽게 인질을 언급하는 당신이 인성을 의심합니다!」
「악플 경력 15년 차를 자칭하는 한 독자가 안부와 패드립을 미묘하게 오가는 당신의 각도기성 발언에 주목합니다!」
「현직 도덕 교사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악]에게 반칙도 서슴지 않는 당신의 모습에 유쾌함을 표합니다!」
「당신의 도덕성에 감명받은 한 독자가 당신에게 후원금을 전달합니다!」
「현재 적립된 후원금: 12,110G」
……이 나라의 미래가 조금 걱정될 수준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내 알 바가 아니긴 했다.
“어쨌거나 이야기 전해줘서 고맙다.”
“……다시는 얼굴 볼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끄러워하기는.”
어쨌거나 기다리던 소식도 들었겠다, 더 이상 여기서 의미 없이 죽치고 앉아 있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내가 슬쩍 자리를 피하자, 멀리서 나를 주시하던 실베스터 공작의 시선이 나를 좇는 것이 보였으나 솔직히 말해서 별로 신경 쓸 건 아니었다.
제깟 놈이 좀 쳐다본다고 별수 있겠는가.
「야설 빌런이 등장인물, ‘실베스터 공작’의 우수에 찬 아련한 시선에 주목합니다!」
「브로맨스를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당신들의 미묘한 감정 기류에 주목합니다!」
……별수 있었네.
거기다가 아무리 봐도 나이와 신분보다도 훨씬 더 어마어마한 걸 초월한 것 같은데…….
어쨌거나 이런 식으로 엮이는 건 나로서는 절대적으로 피하고 싶었기에 최대한 도망치듯이 발걸음을 옮겼다.
「브로맨스를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당신의 어설픈 모습에 귀여움을 표합니다!」
「[아기 사슴] 칭호를 획득하였습니다!」
……마음대로 떠들어라. 망할 새끼들아.
어쨌거나 그렇게 군중들 사이를 완전히 빠져나온 후, 간신히 한숨을 돌린 내가 그대로 인적이 드문 골목길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뒷골목으로 들어온 후, 내가 눈앞에 있는 한 노숙자에게 동전 한 닢을 건네며 웃었다.
“이거 받고 빵이라도 사드세요.”
“가, 감사합니다!”
돈을 받아든 노숙자가 누가 훔쳐 갈세라 재빨리 자리를 떠나가자, 안 그래도 한적했던 뒷골목에 완전히 인적이 사라졌다.
그 순간, 뒷골목이 서서히 어둠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왔군.’
자, 이제 새 손님을 맞이하러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