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차 이후의 소설 속-38화 (38/164)

◈ 38화 Chapter 10: 조연의 전쟁 (5)

스르륵-

마치 종양처럼 스멀스멀 기어 퍼져 나가기 시작한 어둠은 이내 뒷골목 전체를 자신의 영토로 집어삼켰다.

「대다수의 독자가 심상치 않은 주변의 변화에 주목합니다!」

「일부 독자가 갑작스럽게 스산해진 분위기에 불쾌감을 표합니다!」

거참…….

분위기만 따지고 보면 무슨 당장 뒤에서 뭐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인데 말이야.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무언가의 출현을 예고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내 등 뒤에서 불쾌하기 짝이 없는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인즈 반.]

……그럼 그렇지.

인간의 목소리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이질적인 목소리.

그렇게 살며시 뒤를 돌아본 순간, 마치 불꽃처럼 일렁이는 검은 연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Chapter 16]의 메인 빌런, ‘연금술사 마그누스’를 마주하였습니다!」

「[개연성]을 초과한 만남입니다.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1.00%」

분명히, 여기까지는 이미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닐의 중재로 ‘검은 마탑’과 만나는 것.

하지만 세상사 모든 일이 늘 그렇듯이, 변수는 예상을 벗어나기 때문에 변수인 법이다.

「[클리셰 붕괴율]이 〔1%]를 초과하여, 일부 법칙이 파괴됩니다.」

‘……뭐?’

[클리셰 붕괴율]이 1%를 초과한 순간 찾아온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법칙의 파괴.

그렇게 애쓰며 이 세계를 부수고자 한 내 목적이 드디어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개연성]에 의해 일부 선지자들이 세상에 일어난 작은 이변에 의구심을 품습니다!」

이에 기쁨의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일일이 기뻐할 틈은 없었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다른 검은 연기가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수의 독자가 신원미상 인물의 접근에도 불구하고 멍하니 서 있는 당신에게 경각심을 요구합니다!」

「일부 독자가 지나치게 안일한 당신의 모습에 고구마를 선언합니다!」

당사자도 가만히 있는데 자기들이 더 난리다.

뭐,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검은 연기를 바라보며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검은 마탑’이 보낸 사자인가? 연금술사 마그누스.”

내가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내 주위를 돌고 있던 검은색 연기가 눈에 띌 정도로 일렁였다.

명백한 동요였다.

[……과연, 삼황자가 당할 만하군.]

「다수의 독자가 단번에 신원미상의 인물을 알아보는 당신의 명석함에 놀라움을 표합니다!」

「일부 독자가 당신의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력에 의아함을 표현합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신비주의] 성향이 증가합니다.」

“높게 평가해 줘서 고마운걸.”

고작 말 한마디에 재평가하는 꼴이라니…….

내가 좋아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

[길게 말하지 않겠다. 우리를 만나고자 한 목적이 뭐지?]

“너무 훅 들어오는 거 아니야?”

[길게 말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더럽게 비싸게 구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포기할 리가 없었다.

“너희에게 있어서 절대로 나쁜 이야기는 아니야. 말하자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도 잡는 일이라고 할까?”

[마지막으로 말하지. 길게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본론부터 말해라.]

「철벽남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신원미상 인물의 철벽에 감탄합니다!」

……망할 놈.

철벽도 철벽 나름이지, 이 정도면 거의 석상 수준이었다.

“좋아, 말하지. 내가 너희를 세상 밖으로 나오도록 도와주겠다.”

[흥미롭군. 더 해 봐라.]

……이것 봐라?

지금까지 음지에서 숨어 살던 놈들을 꺼내 주겠다는데도 고작 이 정도 반응이라고?

내가 계속해서 말했다.

“……용사에 대해서는 들어보았겠지?”

[우리가 주시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존재다.]

“이야기가 빨라지겠군. 바로 그 용사가, 서쪽의 마왕과 손을 잡고 인간을 배신했다.”

[그래서?]

「일부 독자가 신원미상의 인물이 가진 시크함에 주목합니다!」

……끝까지 이딴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어디 한 번 끝까지 그렇게 나올 수 있나 보자.

“너희에게 제국과 함께 세상을 위험에 빠뜨리는 ‘타락 용사’를 처치할 기회를 주겠다. 지금까지 숨어 지냈던 너희가 당당하게 세상 밖으로 나올 유일한 기회라고 볼 수 있지.”

목적도, 명분도 확실하다.

더군다나 [빌런]에게 있어서 [주인공]은 숙적이나 다름없을 테니, 이 제안은 사실상 성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던 이 뻔한 세계의 공식대로라면, 그래야만 했다.

[유일? 하하…… 사냥이 끝난 사냥개는 잡아먹힐 뿐이지.]

소름이 끼치는 쇳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지고, 검은 연기는 더 이상 대화 따위는 원하지 않는다는 듯이 위협적으로 온몸에 검은 가시를 세웠다.

「다수의 독자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에 주목합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당신이 어떤 방법으로 위기를 타개할지 주목합니다!」

“……뭐?”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까지 만났던 뻔한 인간상에 비교해서 지나칠 정도로 느껴지던 괴리감이 무엇인지.

그것은 마치, 이 뻔한 세계가 더 이상 내가 알고 있던 세계와는 달라졌다고 시위라도 하는 것 같았다.

[네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 있을지 흥미롭군.]

그와 함께, 뾰족하게 뭉쳐진 검은색 연기가 이내 가시의 형상을 이루고는 거침없이 나를 향해서 쇄도했다.

쐐애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붉은색 피로 물들었다.

「마음이 여린 한 독자가 끔찍한 광경을 예상하며 두 눈을 질끈 감습니다!」

그리고 찾아온 것은 얼굴에서 느껴지는 화끈거리는 통증이었다.

죽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지한 내가 슬쩍 시선을 내려서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간 검은 가시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쇳소리가 마치 나를 조롱하듯이 울려 퍼졌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네 머릿속에는 무엇이 있을지 흥미가 있다고.]

「마음이 여린 한 독자가 당신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합니다!」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목숨을 쥐고 조롱하는 [악]의 행태에 분노합니다!」

‘이것 봐라…….’

법칙의 붕괴로 일어난 이 현상은, 지금껏 뻔하디뻔했던 이 세계를 더 이상 뻔하지 않게 만들었다.

한낱 등장인물에 불과한 소설 속 버러지가, 나를 두고 조롱할 만큼.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그렇기에 유쾌했다.

“……재미있는데.”

[뭐?]

이런 현상은 결코 지금이 끝이 아닐 것이다.

내가 클리셰를 부수면 부술수록, 그리고 이 세계의 법칙이 망가지면 망가질수록 이 현상은 더욱더 심해질 것이다.

그래서일까.

진부하기 짝이 없어서 짜증 나기만 했던 이 세계가, 처음으로 흥미롭게 느껴졌다.

“야.”

[……설마 나를 부르는 호칭인가?]

“너 말고 여기 누가 있어? 눈깔아, 이 씹새끼야.”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예전과는 달리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흥, 조금 가지고 놀아 볼까 했더니 이젠 흥미가 식는군.]

나도 안다.

이제 더 이상 이 정도로는 그 어떤 충격도, 변화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하지만 세계가 변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독자가 [악]에게 거침없는 당신의 언행을 지지합니다!」

「다수의 독자가 당신에게서 [악]의 [정의 구현]을 원합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선] 성향이 증가합니다!」

[아인즈 반, 네 운명은 여기까지다.]

명백한 사형선고.

물론, 내가 그 선고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누구 마음대로.”

순진하게 말로 하는 설득의 시간은 이미 지났다.

이제부터는…… 폭력의 시대다.

「[개연성 무시]를 사용하였습니다!」

「필요로 하는 [개연성 무시] 등급이 부족하여, [1500G]가 추가로 소요됩니다!」

「[2000G]가 소요됩니다.」

「추가적인 금액 소모로 [개연성 무시] 등급이 상승하였습니다!」

「[개연성 무시] 등급: [0단계] → [1단계]」

「현재 적립된 후원금: 10,110G」

그리고 그 순간.

마치 새까만 밤하늘을 비추는 달빛처럼 나타난 그것은 뒷골목을 집어삼키고 있던 어둠을 순식간에 몰아내며 나타났다.

「대다수의 독자가 구원자의 등장에 환호합니다!」

그것을 붙잡은 이는 다름이 아니었다.

이제는 다 해어져 버린 밀짚모자.

여전히 꼬질꼬질한 튜닉.

그리고 손에 들린…….

“아아, 이것은, ‘쟁기’…….”

그 순간, 손에 들린 것을 확인한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정상적인 물건이라면 결코 발할 수 없는 강렬한 빛.

과거, 그것의 주인이었던 그가 지금 손에 잡혀 있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 모를 리 없었다.

“……가 아닌데? 이게 어떻게 여기에…….”

내가 그를 향해서 싱긋 웃어 보였다.

“선물입니다. 베른.”

* * *

「도저히 끝이 날 것 같지 않던 그렌델 평야를 지나, 마침내 국경 도시에 도착한 용사 일행은 기나긴 여행에 대한 피로를 풀듯이 숙소로 잡은 여관, ‘여행자들의 쉼터’ 침대에 몸을 내던졌다.」

「“살 것 같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지조차도 미지수였던 여행이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리엘은 서쪽의 마왕을 그대로 방치하고 왔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런 그녀의 불편함을 알아챘는지, 침대에 누워 있던 용사 디오가 한량처럼 웃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마왕이야, 볼일만 끝나면 곧바로 토벌하면 문제없어.”」

「“그렇긴 하지만…….”」

「디오의 말이 맞다. 제아무리 용사의 숙명이 마왕의 처단이라지만, 야박하게 시간제한이 달리지는 않았다. 아니,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애초에 그 숙명이라는 것도 미심쩍기 짝이 없었다. 본래였다면 이런 고민을 할 시간조차도 없었을 키리엘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시간이 생겨나자 그러한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밥이나 먹자고.”」

「그렇게 말한 디오였지만, 일행 중에서 ‘인간다운’ 식사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인 디오와 사이먼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사 시간에는 가급적 함께하였던 그들이었기에, 키리엘과 물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디오의 뒤를 따랐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는 어딜 갔다 온 거야?”」

「질문을 한 이는 사이먼이었다. 애석하게도, 그는 식사 시간을 가리지 않고 질문이 많은 유형이었다.」

「“응?”」

「“어젯밤에 잠깐 야영장에서 사라졌었잖아? 잠을 설치는 바람에 봤었거든.”」

「“뭐…… 잠깐 볼일 좀 보러.”」

「어딘가 어눌한 디오의 반응에 사이먼이 낮게 말했다.」

「“피똥이라도 싸셨나 봐?”」

「“뭐?”」

「“그야…… 피 냄새를 그렇게 풀풀 풍기고 들어오면 알 수밖에 없잖아?”」

「“사이먼!”」

「순식간에 이를 제지하러 나선 키리엘과 어느새 물방울을 통통 튀기고 있는 물을 바라보며 사이먼이 웃으며 말했다.」

「“나 참…… 왜들 그렇게 봐? 그냥 궁금해서 물었던 것뿐이야. 궁금해서.”」

「“너…….”」

「“하지만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죽인 게 들짐승인지 인간인지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는 인간과 함께 식사하는 것도 조금 우습잖아? 먼저 일어나 볼게. 고기를 써는 기분이 조금 묘해질 것 같거든.”」

「폭언에 가까운 말을 남기고 사이먼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키리엘이 당장이라도 그를 붙잡을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말린 것은 다름 아닌 디오였다.」

「“그만해.”」

「“하지만…….”」

「“틀린 말 없어. 하지만 너희는 나를 믿어줬으면 해. 내가 했던 선택은 결코 ‘악’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 믿을게.”」

「“고마워.”」

「키리엘은 여전히 디오의 미소가 불안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이제는 자신이 하는 말조차도 진실인지 알 수 없어진 채로.」

「그렇게 식사가 끝난 후, 방으로 되돌아온 디오는 어딘가 방의 풍경이 달라졌음을 느끼고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없어.”」

「“뭐가 없다는 거야?”」

「키리엘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용사 디오가 굳다 못해 딱딱해진 얼굴로 말했다.」

「“성검이…… 없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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