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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이후의 소설 속-44화 (44/164)

◈ 44화 Chapter 11: 주연의 전쟁 (4)

“신의 가호 아래, 그대에게 평온한 안식이 있기를.”

성직자의 기도와 함께 빌 세빌스턴 후작의 장례식에 참석한 수많은 조문객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가 아직까지도 명예로울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의 빌 세빌스턴은 [빌런]으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설사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들 그의 겉은 언제까지나 제국의 충신이자 한 가문의 수장이기 때문이었다.

“후작님…….”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겁니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저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하이디에게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장난이야. 장난. 그러고 보니 일주일 후에 빌 세빌스턴 후작 주최로 다과회가 열릴 예정이라던데, 거기에 데려가 줄게.”

-“정말?”

-“정말이고말고.”

아마 하이디 본인은 잊어버렸을 가능성이 높았으나, 어쨌거나 본의 아니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해 버린 셈이었다.

「개코를 자랑하는 한 독자가 당신에게서 은연중에 흘러나온 찌질함을 감지합니다!」

시끄러워, 임마.

딱히 빌에 대해서 죄책감이나 그런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조금 찜찜하다고 할까.

딱 그 정도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 한 조문객 무리가 내 눈에 띄었다.

“빌…….”

수많은 조문객 사이에 섞여 있는 그들은 얼핏 보면 평범한 조문객들처럼 보였지만, 그들에게는 평범한 조문객들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철컥- 철컥-

둘러쓴 후드 아래에서 갑옷 이음쇠와 함께 살며시 드러난 병장기.

그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곧 출정을 앞둔 황태자 리안과 그녀를 따르는 귀족들이었다.

내가 그들을 향해서 슬쩍 손짓하자, 그들 중 선두에 있던 황태자 리안이 후드를 살짝 걷어내고는 나를 반겼다.

“반.”

솔직히 말해서 리안이 당장 껴안으려 달려들면 어쩌나 했는데, 제아무리 그녀일지라도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 상황에서까지 그러지는 않는 듯했다.

“이제 가는 거야?”

“응.”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리안의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굳이 말하자면, 조금…… 아니 많이 차분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야설 빌런이 어딘가 성숙해진 듯한 ‘리안’의 모습에 주목합니다!」

‘빌 때문인가.’

그렇다면 리안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나로서는 그 점을 이용할 뿐이다.

“빌 세빌스턴 후작님 말이야.”

“……빌과 아는 사이였어?”

“어느 정도는.”

비록 철저한 갑과 을의 관계였지만 말이다.

내가 리안을 바라보며 최대한 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었어. 너라면, 이 제국의 번영과 안정을 가져올 수 있을 거라고.”

“빌이?”

“그리고 이 말도 했어. 그렇기에 자신은 이 제국의 평화에 위협이 되는 존재가 있다면, 그 어떤 위험이라도 무릅쓰고 맞설 것이라고.”

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온 목소리는 무척이나 떨리고 있었다.

“……그렇구나.”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당신의 능숙한 선의의 거짓말에 감동합니다!」

“고마워.”

“뭘. 지켜보고 있을게.”

솔직히 가능하다면 직접 리안의 옆에서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싶었으나, 당장 나를 주목하고 있는 몇몇 귀족들의 시선도 그렇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전면에 나서는 것은 명백한 하책이었다.

“이만 가 볼게.”

마침내 결심을 굳힌 표정.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해 줄 말은 한 가지뿐이었다.

“메론 평야.”

“응?”

어딘가 맛있어 보이는 이름이지만, 앞으로 그곳에서 일어날 일은 결코 이름처럼 달콤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며칠 안에 용사 일행이 그곳을 지나갈 거야.”

내 말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은 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너는 대단하구나.”

“어서 가 봐.”

그와 함께 리안이 후드를 눌러쓰고서 인파 사이로 사라지자, 그녀가 떠나가기를 기다리던 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슬슬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루.”

그리고 찾아온 정적.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루?”

내가 몇 번을 다시 불러보아도, 원래대로였다면 벌써 들렸어야 할 루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지금까지 없었던 ‘루’의 이상행동에 관심을 표합니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하지만 나는 이내 그 가정을 지워 버렸다.

드래곤 중에서도 압도적인 강함을 자랑하는 루가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개연성]에 크게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잠깐…… 개연성이라고?’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싸늘한 감각.

나도 모르게 식은땀 한 줄기가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제야 내가 했던 한 가지 실수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나는 독자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루의 특성을 이용해서 용사에게 누명을 씌우는 데 성공했고, 그 덕에 제국의 진정한 힘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방법에는 함정이 숨어져 있었다.

나조차도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그런 함정이.

그제야 알았다.

내가 이 세계에 꼬장을 부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작가보다 위에 있는 놈이 누구인지.

독자.

바로 그 독자들의 눈이 미치지 않는다는 말은, 루가 언제 어디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더라도 그것에 대한 [개연성]을 지적할 독자가 없다는 말이었다.

내 진정한 적이 누구인지를 망각한 안일함.

그리고…… 그 안일함의 대가는 혹독했다.

“……루?”

대답은 여전히 들려오지 않았다.

이 기나긴 적막이 나에게 말해 주는 사실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루가 사라졌다.

* * *

루가 사라졌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그때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 불안감은 어느새 내 마음속에서 마치 선악과를 탐하는 뱀처럼 똬리를 틀었다.

불안함은 곧 행동으로 나타났고, 어느새 나는 달리고 있었다.

“조심 좀 하고 다녀!”

“미안합니다.”

“그것참, 보기 드물게 사과를 할 줄 아는 청년이로군.”

「도덕 교사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깔끔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당신에게 수행평가 점수 만점을 부여합니다!」

이렇게 미친놈처럼 뛰어 본 게 얼마 만이었지?

그렇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나와 일행들이 머물고 있는 여관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갑작스럽게 다급해진 당신의 행동에 이변을 감지합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행동과 ‘루’의 이상행동 사이의 연관 관계를 추측합니다!」

“어서 오세요.”

종업원의 인사에 가볍게 대꾸하고는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방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젖히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입가에 생크림을 가득 묻힌 채로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하이디였다.

“조, 조금밖에 안 먹었어!”

“후우…….”

순진하다 못해 얼빵해 보이는 얼굴.

그런 하이디의 얼굴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허탈함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무사했구나.

단지 그것뿐인 사실이 왜인지 모르게 나를 더없이 안도하게 만들었다.

“반? 왜 그래? 뛰어왔어? 배고파?”

“……조금 급한 일이 있어서.”

내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자, 어느새 슬쩍 열린 방안에서 성검을 닦고 있던 베른이 마치 신문지를 펼쳐 놓고 돋보기로 한 자 한 자 읽어 내리던 중년 가장처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급한 일?”

“계셨었군요.”

“내가 따로 갈 데가 있나. 주변에 작은 텃밭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주말 농장을 꾸리는 한 중년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발언에 격한 공감을 표합니다!」

여전히 능글맞은 베른의 얼굴을 본 순간, 내가 품고 있던 불길한 예감이 어째서 빗나갔는지에 대해서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그런 건가.’

내가 베른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계속 하이디와 같이 있으셨나요?”

“응? 뭐…… 그렇지?”

……역시 그렇게 된 거였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루.

그에 반해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생크림이나 퍼먹고 있는 하이디와 베른.

그 둘의 차이점은 간단했다.

“내 안부가 궁금해서 그렇게 급하게 뛰어온 건 아닐 테고.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루가 사라졌어요.”

“흐음…… 드래곤이?”

「[대의명분이 있는 악당]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시크함을 지지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관심받는 놈과 못 받는 놈의 차이였다.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는 모양이네요. 그래도 명색이 동료였는데.”

“동료라…… 뭐, 아쉽긴 하네. 여러모로 꽤 편리했는데.”

“……어쨌거나, 당장 움직여야 합니다.”

“드디어 녀석을 잡으러 가는 건가?”

“예.”

베른이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드래곤은? 없어졌다면서?”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루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당장 그보다 더 우선시해야 할 일이 있을 뿐.

“좋아. 그러면 가자고.”

베른이 채비를 하는 동안, 내가 하이디에게 말했다.

“하이디, 준비해.”

“응? 나도?”

“너도 가야 해.”

“힝…… 여기서 놀고 싶은데.”

루가 사라진 원인을 알고 있는 이상 하이디를 혼자 방치해 두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전쟁터에 직접 끌고 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내 시선이 닿는 곳에는 있어야 했다.

“가자.”

조연의 전쟁은 끝났다.

이제, 주연의 전쟁이다.

* * *

인해전술(人海戰術).

병력이 마치 바다와 같은 규모로 밀려드는 전술을 말하는 것으로, 전쟁에 있어서 기본 중의 기본이나 다름없는 전술이다.

내가 바로 메론 평야를 전쟁터로 선택한 이유 역시도 이 인해전술의 강점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곳이 탁 트인 평야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 계획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메론 평야에 어느새 모여든 제국의 수십만 병사들이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규모로 늘어섰다.

“우!”

“우!”

말 그대로, 압도적인 규모와 위용.

그리고 그 압도적인 힘은 단순히 숫자뿐만이 아니었다.

“저길 봐! 펠릭스 경이야!”

“설마 진짜로 펠릭스 멘델 경이라고?! 붉은 장미의 기사!”

“저건…… 설마 학살 도끼 테무르? 저 야만족이 이 전쟁에 참여했다고?”

“말도 안 돼…… 저 동쪽의 야만족에게 죽은 내 전우만 세 자리가 넘는다고!”

“저길 봐! 매의 눈 샬리바도 있어!”

실베스터 공작과 칸달 변경백을 필두로 모여든 말 그대로 하나 같이 호걸이나 영웅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자들.

저들이야말로 이 제국의 진정한 힘이었으며, 나아가서 내가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게 만드는 필승 카드들이었다.

‘객관적인 전투력만 보자면…… 성검이 없는 용사는 저들 개개인과 호각이라고 볼 수 있다.’

자칭 매의 눈썰미라는 베른의 말이니, 정보의 출처에 의문을 품을지언정 얼추 비슷하게 맞기는 할 것이다.

그때였다.

[제국의 병사들이여!]

마법으로 증폭된 황태자 리안의 목소리가 메론 평야에 울려 퍼졌다.

[오늘! 나는 그대들을 사지로 내몰 것이다. 그러나 명심해 주길 바란다. 그대들이 지금 목숨을 걸고서 지키고자 하는 이 제국이, 이 땅이, 앞으로 그대들의 가족과, 연인과, 친우들이 살아갈 땅이라는 것을.]

-우! 우! 우!

[나를 따르겠는가!]

-우!

[나를 위해서 그대들의 피를 바치겠는가!]

-우! 우!

[그렇다면…… 그대들의 시체를 여기에 묻어라!]

-우! 우! 우!

어째 조금 어설픈 연설이었으나, 듣는 병사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했는지 이내 엄청난 함성소리가 메론 평야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그렇게 리안의 연설이 끝나자 본격적인 지휘는 실베스터 공작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전군.]

무섭도록 비장한 목소리.

그런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먼저 울려 퍼지던 함성소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멈춰 섰다.

제국의 병사들이 얼마나 잘 훈련된 강군인지를 보여 주는 부분이 아닐 수가 없었다.

[진격하라.]

그리고 마침내 떨어진 진격 명령.

그가 무엇을 보고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는 따로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메론 평야 지평선에서 어느덧 한 무리의 여행자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들.

「대다수의 독자가 [주인공]의 등장에 환호합니다!」

「다수의 독자가 마침내 격돌하는 전쟁 양상에 큰 흥미를 표합니다!」

“응?”

“디오, 이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고 했더니…… 이런 환영식을 준비해 뒀다 이거지?”

디오가 사납게 웃자, 키리엘이 이상하다는 듯이 외쳤다.

“디오, 진정해! 아무래도 이상해. 어떻게 우리가 여기로 올 줄 알고 있었던 건지, 언제부터 우리를 쫓았는지, 그리고 도대체 왜 우리를 쫓는 건지에 대해서 알아보아야만…….”

“키리엘, 잘 봐.”

디오가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는 고개를 돌려서 마치 해일처럼 몰아치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광기에 젖은 모습을 봐. 저게 정상 같아?”

“그러니까 거기에는 분명히 원인이…….”

그러나 그녀의 그런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허리춤에서 예전에 챙겨 두었던 병사의 검을 꺼내든 디오가 그것을 망설임 없이 가장 선두에 달려오던 병사를 향해서 던졌기 때문이었다.

“끄아악!”

“흐어억!”

용사에 의해서 던져진 검의 위력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마치 포탄처럼 쏘아진 그것이 지나간 자리에는 이미 수십 구가 넘는 병사들의 시체만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런 학살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용사 디오가 환하게 웃었다.

“녀석들은 말이야…… 그저 악에 물든 무리에 불과해. 그러면 용사인 내가 저들을 어떻게 해야겠어?”

“그건…….”

“답은 간단해.”

「대다수의 독자가 [주인공]의 [양민학살]을 기대합니다!」

“악은, 처단하면 그뿐.”

그와 함께, 용사 디오의 전신에서 검은색 기운이 물씬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흑화한 주인공] 클리셰가 발동합니다!」

「[주인공]의 전투력이 일시적으로 [200%] 상승합니다!」

「[흑화한 주인공] 클리셰에 따라, 시간이 지날수록 [주인공]의 전투력이 추가적으로 상승합니다.」

「[흑화한 주인공] 클리셰에 따라, 시간이 지날수록 [주인공] 버프 효과가 점차 감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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