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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이후의 소설 속-45화 (45/164)

◈ 45화 Chapter 12: 총력전 (1)

[마법사들, 위치로.]

실베스터 공작의 신호와 함께, 메론 평야에 가득히 늘어선 수백 개의 마법진에서 이내 수많은 마법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번개여!”

“불이여!”

하늘에서는 벼락이.

그리고 그 벼락이 내려친 자리에서는 지진이.

콰르릉-!

쿠르르릉-!

혹여 종말이 온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압도적이었다.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의 광팬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흥미진진한 장면에 팝콘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그런 재해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병사들은 어느새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순식간에 마법의 반경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뒤로 이동하라!”

“마법의 효과 범위 밖에서 방패 벽을 세워라!”

과연 제국의 병사다운 모습.

만약 이것이 평범하게 벌어지는 국가 간의 전쟁이었다면, 이 전쟁의 승패는 볼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평범한 전쟁이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제국의 상대는 그저 그런 평범한 일개 국가가 아닌 용사였다.

단순히 그것뿐이었다면 제아무리 용사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방법이 있었을 테지만, 그런 희망조차 버리는 것이 바로 [주인공]이라는 녀석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주인공] 버프가 발동 중입니다!」

「[주인공] 버프 효과로 등장인물, ‘용사 디오’에 대한 모든 원거리 공격이 무효화 됩니다!」

벼락이 내리친 땅이 갈라지며 용암이 솟구쳤으나, 그 거창한 스케일과는 다르게 실질적인 효과는 미미하다 못해 전무 할 정도였다.

굳이 말하자면, 간신히 용사의 옷 위로 약간의 화산재가 내려앉게 한 정도라고 할까.

수백만의 병사를 몰살시킬 수도 있는 압도적인 마법들치고는 무척이나 허무한 결과였다.

‘마법은 의미가 없으니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 사실은 분명히 리안에게도 말해 두었었으니, 아마도 이는 실베스터 공작의 일방적인 판단일 가능성이 높았다.

‘……좋지 않다.’

병사들을 물린 것은 결국 아군의 마법에 희생당하지 않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용사를 향해서 좁혀들던 포위망을 스스로 풀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대가는 곧 현실로 다가왔다.

“으…… 뭐 이렇게 찝찝해?”

그리고는 자욱하게 일어난 화산재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용사, 디오가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이게 다야? 겨우 내 몸에 이런 먼지나 묻히려고 같잖은 잔재주를 부린 건가?”

명백한 이죽거림.

그러나 그 이죽거림은 결코 길지 않았다. 이내 스프링처럼 접힌 용사의 몸이 순식간에 튕겨 나가며 병사들이 세운 방패 벽으로 날아갔기 때문이었다.

피융-!

도저히 사람이 날아갔다고는 믿기지 않는 소리.

제국이 세운 방패는 견고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상대가 좋지 못했다.

그것도 무척이나.

“끄아악!”

방패와 함께 통째로 절단된 병사의 몸이 미끄러지듯 떨어져 내렸다.

주인을 잃은 하반신에서 피가 분수처럼 치솟으며 견고했던 제국의 방패에 이내 혼란이 찾아왔다.

“끄흐윽!”

“막아! 막으라고!”

그리고는 용사의 손끝에서 시작된 죽음의 검무.

그 학살에는 성검이나 용사의 힘처럼 거창한 것은 필요 없었다.

사람이 개미를 짓밟을 때 총을 쏘거나 전력을 다하지는 않듯이, 용사의 별 의미 없는 손짓도 병사들의 목숨을 빼앗기에는 너무나도 충분했다.

마치 개미를 짓밟는 것처럼.

용사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병사들의 몸이 사정없이 갈라졌고, 꿰뚫렸다.

그가 지나온 자리에 남은 것은 피와 시체뿐이었으며, 그 광경은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말 그대로 시산혈해(屍山血海).

사람이 낙엽보다도 못하게 죽어 나가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불쾌했다. 비록 그것이 내가 의도했던 일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아직인가.’

비록 전체 숫자에 비하면 죽은 병사의 숫자가 몇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벌써 수천 명의 병사가 죽었다.

그런데 저 정도로 거창하게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반응이 없다니?

그렇다면 그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몰입할 대상이 필요한 거군.’

그리고 마침, 그 대상이 눈앞에 한 명 나타났다.

그들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딱 좋은, 그런 먹잇감이.

“여보…….”

시체더미 사이, 운 좋게 목숨을 건진 한 병사가 품 안에 있는 목걸이를 열어 보며 흐느끼며 말했다.

“꼭…… 꼭 살아서 돌아갈게.”

그러나, 병사의 다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사망 플래그]가 발동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천천히 들린 병사의 얼굴에 천천히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

그 후, 그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사람의 형상을 한 어떤 괴물의 모습과 주인을 잃은 채로 쓰러져 가는 자신의 힘없는 몸뚱어리였다.

또르르-

병사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가 힘없이 바닥을 굴렀다.

그렇게 주인을 잃은 채로 방황하던 목걸이의 여행은 결국 용사의 발걸음에 의해서 깨부숴지며 막을 내렸다.

「소수의 독자가 한 가정의 가장을 무참히 살해한 [주인공]의 행동에 불만을 표합니다!」

「등장인물, ‘용사 디오’의 [정의] 성향이 감소합니다!」

불만을 품은 것은 독자들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나서야겠어.”

그곳에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베른이 성검을 어루만지며 서 있었다.

「일부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타오르는 정의감에 감탄합니다!」

“기다려요.”

“뭐?”

“아직 나설 때가 아닙니다.”

“나설 때? 또 이상한 말을 하는군.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야 할 거다.”

“이유라…….”

뭐, 정 대답해 달라고 하면 못할 것도 없긴 했다.

하지만 계산은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는가.

“좋아요. 가세요. 대신, 정 가실 거라면 그건 놓고 가세요.”

내 손가락 끝이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베른의 허리춤에 있는 성검이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돼서 당신이 성검을 용사에게 빼앗길 경우, 지금 있는 제국 측의 전력 우세는 모조리 다 물거품이 됩니다. 그 말은, 여기 있는 모두가 죽을 거라는 말입니다.”

“지금 내가 저런 애송이한테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적어도 이길 거라고 순진하게 믿는 것보다는 근거가 더 많죠. 이미 한 번 지기도 했었고.”

“……재미있군.”

「파워 밸런스에 큰 관심이 있는 한 독자가 당신의 묵직한 팩트 폭격에 유쾌함을 표합니다!」

“적어도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기대하지.”

* * *

예전에 한창 비슷비슷한 판타지 소설이 유행할 때, 그런 장면들이 있었다.

소드 마스터가 백만 대군을 학살하는.

그때야 백만 대군을 학살할 수 있는 소드 마스터가 떡하니 있는데도 굳이 백만 대군을 모아 와서 학살당해 주는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머금었었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은 결코 그때처럼 우습지 않았다.

“흐아악!”

“사, 살려…….”

말이 잘 훈련된 병사고 강군이지, 결국은 그들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사람인 이상 압도적인 힘과 공포에 굴복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였고,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대항할 힘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대항할 힘을 잃었다고 해서 그 공포가 다가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대항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압도적인 공포.

“도, 도망쳐야 해!”

「[사망 플래그]가 발동합니다!」

“벤자민! 구하러 갈게!”

「[사망 플래그]가 발동합니다!」

“으아아아! 이 빌어먹을 자식, 죽여 버릴 거야!”

「[사망 플래그]가 발동합니다!」

그리고 으레 그렇듯이, 그 공포의 원인은 [악]으로 표현되기 마련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일부 독자가 [악]처럼 잔인하기 짝이 없는 [주인공]의 행태에 불만을 표합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주인공]의 신념을 크게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등장인물, ‘용사 디오’의 [선] 성향이 감소합니다.」

“지, 집에 어린 처자식이 있…….”

「[사망 플래그]가 발동합니다!」

“끄아악!”

도대체 몇이나 죽었을까.

용사 디오가 전쟁터에 난입한 지 이제 고작 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죽어 나자빠진 병사만 일만을 넘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전쟁 중에 발생한 사상자들을 굳이 부상자와 사망자로 분류할 필요가 없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퍽이나 다행이군.’

말 그대로 원 샷 원 킬.

[주인공]인 녀석에게 약간이라도 베이면, 손가락을 베이든 발가락을 베이든 관계없이 [비중]이 없는 엑스트라로서는 에누리 없이 사망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 비현실적이다 못해 엿 같은 부상자와 사망자 비율의 진실이었다.

그에 반해서 녀석이 조금은 지쳤느냐고 묻는다면 단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흑화한 주인공] 클리셰가 강하게 발동 중입니다!」

「[주인공]의 전투력이 [250%]로 증가합니다!」

「[주인공] 버프 효과가 일부 감소합니다.」

적어도,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망할 괴물 녀석.’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예상하기는 했지만 이건 해도 해도 정도가 심하지 않은가.

‘이쯤에서 등장할 때가 됐는데.’

제국 측 입장에서도 이 정도면 탐색전으로 인한 희생은 충분하다고 여겼을 터.

그렇다면 이제 용사에 대항할 수 있는 카드들이 나설 때였다.

그때였다.

쿵-

쿵-

발걸음 소리 하나만으로 전장 전체가 들썩일 정도의 압도적인 존재감.

그리고는 이내 병사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붉은 머리의 중년 남자.

“자네가 디오인가?”

「다수의 독자가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호기심을 표합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해당 인물의 정체를 추측합니다!」

“누구시죠?”

“내 이름은 펠릭스 멘델. 부끄럽지만 기사일세.”

그의 이름을 들은 순간, 디오의 표정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차갑게 굳었다.

“……장미의 기사.”

“용사가 내 하찮은 허명을 알아주다니, 더없이 영광이군.”

“당신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쩐 일로?”

도저히 이 학살을 자행한 장본인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의 평화로운 디오의 목소리에 펠릭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제국의 병사를 학살하고 있는 자네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군.”

펠릭스의 말에 디오가 오히려 되물었다.

“학살? 이건 집행입니다.”

“집행이라…… 그게 무슨 말이지?”

“저들은 악입니다.”

“악? 용사의 눈에만 보인다는 그 선과 악을 말하는 것인가?”

“맞습니다.”

디오의 말에, 펠릭스의 표정이 잠깐 동안 구겨졌다.

그렇게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이내 그가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이 물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지? 저 악들을 비호 하는 나 또한 같은 악으로 보이는가?”

더없이 올곧게 뻗은 기사 펠릭스의 눈동자.

그러나 디오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렇습니다.”

“……허어”

“비키시지 않겠다면, 베겠습니다.”

“역시 그렇게 나오겠다는 건가.”

“비켜 주십시오.”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겠어.”

“당신은 저를 이길 수 없습니다.”

“나도 잘 알고 있네. 혼자서는 말이겠지만.”

펠릭스의 씁쓸한 말과 함께 이내 병사들 사이에서 다른 두 명의 인영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거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거구의 사내와, 그에 비하면 호리호리하기 짝이 없는 미남자.

서로가 정 반대처럼 대비되는 그 둘은, 이미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동쪽의 야만족, 학살 도끼 테무르.

고울산의 왕자, 매의 눈 샬리바.

장미의 기사 펠릭스 멘델과 더불어서 이 제국의 진정한 힘이라고 볼 수 있는 세 손가락.

바로 그들이었다.

“잡담 떨 시간은 없다. 펠릭스.”

“흥.”

“비겁하다고 하지는 말게. 우리도 나름대로 필사적이니.”

3:1의 상황.

제국의 세 손가락 실력은 각각이 성검이 없는 용사와도 견줄 정도라고 했으니, 저 수적 우위만 유지한다면 제아무리 [흑화한 주인공]이라고 할지라도 쉽게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이 왔다는 것은 마침내 내가 움직일 때가 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좋아.’

이제 퍼즐은 모두 모였다.

“베른.”

“이제 가는 건가?”

“용사에게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내 시선이 슬쩍 저 멀리서 이 상황에 참전할 준비를 하는 키리엘과 물에게 향했다.

“모름지기 킹을 잡으려면, 먼저 퀸을 잡아야 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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