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Chapter 12: 총력전 (2)
본래의 계획대로였다면, 베른과 내가 단둘이서 저 키리엘과 물을 잡으러 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까웠다.
본디 내가 처음에 세웠던 그 계획에는 드래곤인 루가 존재했었고, 고대 정령이 가진 막대한 힘은 드래곤 정도가 아니라면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예상외의 변수가 단지 루가 사라진 것뿐이었다면 말이다.
[끼릿!]
내 그림자를 타고서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검은 형체.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또 다른 변수인 인공 정령 호문쿨루스였다.
“조금 안 본 사이에 덩치가 더 커진 것 같은데?”
베른의 말처럼, 조금 안 지켜본 사이에 그 덩치가 어느덧 성인 남성 정도의 크기에서 백 년 묵은 구렁이쯤으로 커져 있었다.
그리고 변수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가시죠.”
“그럴까.”
베른의 대답과 함께 그의 허리춤에서 뽑혀진 성검 다이베른이 그 찬란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압도적인 빛.
「삼 일 동안 햇빛을 못 본 한 독자가 성검의 찬란함을 보고 눈뽕이라며 불만을 표합니다!」
이 두 가지 변수라면 루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도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그리고 그 순간, 키리엘의 다급한 외침이 전쟁터에 울려 퍼졌다.
“디오! 우리가 도우러 갈게!”
누구 마음대로.
“안녕하세요?”
우리가 당장이라도 용사에게 가세하려던 키리엘과 물의 앞을 막아서자, 내 얼굴을 알아본 키리엘의 표정이 잿빛으로 변했다.
“너는…….”
“오랜만입니다.”
“아인즈 반!”
마치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원한이 가득 서려 있는 목소리.
“잘 지내셨어요?”
“도대체…… 디오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안부 인사도 없이 바로 본론이라니.
급하긴 어지간히도 급했던 모양이다.
“무슨 짓을 하다니요? 오히려 제가 당했다면 모를까.”
“시치미 뗄 생각하지 마!”
예상은 했었지만, 아무래도 예전처럼 살갑게 대해 주길 바라는 것은 무리인 듯했다.
“분위기가 험악하네요. 우리 이러지 말고 그때처럼 차나 한잔 하시는 건 어때요? 여유롭게 잡담이나 하면서.”
“……도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거요? 딱히 없는데. 굳이 말하자면…… 세계 평화?”
「비둘기를 사랑하는 평화주의자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사상을 지지합니다!」
“장난치지 마!”
「비둘기를 사랑하는 평화주의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갑작스러운 외침에 몸을 움찔합니다!」
그렇게 악을 쓰는 키리엘의 모습에서는 이제 과거에 보았던 그 여유 넘치는 모습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였다.
“대화는 무슨 대화를 한다고 그래? 당장 힘으로 치워 버리면 될 것을.”
그 말이 들려온 곳에 있는 것은 어느새 고대 정령으로서의 본신을 드러낸 물이었다.
“동감이다.”
물의 말에 맞장구친 베른이 성검을 뽑아 들자, 그것을 본 키리엘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당신, 그거 어디서 난 거야?”
“글쎄? 착한 일을 많이 했더니 하늘에서 뚝 떨어지던데?”
능글맞은 베른의 대답에 무언가를 떠올린 키리엘의 표정이 경악으로 변했다.
“맙소사…… 사이먼.”
그녀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저 멀리서 홀로 형편없이 기절한 채로 바닥을 구르고 있는 이황자 사이먼의 모습이었다.
물이 참전을 결심한 순간 더 이상 포박시켜 놓을 수는 없으니 미리 기절시켜 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고대 정령인 물에게 있어서 용사를 제외한 일개 인간의 상태 따위가 안중에 있을 리가 없었는지, 그녀의 시선은 오직 베른이 뽑아 든 성검에게로 가 있었다.
“디오의 성검! 네가 그 도둑놈이었구나!”
“도둑이라니, 말조심해. 이건 원래 내 것이었어.”
「일부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발언에 동의합니다!」
“그, 그건 그렇지만…….”
단 한마디의 말에 눈에 보일 정도로 시무룩해진 모습.
성격이 저만큼 단순하면 조금은 뻔뻔할 법도 했건만, 아무래도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이었다.
베른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어 보이고는 말했다.
“자, 그러면 인사는 다 한 것 같은데 푸닥거리 좀 해 볼까?”
“……봐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마. 늙은 인간.”
베른이 이죽거렸다.
“내가 아무리 늙었어도 너보다 백배는 더 어릴 텐데?”
“나, 나는 안 늙잖아!”
“네네, 만 년 동안 젊으셔서 좋겠네요. 어르신.”
“이익!”
……정신 연령만 보면 삼촌과 조카뻘인데 말이야.
그리고는 당장이라도 베른에게 달려들 것처럼 자세를 취한 물.
어쨌거나 이런 구도는 상성상 별로 좋지 않았기에 내가 말했다.
“베른.”
“왜?”
“고대 정령은 제가 상대하죠.”
“……네가?”
명백한 불신의 눈빛.
하지만 내가 지금 나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아자토스.”
[기릿!]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칠흑처럼 어두운 비늘을 가진 뱀의 형체.
마치 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함에 빠져 버릴 것만 같은, 그런 모습.
바로 그런 아자토스의 모습을 본 물이 대놓고 혐오감을 표했다.
“……어쩐지 악취가 진동하더라니. 이 저주받을 종자가.”
하기야 고대 정령인 그녀에게 있어서 인공 정령인 호문쿨루스가 달가울 리가 없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불쾌한 골짜기 현상이라고 할까.
「인권운동가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정령 차별을 하는 등장인물, ‘고대 정령 물’을 맹렬히 비난합니다!」
그리고는 아자토스가 마치 시위하듯이 소리를 내질렀다.
[끼이잇!]
거참, 울림통 한 번 크네.
내가 베른에게 말했다.
“고대 정령은 제가 맡을 테니, 엘프를 맡아 주세요.”
“그러지.”
그렇게 베른이 키리엘을 막아서기 위해서 간 후, 물의 앞에선 내가 가볍게 말했다.
“반가워요.”
너무나도 여유 넘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물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고작 저런 가짜로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정말로?”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겠죠.”
“바다의 광활함과 도랑에 고인 썩은 물을 굳이 비교할 필요는 없어.”
“정말 그럴까요?”
물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아직은 물 본인조차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그런 약점이.
그리고 그 약점은 남의 가슴에 아무렇지도 않게 비수를 꽂을 수 있는 날카로운 혓바닥과 감정을 먹고 사는 생명체인 인공 정령 호문쿨루스.
이 두 가지가 모두 존재할 때 성립할 수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이 노처녀야.”
* * *
인공 정령 호문쿨루스.
감정을 먹고 자라는 존재.
호문쿨루스가 먹이로 삼는 감정의 원천은 대부분이 인간으로부터 나오지만, 가끔 약간의 예외 역시도 존재한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노, 노처녀?”
“아! 말실수했네요. 연배가 있으신데 처녀는 아니죠. 고고고조할머니라면 모를까.”
“그, 그냥 할머니도 아니고…… 고, 고고고조?”
“아, 죄송해요. 그걸로도 모자라겠어요. 그냥 조상 할머니 정도로 하시죠.”
“꺄아악! 죽여 버릴 거야!”
그와 함께 뿜어지는 막대한 부의 감정들.
자연과도 함께해 온 그 세월이 만들어 낸 그 감정은 결코 단순하게 한 가지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지금껏 주제도 모른 채 도도하게만 살아왔던 자신에 대한 교만.
자연스럽게 사랑을 하고, 번식을 이어 나가는 다른 생명에 대한 질투.
그리고 눈앞에 있는 건방진 애송이에 대한 분노.
지금까지 아무것도 해 오지 못한 자신에 대한 나태함.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해 보지 못했기에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끓고 있는 색욕.
그리고 그 막대한 양의 감정들은, 호문쿨루스인 아자토스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충분한 영양분이자 식사였다.
[끼히잇!]
그리고는 시작된 흉포한 식사.
“꺄아악!”
실체가 자연 그 자체인 고대 정령에게 있어서 감정은 그 자체로도 정령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즉, 아자토스가 먹어 치우고 있는 고대 정령의 감정들은 곧 정령이 가진 힘 그 자체와도 같다는 말이었다.
“내, 내 힘이!”
그제야 이변을 알아차린 물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아자토스의 거침없는 이빨은 자비 없이 더욱더 세차게 움직였다.
「야설 빌런이 눈을 크게 뜹니다!」
“흐으윽…….”
그렇게 마침내 모든 ‘식사’가 끝난 후.
한때 메론 평야 전체를 덮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던 고대 정령의 힘은 이제 그때의 절반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 나머지 힘이 어디로 갔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끼리릿!]
처음으로 맛보는 막대한 양의 포식에 무척이나 기뻐하는 아자토스와는 달리, 감정이란 감정은 모조리 빨려 버린 물의 상태는 말 그대로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
「일부 독자가 등장인물, ‘고대 정령 물’에게 찾아온 현자타임을 일부 공감합니다!」
사실상 가장 강력한 비대칭 전력이었던 고대 정령이 무력화되었으니, 이 싸움의 승산이 어디로 기울었는지는 더 볼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반대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봐, 아가씨. 더 할 거야?”
“끄윽…….”
가볍게 성검을 쓸어내리며 말하는 베른과 그의 발밑에 형편없이 쓰러져 있는 키리엘의 모습.
제아무리 날고 기는 용사의 동료라고 한들, 전직 용사이자 성검을 가지고 있는 베른을 당해낼 수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러면 이만 끝을 내지.”
베른이 그렇게 성검을 치켜들고는 당장이라도 키리엘의 목을 내리칠 기세를 취했다.
“멈춰요.”
“뭐? 설마 적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건 아닐 테지?”
“그런 게 아닙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에요.”
“때라니? 무슨 때?”
뭐긴.
내가 눈치를 볼 놈들이 별달리 있겠는가.
「대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결단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선]을 믿는 다수의 독자가 무의미한 살생에 대한 거부감을 표합니다!」
「소수의 독자가 답답하게 굴지 말고 당장 [사이다]를 선사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아직, 아직이다.
상대는 명색이 [주인공]의 동료.
어설프게 처치했다가는 [주인공]에게 어떤 말도 안 되는 버프가 생길지 모른다.
거기다가 [선]으로서 취하고 있던 이득마저도 사라질 수 있었으니, 이에 대한 결단은 마지막으로 미루는 것이 옳았다.
그나마도 이제 때가 멀지 않았음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면, 이제 [주인공] 동료 측의 죽음을 바라는 독자들이 적지 않게 생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용사, 먼저 용사를 처치하고 난 뒤에 이들을 처치해도 늦지 않아요.”
“예전부터 느끼는데, 너…… 마치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군.”
「일부 독자가 [제4의 벽]을 의식하는 ‘전대 용사 베른’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이 가진 한 비밀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습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신비주의] 성향이 대폭 강화됩니다!」
……아무튼, 쓸데없이 예리하기는.
“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최대한 변수를 없애고 싶을 뿐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무슨 말이죠?”
“네가 좋아하는 그 변수, 지금 나타난 것 같은데.”
“예?”
내가 베른의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저 멀리서 기절해 있던 이황자 사이먼의 모습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이 타이밍에 사라진 이황자라……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두 번째 계획을 실행할 때가 온 듯 했다.
“준비하세요. 곧 올 테니.”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 같은 말투인데.”
“아니진 않죠.”
그때였다.
뿌우우-.
울려 퍼진 나팔소리는 다름 아닌 제국 병사들의 퇴각을 알리는 나팔소리였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베른이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미 승기를 잡은 이 상황에서 퇴각이라고? 이해되질 않는군.”
“간단해요. 이황자 사이먼이 실베스터 공작에게 직접 찾아갔겠지요.”
“그리고?”
“이 싸움은 그저 사소한 오해에서부터 시작되었을 뿐이라고, 그러니 당장 멈춰야 한다고 말했겠죠.”
“……오해라. 그렇다면 이제 너는 어떻게 할 셈이지? 이대로라면 제국의 병사들이 우리를 적으로 돌릴 수도 있게 생겼는데.”
베른의 질문에 내가 가볍게 대답했다.
“애초에 실베스터 공작은, 처음부터 치워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이제 그 미뤄졌던 순서가 온 것뿐이고요.”
“뭐? 자세히 말해 봐.”
애초에 나는 처음부터 실베스터 공작과 한배를 탄 적이 없었다.
그저 최선을 다해서 이용했을 뿐.
그리고 이용한 것은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서로의 뒤통수를 칠 것을 알고 있으면서 굳이 먼저 맞아 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사냥이 끝난 후, 사냥개는 잡아먹히는 법이죠.”
그와 함께, 내 시선 끝에서 한 무리의 어둠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나와의 계약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왔노라.]
검은 마탑.
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