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Chapter 12: 총력전 (5)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에 대한 조짐은 계속해서 있었다.
그저, 애써 무시해 왔을 뿐.
「대다수의 독자가 [진주인공]의 활약을 기대합니다!」
성검 다이베른이 천천히 용사의 목을 겨누었다.
주인의 생명을 앗아가 버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찬란한 빛을 내뿜은 채로 말이다.
베른이 말했다.
“너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해. 어떻게 보면, 너 또한 피해자일 뿐이니까.”
“……그게 무슨 말이죠?”
용사가 오히려 되묻자, 베른이 머리를 긁적였다.
“마왕은 보았나?”
“보지 못했습니다.”
베른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래, 그랬군. 만약 보았다면 내 말을 이해했을 텐데.”
「다수의 독자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전대 용사 베른’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씁쓸함을 한껏 뿜어낸 베른이 이내 성검을 치켜들었다.
개인적인 동정과 대의는 전혀 관계없다는 듯이.
“하지만 이 또한 운명의 흐름이겠지. 이만 가라.”
그와 함께, 성검 다이베른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용사 디오를 향해서 뻗어 나갔다.
성검 다이베른이 용사의 생명을 자비 없이 거두려던 바로 그 순간.
「[위기에 빠진 주인공]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흐르던 시간이 점차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마치 이 세계가 [주인공]의 죽음을 용납하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일어난 일은 마치 따로따로 떨어진 전혀 연관 없는 장면들을 연속해서 보는 것 같았다.
“안 돼!”
어디선가 들려온 다급한 외침.
어느새 디오와 베른의 사이를 막아선 키리엘.
마지막으로…… 그런 그녀의 가슴을 꿰뚫고 삐져나온 성검까지.
“……어?”
그것은 마치 중간과정이 생략된 것처럼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평소였다면 누군가가 나서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개연성]에 백 번이라도 의구심을 제기할 법도 했건만, 어째서인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처음부터 이렇게 정해져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디오…….”
키리엘의 입가에서 흘러내린 가느다란 핏줄기.
가슴 한복판을 꿰뚫고 있는 성검의 존재는 그녀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 보던 디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왜…….”
“디오.”
그리고 그런 디오를 향해서 키리엘의 입가가 조금씩 달싹였다.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힘없고, 작은 목소리로.
“……어.”
“아, 안 돼!”
그 말을 마지막으로, 꿰뚫린 그녀의 가슴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키리엘!”
디오가 다급하게 힘없이 허물어지는 그녀의 몸을 받았으나, 이미 그녀에게서는 그 어떤 생명의 징조도 보이지 않았다.
「[위기에 빠진 주인공] 클리셰가 잠잠해집니다!」
그와 함께 느리게 흐르던 시간이 점차 원래의 속도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이 제 자리를 찾기라도 한 것처럼.
“아, 아아아…….”
덧없이 사라져 버린 생명을 끌어안은 채 디오가 오열했다.
“으아아아!”
「대다수의 독자가 끝내 [주인공]을 지키려 한 ‘키리엘’의 눈물겨운 희생에 마음 아파합니다!」
「일부 독자가 동료를 잃은 [주인공]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던 베른이 씁쓸하게 말했다.
“……안타깝군. 전혀 볼 필요가 없는 피였는데.”
「[주인공]을 강하게 지지하던 한 독자가 ‘키리엘’을 무참히 살해한 ‘전대 용사 베른’을 강하게 비난합니다!」
“대체, 도대체 왜……!”
이미 몇 번이나 보았을 것만 같은 상투적이고 진부한 장면들.
그리고 이런 진부한 장면이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굳이 두고 볼 필요도 없었다.
“……도대체 네가 왜 죽어야 하는 건데!”
“괴로워 보이는군. 이만 끝내주지.”
“도대체 네가 왜…….”
베른이 뽑아 든 성검은 안중에 없는 듯이 그렇게 중얼거린 용사 디오의 모습은 여전히 상처투성이에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지쳐 있었지만, 그런 사소한 것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나타날 일은 내가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일이었으니까.
「[동료를 잃은 주인공] 클리셰가 발동합니다!」
「[주인공]의 체력이 일시적으로 회복됩니다!」
「[주인공]의 전투력이 일시적으로 [1000%] 증가합니다!」
「[주인공] 버프가 활성화됩니다!」
그와 함께, 내려친 성검의 날이 용사의 손에 붙잡혔다.
“……아직도 이런 힘이 있다고?”
손이 베이는 것 정도는 신경도 쓰지 않는지, 성검의 날을 붙잡은 용사의 손아귀가 더욱더 거칠어졌다.
“내놔.”
“큭!”
힘과 힘의 싸움.
그러나 그 대치는 결코 오래가지 못했다.
“발하라.”
짧게 울린 디오의 말과 함께, 성검의 검신에서 쏟아진 강렬한 빛이 베른에게 향했기 때문이었다.
“……이 무슨!”
“뺏을 수 있다면, 뺏길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뒀어야지.”
차갑디차가운 목소리.
그와 함께, 강렬한 성검의 빛이 베른의 몸을 덮쳤다.
콰카카캉-!
강렬한 빛과 함께 날아간 베른의 몸이 바닥을 수십 차례 굴렀다.
보통 인간이었다면 골백번은 더 죽었을 공격이었지만, 명색이 전대 용사인지라 다시금 몸을 일으킨 베른이 피 섞인 기침을 쏟아냈다.
“쿨럭!”
그런 베른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디오의 피 묻은 손에는 어느새 성검이 들려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혼탁한 빛을 뿜어내는 채로.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피하고자 했던 일이지만, 결국 찾아왔다면 맞설 수밖에.
“아자토스.”
[끼잇!]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는지, 펠릭스와 테무르가 다시금 전투태세를 취했다.
“……정말 괴물이군.”
“동감이다.”
그와 함께, 연인을 잃은 맹수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모조리 다 죽여주지.”
* * *
치열하리라 예상됐던 전투의 결과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싱겁게 막을 내렸다.
“끄으윽…….”
“괴, 괴물…….”
그것도 무참한 패배로.
성검을 되찾은 용사의 힘은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 압도적인 힘에는 [진주인공]까지 달성한 베른도, 현실 조작을 행하는 아자토스도, 제국의 자랑이라던 세 손가락도 결국 역부족이었다.
그렇게까지 준비하고, 그렇게까지 대비했건만 결국 이런 꼴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도, 도망쳐라.”
쓰러진 베른의 입에서 마지막까지도 멋있는 말이 나왔으나, 어차피 도망치려 해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처럼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녀석을 막을 수는 없을 테니까.
내가 말했다.
“그거 알아?”
“뭘 말이지?”
“너는 이미 끝났다는 거.”
“웃기지도 않은 소리군.”
얼핏 들으면 허세처럼 들리는 내 말은 사실이었다.
사실, 지금 용사 디오의 상태는 죽기 직전의 회광반조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끝내 지키지 못한 동료를 희생시키고서 얻어낸 힘.
그 힘의 대가가 결코 싸게 먹힐 리가 없었다.
‘베른의 존재도 있고 말이지.’
이미 베른이라는 훌륭한 대체재까지 존재하는 이상, 지금 이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나던 용사에게 남은 것은 이제 파멸뿐이라는 말이었다.
물론, 문제는 지금 내가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지만 말이다.
‘끝인가.’
내가 결코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굳이 키리엘과 물을 먼저 제압했던 것인데, 작가 놈이 클리셰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개연성]을 무시할 줄은 몰랐다.
말하자면, [주인공의 동료]를 희생시킴으로써 생기는 어마어마한 파급력으로 [개연성]에 대한 문제를 눈 가리고 아웅 한 셈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처형 시간이 다가왔다.
“끄아악!”
가장 먼저 목숨을 잃은 것은 학살 도끼 테무르였다.
겨우 짧은 비명소리 하나만을 남긴 허무한 죽음.
제국 내에서 그의 위치가 어떻든 간에 [비중이 없는 엑스트라]의 최후가 얼마나 허무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다음 차례는 장미의 기사 펠릭스였다.
“기사로서 죽여주게.”
“얼마든지.”
그리고는 순식간에 날아간 목.
테무르보다는 낫다지만 허무한 것은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폭력을 싫어하는 일부 독자가 잔학한 [주인공]의 행태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다수의 독자가 [동료]의 죽음에 복수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호쾌함을 느낍니다!」
그다음 차례가 누구인지는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용사 디오의 성검의 날이 내 목에 닿자, 뜨겁다 못해 화끈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아인즈 반.”
“이제 내 차례인가?”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건만, 어째 두렵기는커녕 어쩌면 죽음으로 이 세계에서 빠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마저 생겼다.
‘뭐, 아마 그럴 확률은 거의 없겠지만.’
세상 모든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이, 그렇게 손쉽게 도망치고 탈출할 수 있다면 누가 고생하고 발품 팔겠는가.
다들 저기 어디에 있는 환생 트럭에 뛰어들거나 빌딩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하겠지.
누가 그랬던가.
죽음에는 총 다섯 개의 단계가 있다고.
그런데 나는 어째 앞의 네 번째는 모조리 건너뛰고 마지막 수용의 단계에 와 버린 것 같은걸.
“안 아프게 살살 베어 줄래?”
“……끝까지.”
성검의 빛이 번뜩이고, 이제는 정말로 끝이라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나긴 침묵.
의아함에 내가 감았던 눈을 다시 슬쩍 뜨자, 어느새 내 앞을 어느 작고 아담한 어깨 하나가 가로막고 있었다.
“……응?”
너무나도 익숙한 인영과 익숙한 상황.
그 작고 아담한 어깨의 정체가 누구인지는 굳이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었다.
“……하이디?”
그녀의 모습을 본 용사 디오가 악을 썼다.
“너희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하는 디오가 내 앞을 막아선 하이디의 모습에서 무엇을 겹쳐 보았는지는 뻔했다.
그러나 들려온 하이디의 대답은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반을 해치지 마.”
“……비켜라. 죽고 싶지 않다면.”
“반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도저히 저 작은 체구의 소녀에게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는 짧고 강한 말.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죽는 것이 그렇게까지 소원이라면, 들어주지.”
“비켜! 하이디!”
“반.”
뒤돌아본 소녀의 웃음은 어째서인지 해맑기 그지없었다.
마치 그것이 마지막 미소인 것마냥.
“비켜!”
“반.”
왜일까.
그저 등장인물에 불과하다고 여겨 왔을 텐데.
아무런 감정도 없었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나도 모르게 애원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하이디, 제발!”
“고마워.”
짧은 미소.
그렇게 디오의 성검이 하이디를 향해서 덮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까앙!
들려온 소리는 결코 사람의 뼈와 살이 갈리는 그런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무쇠라도 내려친 듯한, 그런 소리.
그 원인은 다름 아닌 하이디에게 있었다.
“……하이디?”
어느새 머리 위에 돋아난 뿔과 날개.
그것은…… 명백한 마족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