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차 이후의 소설 속-51화 (51/164)

◈ 51화 Chapter 13: 불지옥 반도의 왕자 (1)

-나는 누구인가?

우습게도,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했던 질문은 사춘기 청소년들이나 할 법한 그런 질문이었다.

정체성(identity).

존재의 본질을 규명하는 성질.

물론,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기가 오는 것은 맞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누구나 자신이 세상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개인’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하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깨닫게 되니까.

때문에 정체성이 형성되며 혼란을 겪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다만, 그게 본래 다 큰 성인이었던 나에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면 말이지만.

-나는 누구인가?

그 진부한 질문과 함께 머리가 지끈거리고, 머릿속에서 본래 내 것이었던 것과 아니었던 기억들이 순차적으로 범람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무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쓸데없이 꽉 조인 넥타이를 하고서 어디론가 바쁘게 달려가는 ‘내’ 모습이 보였다.

-“네, 네 팀장님. 곧 도착해요. 아…… 조금 늦으실 것 같다고요? 1시간 정도…… 네? 아니요. 당연히 괜찮죠! 천천히 오세요.”

-“아이고, 내가 조금 늦었네. 김 대리, 오래 기다렸어?”

-“그럴 리가요. 얼마 안 기다렸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죠.”

-“…….”

-“해 줄 수 있지?”

-“……아이고!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씀을 하고 그러십니까. 당연히 되죠. 하하하!”

-“그럴 줄 알았어. 역시 김 대리밖에 없다니까. 자, 마셔!”

단 한 순간도 치열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삶.

그런 삶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뒤에서 홀로 욕하는 것뿐이었다.

-“끄윽…… 내가 자기들 시다야? 시대가 어느 땐데 갑질이야, 개 같은 새끼들…….”

-“하…… 속 쓰려. 뒤질 것 같다.”

그런 내가 그 치열했던 삶의 탈출구로 삼은 것은 그저 작은 화면에 비친 소설 속뿐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다시 한번 시야가 바뀌고, 이번에 나타난 것은 노예 소년 반의 삶이었다.

-“반! 이것 좀 정리해 주겠니?”

-“반, 오늘도 수고 많았다. 이만 쉬렴.”

-“네 덕분에 오늘 일도 잘 끝났구나. 고맙다.”

-“반!”

……어째 노예가 나보다 훨씬 더 근무 형편이 좋아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명백한 타인의 삶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익숙한 삶이기도 했다.

마치 내가 ‘아인즈 반’ 그 자체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

그렇게 두 개의 삶이 지나간 후, 새롭게 나타난 것은 본래의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삶이었다.

뿔과 날개가 달린 마족들이 집단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는 세상.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

태어날 때 정해진 신분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세상.

그리고 나는 그런 세상에서 금수저와 다이아몬드수저를 넘어선, 말 그대로 헬수저를 쥐고서 태어난 불지옥 반도의 왕자였다.

-“오늘따라 입맛이 없구나.”

-“당장 주방장을 참하라!”

-“오늘따라 날씨가 무덥구나.”

-“뭣들 하느냐! 당장 저 시건방진 하늘에 구멍을 내놓지 않고!”

-“무료하구나.”

-“그러실 줄 알고 마침 노예 검투사들을 납치…… 아니, 초빙하여 콜로세움을 열어놨습니다. 어서 가시죠!”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손쉽게 얻어내는 삶.

그렇기에, 쉽게 질리기도 했던 그런 삶.

-“와, 왕자 저하! 어디를 그렇게 바삐 가십니까?”

-“인간계를 시찰하고 오겠다.”

안하무인.

천상천하 유아독존.

누군들 한 번 맛본다면 안 빠져들래야 안 빠져들 수가 없는, 그런 삶.

그 삶은 더없이 달콤했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

이곳은 어디이고,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하루를 치열하게 살면서 밥 먹을 시간조차도 제대로 내지 못했던 김 대리인가?

아니면, 노예로서 성실히 살아왔던 소년, 아인즈 반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헬수저로서 모든 부와 권력을 쥐고서 살아왔던 불지옥 반도의 왕자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때였다.

[승객 여러분, 약 30분 후에 불지옥 반도, 인촌 국제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인촌은 현재 23시 35분입니다. 일기 예보에 따르면 인촌은 맑고, 지상 온도는 화씨 224.6도, 섭씨 107도입니다.]

그렇게 계속되는 혼란을 겪던 나를 일깨운 것은 다름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어디선가 들려온 어떤 안내 방송이었다.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즐겁고 유쾌한 인간계 여행이 되셨기를 바라며, 오늘도 헬게이트 항공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비행기가 게이트에 완전히 멈출 때까지 자리에 앉아 계십시오. 연결 비행 편에 대해 질문이 있으시면 비행기에 있는 헬게이트 항공 관리자를 찾으십시오. 비행기가 게이트에 완전히 멈춘 후에, 질서정연하게 하차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차하라고?

그 순간, 마치 어떤 덕 깊은 고승이 큰 깨달음을 얻고서 대오각성을 이루는 것처럼 어떤 깨달음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누구이며, 이곳은 어디이고 내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그리고 그 깨달음은, 사실 무척이나 단순했다.

-「개뻔한 전개에 암 걸리는 클리셰. 하차합니다.」

별생각 없이 남겼었던 댓글.

이 모든 일의 시작.

그리고 그런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울려 퍼지는 메시지들.

「다수의 독자가 드디어 밝혀진 당신의 정체에 대해서 큰 관심을 표합니다!」

「설정 덕후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새롭게 확장되어 가는 [세계관]에 큰 관심을 표합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비범했던 당신의 행보에 대해서 되새김질하며 당신을 주시합니다!」

……어째 오랜만에 들으니까 묘하게 반가운걸.

그 순간, 내 머릿속의 누군가가 물었다.

-나는 누구인가?

누구긴.

몰라서 묻냐?

이제는 그 질문에 당당히 대답할 수 있었다.

“이 불지옥 반도의 잘생기고, 돈 많고, 능력 있는 왕자님이시지.”

더불어서, 이 쓰레기 소설을 탈출했던 사람이기도 하고 말이야.

「당신의 [서사]가 진행됩니다!」

+

[아인즈 반의 서사]

[1] 노예 소년, 반. [완료]

[2] 불지옥 반도의 왕자. [현재 진행 중]

[3] ???

[4] ???

[5] ???

+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서사]까지.

그제야 어지러울 정도로 울려대던 두통과 정체성의 혼란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정체성의 혼란.

그것은 내가 지금껏 함부로 나에 대한 [설정]을 건드리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하이디와 베른이 그랬듯이, 하마터면 정말로 ‘내’가 ‘내’가 아니게 되어 버릴 뻔했다.

‘위험하긴 했어.’

하마터면, ‘진짜’ 불지옥 반도의 왕자가 되어 버렸을 수도 있을 만큼.

하지만 그 혼란 덕분에 나는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세계가 어디인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불지옥 반도.

마족들이 살아가는 장소로서, 인간들에게는 마계 혹은 지옥이라고 불리는 곳.

또한, 내가 [독자]들에게 되새기게 만든 잔혹한 현실을 투영한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치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비행기 내에 있는 모니터에서 한 예능 프로그램이 흘러나왔다.

[뿔 크기요? 17cm는 너무 작고, 18cm 이상이면 좋을 것 같네요. 18cm 미만의 뿔을 가진 마족이요? 당연히 루저죠. 루저. 깔깔깔!]

[제가 이 자리까지 어떻게 왔느냐고요? 당연히 돈 덕분이죠. 그 돈이 어디서 낫냐고요? 당연히 부모를 잘 만났죠. 그러니 부모 잘 만나는 것도 실력 아닐까요? 호호호!]

「사탄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그대들의 놀라운 발언에 배움을 청합니다!」

……이 동네는 여전하구만.

뭐,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다.

그렇게 빤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내 옆에서 갑작스럽게 부담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저…….”

“응?”

“혹시 불지옥 반도의 왕자님이 아니신지?”

“맞다만.”

“역시!”

그렇게 쾌재를 부른 남자의 머리 위에는 기다란 뿔이 돋아나 있었다.

마족의 뿔.

마족이 성년이 되는 해부터 자라나기 시작하는 그것은 마족에게 있어서는 힘과 신분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뿔의 크기로 보아서는…… 플라스틱수저보다는 조금 더 나은 수준이군.’

순식간에 파악된 상대방의 수준.

마족의 자존심이나 다름없는 그것은 결코 쉽게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뿔의 크기는 곧 불지옥 반도에 스며들어 있는 고질적인 신분제의 근본이나 다름없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뭐, 그 정도야. 이름이?”

“미, 미카엘. 미카엘 아벨입니다!”

“미카엘 아벨…… 오케이. 다 썼다.”

“가, 감사합니다! 대대로 가보로 삼겠습니다!”

「일부 독자가 ‘불지옥 반도’ 내에서 어마어마한 당신의 유명세를 체감합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비중]이 증가합니다!」

「현재 비중: 12.9%」

그렇게 기습적인 팬 미팅이 끝나자, 곧이어 다시 한 번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인촌 국제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모두 질서정연하게 하차하여 주십시오.]

이내 비행기가 완전히 멈춰 서고 게이트에 다가서자, 문득 한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내가 앉아 있던 곳이 퍼스트클래스였던가?’

당초에 탄 과정을 모르니, 당연히 모를 수밖에.

뭐, 그다지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었기에 나는 애써 무시하며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그러자, 그곳에서는 온갖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마족들이 여행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크고 눈에 띄는 건 바로 나를 찾는 플래카드였다.

-우유 빛깔 왕자님.

-곧 하늘을 뚫을, 크고 아름다운 뿔을 가지실 분.

-대양처럼 드넓은 날개의 주인.

-사랑합니다♥

……이것도 여러 가지 의미로 어마어마하군.

“왕자 저하!”

그중에서 유독 큰 ‘사랑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든 한 마족이 헐레벌떡 나를 반겼다.

전혀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익숙한 얼굴.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존재했던 ‘불지옥 반도의 왕자의 과거’를 보필해 왔던 마족.

“박 실장.”

“인간계 여행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포마드로 넘긴 머리 사이에서 유난히 빛나는 뿔 두 개는 그가 상당한 힘을 가진 고위 마족임을 말해 주었다.

물론, 헬수저를 가진 내 앞에서는 전혀 소용없었지만.

“그걸 내가 너한테 일일이 보고해야 하나?”

“죄, 죄송합니다!”

“잘 다녀왔어.”

“그, 그렇군요! 다, 다행입니다!”

「다수의 독자가 고위 마족, ‘박 실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당신의 뛰어난 리더십에 감탄합니다!」

「일부 독자가 은연중에 드러난 당신의 [츤데레] 성향에 즐거워하며 후원금을 전달합니다!」

「현재 적립된 후원금: 13,110G」

오랜만에 찾아온 후원금을 반기는 것도 잠시, 박 실장이 무언가에 쫓기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어서 가시죠. 곧 기자들이 몰려들 시간입니다.”

“기자?”

“이런! 서두르시죠!”

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갑작스럽게 몰려든 카메라와 마이크들이 순식간에 내 앞을 가로막았다.

마치 단체로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 같은 모습.

누가 마족 아니라고 할까 봐, 참 좆같게도 나타난다.

“왕자님!”

“갑작스러운 가출의 이유가 무엇이죠?”

“인간계의 정복을 꿈꾸고 있으시다던데, 사실입니까?”

“연속된 불황에 전쟁 불안을 겪고 있는 시민들을 위해서 한마디 해 주시죠!”

“현재 지속되고 있는 고용 불안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 주시죠!”

“어떤 말이든 좋으니, 한 말씀 해 주시죠!”

이곳에 발 디딘 지 이제 막 45초 정도 된 사람한테 참 바라는 것도 많다.

물론, 정 원한다면 못 해 줄 것도 없었지만.

“삼 초 준다.”

“예?”

“뒈지기 싫으면, 당장 내 눈앞에서 다 꺼져. 이 기라늄 폐기물 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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