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Chapter 13: 불지옥 반도의 왕자 (3)
당황한 박 실장이 다급하게 외쳤다.
“자, 자퇴라니요! 절대 안 됩니다!”
“왜?”
박 실장의 얼굴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진지하게 굳었다.
“왕자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요즘 같은 학벌 사회에 중졸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불지옥 반도의 모든 마족이 왕자님을 비웃을 겁니다! 아무리 왕자님의 명령이라지만, 이것만큼은 절대로 못 따르겠습니다!”
「삼수생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갑작스럽게 훅 들어온 가슴 아픈 현실에 몸서리를 칩니다!」
아무튼, 이놈이나 저놈이나. 여기나 저기나 도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니까.
내가 조용히 그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놈 중 하나인 박 실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박 실장.”
“아무리 위협하셔도 이것만큼은 물러설 수 없습니다. 저는 왕자님께서 그런 멸시를 받는 것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습니다!”
“박 실장.”
“아, 아무리 그렇게 부르셔도 안 되는 건 안 됩니다!”
“박 실장.”
“……다, 다시 한번만 생각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박 실장.”
“……부,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그것참, 애매한 충성심일세.
「인권운동가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결국 권위에 굴복한 ‘고위마족 박 실장’의 모습에 연민을 느낍니다!」
물론, 옳은 소리고 나발이고 싫은 건 싫은 거다.
“그게 다야?”
“예?”
“내가 학교로 가야 하는 이유가, 고작 그런 남들 시선이나 신경 쓰기 위해서가 전부냐고.”
“그, 그것 말고도 지금까지는 배울 수 없었던 새로운 배움을 얻거나, 다양한 인간관계를 겪으며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계기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오호.
말이야 꽤 그럴듯한데.
물론, 내가 여전히 뇌가 순수하고 착한 학생이었다면 말이지만.
“그런 거라면 학교로 가지 않아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텐데? 배움이야 전담 교사…… 아니 교수라도 붙여서 배우면 되고, 그리고 네가 인간이야? 마족이 무슨 인간관계야?”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은연중에 가지고 있던 의문을 해소해 준 당신의 날카로운 지적에 감탄합니다!」
“제, 제가 그랬습니까? 죄송합니다. 왕자님께서 인간계로 가신 기간이 조금 되었다 보니…… 저도 모르게 조금 과하게 몰입했나 봅니다.”
아무튼, 조금만 방심하면 이렇게 빈틈이 드러난다니까.
만약 내가 미리 선수를 치지 않았더라면, 두 눈을 치켜뜨고서 빈틈을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독자들에게 언젠가 꼬투리를 잡혔을 터였다.
「설정충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설정] 오류를 지적하려다가 입맛을 다십니다!」
고작 약간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뿐인데도 절벽 위에 있는 구멍 난 흔들다리를 건너는 기분이라니…… 참으로 망할 세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면 이제 내가 학교로 갈 이유는 없는 거겠지?”
“그,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왕자님!”
“더 있어?”
“사실 정말로 큰 이유가…….”
“그게 뭔데?”
“저어…… 그게…….”
그리고는 다시금 침묵을 지키는 박 실장의 모습.
대체 무슨 놈의 마족이 이렇게 뜸 들이는 걸 좋아한단 말인가?
“……‘그분’에게 제가 죽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설정충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고위 마족조차도 두려움에 떠는 ‘그분’의 존재에 대해서 추측합니다!」
‘그분’이 누구인지는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론,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었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예?”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저, 저뿐만 아니라 왕자님도 무사하지 못하실 겁니다!”
이제는 어째 애처롭게 보이기까지 했다.
“박 실장아.”
“……말씀하십시오.”
“머리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생각을 해 봐. 내가 고작 부모 등쌀을 두려워했다면, 가출씩이나 했겠어?”
“그, 그건…….”
이제는 고위 마족의 체면이고 뭐고 모조리 사라졌는지, 박 실장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한 번만 살려주시는 셈 치시면 안 되겠습니까?”
“응, 안 돼.”
“제가 왕자님을 모신 지 벌써 6년입니다. 그동안의 노고라고 생각하시고 부디…….”
“월급은 안 밀리고 따박따박 나갔을 텐데? 그것도 보너스까지 듬뿍 쳐서. 그리고 노고는 내가 너를 생각하는 거지, 왜 네가 네 생각을 해?”
“그,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발…….”
뭔가 당할 대로 당해 주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완고한 모습.
물론, 제아무리 완고한들 내가 귓등으로조차 들어줄 리가 만무했지만, 그런 사소한 건 제쳐두고라도 아무래도 더 이상 시간을 끌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불편해할 것 같았으니.
「일부 독자가 지나치게 길어지는 당신과 ‘박 실장’의 무의미한 설전에 노잼을 표합니다!」
「매의 눈을 가졌다고 자처하는 한 독자가 [분량 뻥튀기] 의혹을 제기합니다!」
슬슬 터져 나오기 시작한 불만.
어차피 더 이상 대화를 나눠 봤자 쓸데없이 [설정] 구멍만 드러날 테니, 이쯤에서 화제를 돌릴 필요가 있었다.
“시끄럽고, 하이디를 찾으면 재깍 보고하기나 해. 아마 그 일로 박 실장은 바쁠 테니까 수련 문제라면 적당한 마족 하나 데려오고.”
“그렇다면 학교는…….”
“그 얘기, 또 꺼내면 감봉이 아니라 자리를 빼야 할 거야. 그 문제는 내가 직접 해결할 테니까 박 실장은 지금 이 시점부터 신경 꺼. 알겠어?”
내가 엄포를 늘어놓자, 그제야 박 실장이 무어라 말하려는 듯이 입술을 몇 번 달싹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수련이라면, 최 집사에게 말해 놓겠습니다.”
“최 집사?”
어째 기억 속에 있는 이름 같기는 한데, 그다지 익숙하지 않을 걸 보니 아무래도 ‘나’와 그다지 접점이 없었던 존재인 듯 했다.
“……잊어버리셨습니까. 그러니까 자택에 좀 들어오시면 좋았을 텐데.”
“시끄럽고, 누군데?”
“왕자님께서 머물고 계시는 자택의 총책임자입니다. 지옥불 협회에 등록된 랭크에서 무려 35위에 등록된 강자 중의 강자이지요.”
뭔가 또 이상한 게 튀어나왔지만, 대충 뉘앙스로 들어보니 아무래도 마족들의 힘을 순위로 나타난 지표인 듯 했다.
그나저나 35위라…… 대놓고 강한 것도 아니고, 약한 것도 아니고 애매하구만.
“감이 안 잡히는데, 너는 몇 위인데?”
“89위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박 실장 역시도 그 애매한 충성심만큼이나 애매한 순위를 가지고 있는 마족이었다.
“애매하군.”
“……아무튼, 최 집사는 저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자이니 아마 왕자님께서 원하시는 수련이라면 충분히 시켜 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말이야, 그렇게 잘난 양반이 왜 집사 따위나 하고 있는 거야?”
분명히 불지옥 반도 내에서 왕족을 보필하는 직업은 손꼽히는 고소득 전문 직종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 마족들의 기준이었다.
내 입장에서 볼 때야 제아무리 35위 같은 애매한 위치라지만, 불지옥 반도 내의 인구수를 생각한다면 결코 낮은 위치가 아닐 것이다.
「매의 눈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개연성]에 대해서 먼저 선수를 친 당신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며 뒤로 물러섭니다!」
“그거야 당연히…….”
그렇게 말하던 박 실장이 갑작스럽게 아차 하고는 입을 닫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극소수의 독자가 ‘고위마족 박 실장’이 감춘 떡밥에 작은 흥미를 표합니다!」
「대다수의 독자가 별로 관심 없으니 더 이상 시간 끌지 말 것을 재촉합니다!」
물론, 당연히 내가 박 실장에게 이 떡밥을 물고 늘어질 생각은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숫자 앞에 장사 없고, 이기는 편이 내 편인 법이었으니까.
“그래? 당연히 아무것도 아니겠지. 그러니까 혹여 나중에라도 말할 생각이 든다거나, 말이 하고 싶어진다거나,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상항이 와도 절대로 말하지 마라. 절대로 말이야. 알겠어?”
「다수의 독자가 쓸데없는 떡밥에 휘둘리지 않는 당신의 의지를 지지합니다!」
「클리셰 파괴를 좋아하는 한 독자가 삼천포로 빠지지 않는 당신의 굳건한 철벽에 감탄하며 후원금을 전달합니다!」
「현재 적립된 후원금: 25,510G」
* * *
내가 이 저택에 발을 디딘 것은 오랜만이라고 쓰고, 처음이라고 읽는다.
그런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다름 아닌 집사 복을 입고 있는 어떤 늙은 마족이었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뵙습니다. 왕자 저하.”
“당신이 최 집사?”
“예, 맞습니다. 박 실장에게 들었습니다. 10년 넘게 모셨는데 기억하지 못하신다니, 조금 섭섭하군요.”
처음 보는 사이끼리 섭섭은 무슨.
누가 보면 정말로 10년 넘게 봐 온 사이인 줄 알겠다.
“됐고, 내 용건은 이미 들었겠지?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당장 준비해.”
“수련이라…… 왕자 저하께서 딱히 지금 당장 힘을 갈구하실 필요는 없으실 텐데요. 어차피 성년이 되면 자연스럽게 왕족의 힘을 각성할 터인데요.”
……몰랐다.
물론, 이럴 때는 뻔뻔한 게 중요했기 때문에 내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지금 나에게 질문을 하는 건가?”
“허허, 실례를 범했습니다. 다만, 이것은 무의미한 질문이 아니라 합당한 의문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아무튼…… 실베스터 공작의 경우도 그렇고, 도대체 왜 애매하게 나이 먹은 것들은 이렇게 능구렁이처럼 나오는지 모르겠다.
막상 고대 정령 물처럼 진짜 나이가 많은 놈들은 순진무구하다 못해 멍청하기 짝이 없는데 말이다.
「사내 정치에 지친 한 독자가 ‘최 집사’의 능구렁이 같은 속을 바라보며 나이를 거꾸로 먹는 ‘고대정령 물’의 순진함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강해지고자 하는 이유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건가?”
“솔직히 말해서, 그렇습니다.”
솔직히 몰라서 원했던 수련이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이상 확실하게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쐐기를 박아 둘 필요성이 느껴졌다.
왜,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내가 최대한 목소리를 낮게 깔고는 말했다.
“간단하게 말하지. 나는 불지옥 반도의 왕자로서, 인간계를 멸망시킬 거다.”
정확히는, 이 세계 자체를 말이지.
「대다수의 독자가 지금껏 [신비주의]로 점철되어 있던 당신의 진정한 목적에 대해서 주목합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지금껏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당신의 행동 원리에 대해서 납득합니다!」
「당신의 [서사]가 요동칩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비중]이 증가합니다!」
「현재 비중: 13.5%」
“……호오.”
짧은 감탄.
티 내지 않으려 함에도 불구하고 놀람이 드러난 얼굴.
그 전개가 말하는 바는 간단했다.
‘충실한 노예가 한 명 늘었군.’
모르긴 몰라도, 아마 불지옥 반도 내에 있는 동안은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이런 멋들어진 대사를 날리면, 넘어오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웬 눈치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찾았습니다!”
목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박 실장이었다.
“왕자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하이디라는 마족, 찾았습니다!”
“벌써?”
이렇게 빨리 찾는다고?
박 실장이 제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솔직히 말해서 이건 좀 과할 정도였다.
누군가가 당장 [개연성]을 지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잠깐.’
아니, 한 가지 있었다.
[개연성]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하이디를 찾을 방법이.
“예상외로 정말 가까이에 있더군요.”
그리고는 어딘가 음흉한 미소를 짓는 박 실장의 얼굴.
불길할 정도로 보이는 그 표정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내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이 전개, 설마…….
“불지옥 사이언스 고등학교. 왕자님께서 입학하실 예정이었던, 바로 그 학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