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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이후의 소설 속-54화 (54/164)

◈ 54화 Chapter 13: 불지옥 반도의 왕자 (4)

불지옥 사이언스 고등학교.

본래 ‘내’가 입학했어야 할 불지옥 반도 최고의 명문 고등학교.

그리고 오늘은 바로 그 불지옥 사이언스 고등학교의 입학식이자, 내가 처음으로 학교에 등교하는 날이었다.

“교복이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과할 정도로 기뻐 보이는 박 실장의 얼굴.

그 뻔뻔한 낯짝을 보고 있으니, 아무래도 지금 내가 이 꼴이 된 것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군. 박 실장 너도 앞으로 여기 교복만 입고 다니도록.”

“그, 그게 왕자님께서는 무척이나 잘 어울리시지만, 저는 나이가 있다 보니 아무래도 모양새가…….”

“내 알 바야?”

누구는 아닌 줄 아네.

이래 봬도 고등학교 졸업은 물론이고 군대, 대학을 넘어서 취직 테크트리까지 거쳤던 나다.

교복이 어색한 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라는 말이었다.

물론 단지 그뿐이었다면 어떻게든 참았겠지만,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거 색깔이 왜 이래?”

모름지기 교복이라 하면 칙칙하고 멋대가리 없는 검은색을 아무런 개성 없이 무개성으로 칠해 놨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상식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교복은 그런 내 상식과는 한참은 동떨어져 있었다.

과하다 못해 철철 넘치는 개성.

“정열과 피의 붉은색! 불지옥 사이언스 고등학교의 교장이 요즘 젊은 아이들의 취향에 맞춰 보겠다고 특별히 넣은 색깔이라고 합니다.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물론, 옛날의 어둠의 다크니스 같은 검은색도 충분히 멋지지만…….”

「오랜만에 휴가를 나온 일병 독자가 오래간만에 일 좀 하려는 대대장에 버금가는 ‘불지옥 사이언스 고등학교 교장’의 뻘짓에 몸서리를 칩니다!」

「신입사원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노잼 개그를 일삼는 부장님과 버금가는 ‘교장’의 아재력에 감탄합니다!」

……정말 지옥 같군.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이 폐기물 같은 교복을 입는 날이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반 배정은 이미 손을 써놨겠지?”

“물론입니다. 그 하이디라는 마족과 같은 반이 되도록 이미 배정을 끝내 놓았습니다.”

아무튼, 이럴 때 보면 일을 잘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헷갈린다니까.

어쨌거나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면, 최대한 빠르게 하이디만 데리고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좋아. 교복 건은 봐주지.”

“가, 감사합니다!”

“단.”

이건 지금까지 획일화되어 있던 박 실장의 드레스 코드에 조금 염증을 느껴서이지, 절대로 아까 박 실장이 미묘하게 웃는 면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하는 소심한 복수가 아니다.

“붉은색이 싫으면, 앞으로는 핑크색으로만 입고 다니도록.”

정말로.

* * *

학원물.

주로 학교에서 일어나는 부 활동, 운동회, 수학여행, 축제, 연애질, 싸움박질을 넘어서 추리, 도박 같은 학원물을 가장한 판타지 에피소드가 잔뜩 일어나는 장르.

지금 내가 발을 디디는 곳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숨 쉬는 것만으로도 온갖 클리셰가 소용돌이치는.

“그러면, 저는 여기서 물러가겠습니다.”

그렇게 박 실장이 자신의 온몸에 칠해진 핑크빛으로 쏟아지는 시선에게서 도망치듯이 물러간 후, 들어선 교문의 광경은 어째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소란스럽다는 이야기는 즉 어떤 일들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너, 신입생?”

그곳에는 어딘가 뺀질이 같이 생긴 한 마족이 온몸에서 고학년 포스를 풍기며 서 있었다.

그래. 마치 사이비 종교를 권유하러 온 사이비 신자처럼.

“그런데?”

“보아하니 제법 운동 좀 할 것 같은데, 혹시 관심 있으면 우리 축구부에…….”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꺼져.”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1.14%」

「땀 냄새가 진동하는 진한 스포츠 에피소드를 기대했던 일부 독자가 아쉬움을 표합니다!」

학교 안으로 발걸음을 디딘 지 이제 고작 몇 초가 흘렀을 뿐이다.

그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이라는 신호탄이 쏘아진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었다.

“비켜!”

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어디선가 나타난 한 여학생의 모습이 나에게로 거침없이 돌진했다.

마치 코뿔소가 떠오를 정도로 거침없는 돌격.

당연히 내가 피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쿵!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여학생 마족 역시도 나와 마찬가지로 아직 성인이 되지 못했기에 내가 즉사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체격의 차이 때문에 돌진했던 여학생이 튕겨져 나갈 정도.

“아얏! 도대체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양 볼을 가득 붉게 물들이고서 오히려 자기가 화를 내는 모습.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청춘 하렘물의 초입에 들어서는 가히 정석 중의 정석적인 전개가 아닐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나타난 전개에 야설 빌런이 눈을 크게 뜹니다!」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물론, 따를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자기가 와서 받아 놓고 어디서 성질이란 말인가.

“닥쳐.”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1.15%」

그렇게 당황함에 울먹이는 엑스트라 여학생을 뒤로한 채로 다시 한번 학교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이번에는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웬 양아치 마족 학생 하나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너…… 조금 띠껍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한 독자가 학원물의 정석 중의 정석인 양아치 배틀물의 등장에 환호합니다!」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열혈 스포츠물과 청춘 하렘물 다음에는 양아치 배틀물인가.

고작 등교 한 번에 이렇게 폭발적으로 발생하는 클리셰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다시 한번 오래 있을 곳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여기 양아치가 도대체 왜 있는 거야? 불지옥 반도 최고의 명문 학교 아니었어?

「매의 눈을 가졌다고 자처하는 한 독자가 힘의 논리가 통하는 ‘불지옥 반도’의 학업 방식에 조용히 납득합니다!」

……제멋대로 납득해 줘서 고맙다.

덕분에 따로 [개연성]을 수습할 고생은 덜어졌지만, 어째 미묘하게 손해 보고 있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에휴…….”

내가 눈앞에 있는 엑스트라 양아치를 한심하게 바라보자, 엑스트라 양아치가 발끈했다.

“어쭈? 노려봐? 내가 누구인 줄 알아?”

“그러는 너는 내가 누구인 줄 알아?”

도대체가, 무려 불지옥 반도의 왕자씩이나 되는 몸이건만 어째 알아보는 놈이 하나도 없다.

이 점 역시도 분명히 [개연성]을 지적할 법도 했건만, 영악하기 짝이 없는 독자 놈들이 어째 내가 편할 요소들만 싹 다 배제하는 기분이었다.

“네가 누군데?”

“왕자.”

“하! 네가 왕자님이라고? 웃기지도 않은 소리! 감히 왕족을 사칭하다니, 왕자님은 내가 얼마 전에 뉴스 기사로 봤었는데, 분명히 이 얼굴이…… 맞네.”

“대가리 박아.”

“넵!”

그리고는 왁스로 떡칠한 노란 머리가 뭉개지게 머리를 박는 양아치 엑스트라의 모습.

뭐,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꽤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1.16%」

그렇게 산 넘고 물 건너서 간신히 입학식이 치러질 예정인 학교 강당에 들어서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웬 놈팽이 놈이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너도 A반이야?”

“그런데.”

“반가워! 나는 최허약이라고 해.”

이름부터 풀풀 풍겨오는 전문 들러리의 냄새.

“그거 알아? 올해 우리 신입생들 라인업들이 장난이 아닌 거. 헬지옥 그룹 막내아들인 박선방을 필두로, 국방부 장관의 아들 홍이호까지. 라인업들이 하도 짱짱하다 보니까, 오죽하면 왕자님까지 입학했다는 소문도 있다니까? 하하! 말도 안 되지. 왕자님이 시간이 썩어나는 것도 아닌데 뭣 하러 학교에 오겠어?”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일부 독자가 앞으로 일어날 [고귀한 신분을 감춘 인물] 전개에 대해서 큰 흥미를 표합니다!」

당연하지만, 내가 저런 쓰레기 같은 전개에 몸을 맡길 리가 만무했다.

“나야.”

“……응?”

“내가 그 시간이 썩어나는 왕자라고.”

“……네?”

“알았으면 알짱거리지 말고 당장 꺼져.”

“허억! 넵!”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1.17%」

그렇게 치워야 할 것을 모조리 치워내자, 어느새 강당 무대 위로 올라선 어떤 교사의 마이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부터, 불지옥 사이언스 고등학교의 입학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물론,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내가 이런 쓰레기 같은 행사를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내가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겨서 자연스럽게 무대로 오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마이크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신입생 대표, 앞으로]

마침 잘됐군.

내가 거침없이 단상 위에 서자, 마이크를 빼앗긴 교사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어?”

[아아, 마이크 테스트.]

“자, 잠깐! 너는 누구…….”

누구인지 묻는다면, 대답해 주는 것이 인지상정.

[왕자다.]

“……예?”

[더 할 말 없지? 이상으로 신입생 환영회를 마치겠다. 모두 교실로 돌아가도록.]

* * *

“헐…… 대박.”

“왕자님 완전 멋지지 않아? 안 그래도 입학식 길어질 것 같아서 짜증 났는데.”

“맞아. 덕분에 일찍 끝나니까 너무 좋다.”

교실에 돌아오자마자 시작된 여학생들의 수군거림은 반 학생들이 모두 자리에 앉을 때까지 끊이지를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실 안에서 하이디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디로 간 거야?’

설마 어처구니없게 오늘만 결석한 것도 아닐 테고…….

더 골 때리는 건, 누군가가 반을 착각하지 않았다면 이미 반의 정원이 꽉 찼다는 사실이었다.

‘박 실장이 실수한 건가? 아니면 동명이인이라던가…….’

하이디를 찾으려고 이 말 같지도 않은 장소에, 옷 같지도 않은 것을 걸치고 왔건만 정작 본인이 없다니?

그때였다.

천천히 교실 문이 열리자 내가 그렇게나 찾던,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비록 여전히 마족으로서 뿔과 날개가 달려 있었지만, 너무나도 그리웠던 모습이었다.

“하이디!”

드디어 찾았다.

드디어 만났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만나려고 했는지는 스스로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되찾았다는 안도감이 전신에 내려앉았다.

“아.”

내 부름에 그제야 나를 바라본 하이디가 싱긋 웃었다.

마치 생크림을 잔뜩 퍼먹을 때나 짓던, 그런 미소였다.

“반 학생, 제아무리 왕족이라지만 교실 내에서는 어디까지나 학생의 신분이라는 것을 염두 해 주세요.”

어?

“잠깐, 그게 무슨 소리…….”

아.

‘설마…….’

나는 그제야 간과하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마족이 성인이 되면, 뿔과 날개가 자라나며 자신의 힘을 각성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즉, 뿔과 날개를 가진 마족은 이미 성인이라는 뜻이었다.

다 큰 성인 마족인 하이디가 학교에 있는 이유.

그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모르겠어요?”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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