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Chapter 14: 사랑과 전쟁 (1)
「대다수의 독자가 새로이 밝혀진 등장인물, ‘마족소녀 하이디’의 충격적인 정체에 경악합니다!」
그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싱긋 웃어 보이는 하이디의 모습.
마치 처음부터 선생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긴 사이, 하이디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면 이만 자리에 앉아 주시겠어요? 이제 슬슬 아침 조회를 시작해야 하거든요.”
“……알았다.”
“여러분들도 다들 자리에 앉아 주세요.”
평범한 인간 노예 소녀를 시작으로 마족을 넘어서 이제는 학교 선생이라니…… 출세도 이 정도면 [개연성]이 폭발하다 못해 가루가 되어 버릴 법도 했건만, 유감스럽게도 그럴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히 어마어마한 [개연성]과 [클리셰]의 합작 덕분이었다.
「25번 고백, 34번 차임이라는 기적의 스코어를 가지고 있는 한 모태 솔로 독자가 처음에는 다 그렇다며 당신을 위로합니다!」
지금 누구를 고백도 못 하고 차인 놈이랑 같은 취급이야.
「야설 빌런이 과거 당신의 강렬했던 고백을 되새기며 당신의 용기를 응원합니다!」
……아니, 했던가.
「야설 빌런을 추종하는 일부 독자가 당신의 [이루어질 수 없는 금지된 사랑]을 열렬히 응원합니다!」
어느새 교탁 앞에 선 하이디가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적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부터 여기 A반의 담임을 맡게 된 하이디라고 합니다. 담당하는 과목은 인성과 교양이며, 앞으로 한 학년 동안 여러분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어째 담당 과목이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더더기 하나 없이 무척이나 깔끔한 소개.
하이디가 그렇게 웃어 보이며 인사를 마치자, 이내 반 내에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환호소리가 울려 퍼졌다.
“호우!”
“예쁘다!”
“피부가 완전 애기 피부예요. 선생님!”
“틴트 뭐 쓰세요? 색깔 완전 예쁜데.”
“첫사랑 얘기해 주세요!”
「현직 급식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시대에 맞지 않는 학생들의 적극성에 대해서 어딘가 어색함을 느끼며 [개연성]을 지적합니다!」
「야설 빌런이 자신의 학창 시절을 회상하며 기승전 첫사랑에 대해서 큰 흥미를 표합니다!」
「그 의견에 동의한 야설 빌런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개연성] 지적이 무효화 됩니다!」
“하하…… 첫사랑이요?”
그렇게 멋쩍게 웃어 보인 하이디가 말했다.
“으음 제 첫사랑은요…… 바로 여러분이에요.”
“에이!”
“그게 뭐예요! 장난치지 말고요.”
마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불만.
그리고 불만이 쏟아져 나온 곳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탈급식 10년 차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마치 대본에 쓰여 있는 듯한 ‘하이디’의 발언에 노잼을 표합니다!」
「야설 빌런과 그의 추종자들이 예상을 전혀 벗어나지 못하는 ‘하이디’의 발언에 큰 실망감을 표합니다!」
“정말인데요.”
그렇게 말한 하이디의 그윽한 시선이 자연스럽게 나를 훑고 지나갔다.
“물론, 여러분들 나이 때에는 충분히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이긴 해요. 괜히 옆에 있는 이성 학생이 신경 쓰인다거나, 수업 시간 잠결에 본 선생님이 예뻐 보인다거나 말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호기심을 사랑으로 착각해서는 곤란하겠죠. 아시겠죠?”
「야설 빌런이 ‘하이디’의 의도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시선에 주목합니다!」
「어장 속 열대어 경력 5년 차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남자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하이디’의 놀라운 테크닉에 감탄을 표합니다!」
……이거, 요물이 되어 버렸군.
아무래도 상황을 보아하니, 하이디를 데리고서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상당한 설득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듯싶었다.
“아침 조회는 이걸로 마칠게요. 종례 시간에 뵙도록 해요.”
* * *
수업 시간.
말 그대로 수업을 받는 시간.
실제로 너무나도 당연한 시간이고, 학교에 있는 대부분의 시간이 이 수업 시간이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원물에는 각기 다른 수많은 장르를 넘어서 이 수업 시간에 대한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오늘 수업은 마치겠습니다.”
바로, 수업 시간이 없다는 사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내가 수업을 받는 동안에는 그 어떤 [독자]들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말하는 바는 간단했다.
바로 소설 내 연출상의 생략.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 시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경우에는 수업 자체가 재미있는 아주 특별한 수업이거나 [독자]에게 무언가 정보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적이지, 본래 의미의 수업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학교가 학생이 공부하러 오는 곳임을 감안한다면 이것이 학원물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역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독자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소설 속에서까지 지루한 수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전교 1등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알찬 내용이 가득했던 수업 시간이 끝났음에 아쉬움을 표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예외는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다.
‘자, 이제 어쩔까…….’
영양가라고는 1g도 없는 지루한 수업 시간 동안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하이디를 데리고 무난하게 빠져나갈 만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흐음.’
그냥 편하게 왕자의 권위와 권력으로 찍어 눌러서 데리고 나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이곳 불지옥 사이언스 고등학교는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에 속해 있었다.
‘……그냥 납치할까?’
리스크가 어마어마할 터인 극단적인 생각까지 떠오르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도 훨씬 더 지금의 상황이 막막해졌다는 게 다시금 피부로 와 닿았다.
그렇게 책상에 턱을 괸 채로 멍하니 교실 문을 바라보고 있자, 어느새 들어온 건지도 모르게 교탁 앞에 선 하이디가 자연스럽게 인사말을 건넸다.
“다들 오늘 첫 수업이셨는데 어떠셨나요? 재미는 있던가요?”
뿔과 날개를 제외한다면 외모는 예전 하이디와 그대로였건만, 물씬 풍기는 어른의 냄새는 확실하게 예전의 그녀와는 달랐다.
“재미없었어요.”
“아무래도 선생님 수업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선생님 수업은 언제예요?”
“맞아요. 선생님 수업 받고 싶은데…….”
……어린놈의 자식들이 벌써부터 립서비스를 해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커서 크게 될 놈들이 분명했다.
“아마 처음이라서 그럴 거예요. 이곳의 교사분들은 모두 다 유쾌하고 능력이 있는 분들이시거든요.”
그리고 그 순간, 다시 한 번 하이디의 그윽한 시선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거기다가 그녀의 입가에 서려 있는 미묘한 웃음기.
이거…… 아무래도 나를 한참을 얕보고 있는 모양이다.
“선생님.”
“네, 말씀하세요. 반 학생.”
왕자님도 아니고 그냥 반도 아니고 반 학생이라…… 어째 어감이 그냥 우리 반 학생처럼 들리는 게 미묘하게 기분이 나쁜걸.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연하게 되새겨 줄 필요성이 느껴졌다.
“아까 첫사랑 얘기하셨잖아요? 그러면 혹시 연하 어떠세요?”
“연하요?”
“네, 연하요. 예를 들면…… 나 같은?”
마치 버터, 마가린, 참기름을 2:1:1의 비율로 조합해서 만든 것 같은 압도적인 느끼함.
스스로 버티기 힘들 정도의 오글거림이 손발에 닥쳤으나, 그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그 효과는 실로 지대했다.
“꺄악!”
“어떡해! 어떡해!”
“왕자님 완전 멋있어!”
“상남자다!”
「야설 빌런이 이제야 사내대장부의 면모를 보이는 당신의 용기를 격렬히 응원합니다!」
「로맨스 소설을 애독하는 한 독자가 급변한 장르에 대해서 큰 만족감을 표합니다!」
그리고는 그저 싱긋 웃어 보이는 하이디의 모습.
“받아줘요!”
“선생님은 좋으시겠어요! 왕자님께서 저렇게까지 말씀하시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제 주도권은 내가 잡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제가 아까 말했죠?”
갑작스럽게 어딘가 낮아진 하이디의 목소리.
싱긋 머금고 있었던 그 웃음은 결코 기쁨의 웃음이 아니었다.
“호기심과 사랑을 착각하지 말라고.”
……이것 봐라.
하지만 조금 세게 나온다고 해서 내가 물러날 리가 만무했다.
“지금 제가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건가요? 선생님.”
“예, 맞아요.”
「일부 독자가 등장인물, ‘하이디’의 강력한 철벽에 감탄합니다!」
「다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하이디’의 걸크러쉬를 지지합니다!」
이것 봐라…….
“만약 착각이 아니라면요?”
“착각이 아니라…… 그것도 재미있네요. 하지만 저는 말이에요. 자기가 뱉은 약속 하나 지키지 못하는 그런 사람은 아주 싫어해요.”
누군가 그러던가.
가장 강력한 무기는 칼도, 펜도 아닌 다름 아닌 진실이라고.
그리고 지금 하이디가 쥐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진실이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당신의 업보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표합니다!」
「저격수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하이디’의 날카로운 팩트리어트 미사일에 감탄을 표합니다!」
……시끄러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만약 더 이상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어 버렸다던가. 대신 다른 약속을 지켰다던가.”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하이디가 웃는 모습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습니다만.”
“저와는 생각이 많이 다르네요. 하긴…… 그러니까 자기가 고백을 했든 뭘 했든 신경도 안 쓰고 다른 여자들에게 고백이나 하고 다녔겠죠. 정작 처음으로 고백했던 사람한테는 여동생 역할이나 시키면서.”
“그걸 어떻게 네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의문.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저 사실은 하이디가 알고 있으면 안 되는 사실들이었다.
‘잠깐, 설마…….’
[개연성]에 의해서 ‘마족’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지면서 몰라야 했을 진실도 함께 알게 됐다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지금껏 하이디가 나에게 가지고 있었던 호감은 모조리 리셋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오히려 마이너스에 가깝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
그리고 교실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지금 누구 얘기하는 거야?”
“대충 들어보니까 하이디 선생님 옛날 남자친구 얘기 같은데?”
“완전히 쓰레기인데?”
“그런데 그 얘기를 왜 왕자님한테 해? 설마…….”
“쉿! 입조심해!”
“아무리 그래도 나이 차가…… 헉!”
「연애 고자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등장인물, ‘하이디’의 강력한 뒤끝에 두려움을 표합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뒤늦게 밀려드는 당신의 업보를 바라보며 포기하면 편해진다고 조언합니다!」
하이디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느새 내 코앞까지 다가온 하이디가 내 넥타이를 슬며시 잡고는 당겼다.
「야설 빌런이 갑작스럽게 고혹하게 변한 전개에 콧김을 내뿜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말이죠.”
마치 나를 놀리듯이 바라보는 눈빛.
그렇게 눈이 마주친 순간, 갑작스럽게 당겨진 넥타이에 의해서 끌려간 내 귓가에 하이디가 조용히 속삭였다.
“저는 연하라면, 질색이랍니다.”
「심판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완벽한 판정패를 선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