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차 이후의 소설 속-57화 (57/164)

◈ 57화 Chapter 14: 사랑과 전쟁 (3)

“뭐, 뭐, 뭣……!”

마치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부풀어 오른 진상 엑스트라1의 얼굴.

하지만 그럼에도 말문이 막혔는지, 그 어떤 반박도 하지 못한 채로 결국 자리에 쓰러지듯 앉았다.

「대다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하이디’의 거침없는 발언에 유쾌함을 표합니다!」

「다수의 독자가 ‘하이디’의 [정의 구현]성 팩트 폭격에 사이다를 표합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변해 버린 ‘하이디’의 모습에서 얼핏 당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야설 빌런이 원래 사랑하면 닮는 것이라며 방금 전 발언에 힘을 보탭니다!」

「등장인물, ‘마족소녀 하이디’의 [비중]이 증가합니다!」

「현재 비중: 5.9%」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1.2%」

……결국 이렇게 되는군.

어째 내가 제2의 베른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으나, 베른과 하이디는 바탕이 되는 본질이 매우 달랐기에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어느새 자리에 돌아온 하이디가 슬쩍 나를 훑으며 말했다.

“잘 잤어요?”

“……야외 수업이 제법 인상적이던데.”

“아, 봤어요? 남에게 보여 줄 만한 광경은 아니었는데…… 부끄럽네요.”

그러는 것 치고는 전혀 부끄러워 보이는 표정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도발에 가까운 표정.

그녀는 지금 싸움을 걸고 있었다.

다름 아닌 나에게.

그리고 그 증거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하이디’가 했던 발언의 진의에 대해서 추측성 발언을 내놓습니다!」

바뀌어 버린 [설정] 덕분에 내 행보를 모조리 알게 된 하이디가 가리켰던 ‘썅년’의 대상.

그게 누구인지야 뻔하지 않은가.

-“너, 내 거 하자. 썅년아.”

그 말은, 다름 아닌 내가 리안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하이디가 굳이 지금 시점에 그 단어를 입에 머금은 이유 역시도 나에 대한 일종의 시위로 인한 것이리라.

“부끄럽기는, 아주 멋졌어.”

“그래요? 그러면 앞으로도 많은 ‘썅년’들에게 인성과 교양의 중요성에 대해서 일깨워야겠네요.”

「다수의 독자가 폭염 속에 뜬금없이 찾아온 태풍 같은 스산함을 느끼며 몸을 움츠립니다!」

「등장인물, ‘마족소녀 하이디’의 [얀데레] 성향이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이제는 아예 대놓고 말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더 이상의 사소한 밀고 당기기는 하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세로 밀릴 생각은 없었다.

“좋을 대로.”

“정말이죠?”

“그래.”

조금 생각해 보면, 명색이 고등학교 교사라는 하이디가 제아무리 약점이 잡혔다지만 여기까지 순순히 따라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것이 말하는 바는 간단했다.

즉, 내가 시작했다고 생각한 치정극의 시작이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하이디에 의해서 말이다.

「연애 고자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언젠가 겪어 본 듯한 ‘하이디’의 치밀한 밀당에 몸서리를 칩니다!」

‘이거…… 내가 또 어마어마한 걸 만든 것 같은데.’

물론, 베른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말이다.

그때였다.

마치 시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울려 퍼진 안내 방송이 곧 이 여행이 끝날 것임을 말해 주었다.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즐겁고 유쾌한 인간계 여행이 되시기를 바라며, 오늘도 헬게이트 항공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인간계 내에는 별도의 게이트가 존재하지 않으니 유의하여 주시고, 돌아오실 때는 별도로 지급된 ‘하인즈의 마법서’를 참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를 바라며, 모두들 질서정연하게 하차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마터면 그르칠 뻔했던 나와 하이디의 귀환행이 비로소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제야 도착했네요. 인간계.”

“그러네.”

슬쩍 자리에서 일어난 하이디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즐거운 여행이 되셨으면 좋겠어요. 예전처럼 어디 이상한 곳에서 이상한 일에 엮이지 말고.”

명백한 전쟁 선포.

그 말은 즉, 이번에는 얌전히 자기 옆에나 붙어 있으라는 뜻이었다.

“마찬가지야.”

「전쟁과 사랑을 애청하는 한 독자가 바람피우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숨 막히는 심리전에 팝콘 봉지를 뜯습니다!」

전쟁과 사랑.

아니, 사랑과 전쟁의 시작이었다.

* * *

그렇게 다시금 눈을 뜨니 묘하게 익숙한 밀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름 아닌, 반이 지내던 저택의 숨겨진 통로에 있던 밀실이었다.

단, 모조리 타 버린.

함께 인간계행 비행기를 타고 왔던 다른 마족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내리는 좌표는 승객마다 다르게 설정되어 있는 듯 했다.

‘뭐, 어차피 여기서 그놈들을 볼 일은 없을 테니.’

내가 일부러 찾지 않는 이상, 그들을 이곳에서 볼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말 그대로 엑스트라.

내 시야에서 벗어난 순간, 그들의 존재는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았다.

그때였다.

“반.”

이곳에 오면서 이미 지겹도록 들어왔지만, 그럼에도 그리웠던 목소리.

“하이디.”

마족의 상징인 뿔과 날개를 감춰 버린 하이디의 모습은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물론, 알맹이는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그러면 어서 이곳에서 나가시죠.”

어느새 다시금 딱딱하게 굳은 말투.

누가 교사 아니라고 할까 봐, 아주 착실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그것도 여기까지겠지만 말이다.

“아, 그 전에.”

말릴 새도 없이 일어난 갑작스러운 내 행동을 본 하이디가 경악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뭐하긴. 보시다시피 태우고 있는데?”

“지금 태우고 있는 게 뭔지는 아시는 거고요?”

“알아. 하인즈의 마법서잖아?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

내 입장에서야 그저 이걸 해두지 않으면 혹시 모를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기에 저지른 일이었지만, [마족]으로서 완전한 [설정]을 굳힌 하이디에게 있어서는 아니었다.

경악한 그녀가 어느새 반쯤 울먹거리는 눈치로 외쳤다.

“그,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태운다는 건가요?!”

아니까 그렇지.

더 이상 그 말 같지도 않은 세계와 엮이는 것은 절대로 사양이었다.

“나는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거든.”

「야설 빌런이 이중 삼중적인 의미가 섞인 당신의 야릇한 발언에 주목합니다!」

「야설 빌런의 추종자들이 마침 적당한 밀실에 위치한 당신들의 행동에 주목합니다!」

“네, 네? 그, 그게 무슨 의미죠?”

“말 그대로야. 나는 돌아갈 생각이 없고, 너를 돌려보낼 생각도 없어.”

그리고 그것은 하이디를 완전히 되찾기 위한 내 첫 번째 발걸음이었다.

「다시금 거침없어진 당신의 발언 수위에 야설 빌런이 폭주를 시작합니다!」

「뒤늦게 출동한 관리자에 의해서 야설 빌런의 댓글이 일시적으로 제한됩니다!」

“그, 그러니까 그 말은…….”

눈가에 고인 눈물과 함께 어느새 홍당무처럼 물든 하이디의 얼굴.

그렇다면 이쯤에서 그녀에게 ‘썅년’이 아닌 다른 것을 상기시켜 줄 필요성이 느껴졌다.

예를 들면, 나와의 진득한 추억이라던가.

“사랑한다. 씨발 년아.”

* * *

역치.

물리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반응 그 밖의 현상을 일으키기 위해 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최소의 에너지 값을. 그리고 생물, 생리학적으로 보자면 생체에 흥분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도 자극의 세기를 나타내는 값을 가리키는 것.

지금 내가 굳이 역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세상의 모든 자극이 으레 그렇듯이 같은 자극이 반복되면 저 역치에 도달하지 못하는 법이었으니까.

“……못 믿겠어.”

말투까지 다시금 반말로 바뀔 정도로 당황하고, 흔들렸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한 조각의 자존심은 허락하지 않는 하이디의 모습.

이것은 결국, 과거에는 충격적이었던 내 고백도 이제는 진부해져 버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뭐, 엄밀하게 따지면 내가 그동안 지긋하게 부수어 온 [클리셰 붕괴율]도 이것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독자]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이미 예측된 당신의 발언에 약간의 실망감을 표합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며 다른 [독자]들에게 추천을 요구합니다!」

아무튼, 쉬운 길이 있으면 쉬운 길만 쭉 따라서 걷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건만, 그 쉬운 걸 허락을 안 해 주니 골이 아프긴 했다.

그렇게 내가 슬쩍 [독자]들의 반응을 살피는 사이, 고개를 푹 숙였던 하이디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증명해.”

“어떻게?”

“네 말이 진심이라는 증명.”

그리고는 눈을 감은 채로 선 하이디의 모습.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이제야 제재에서 막 풀려난 야설 빌런이 당신의 용기를 맹렬하게 지지합니다!」

「야설 빌런의 추종자들이 당신의 ‘증명’ 방식에 대해서 강하게 주목합니다!」

시작은 분명히 더없이 막장에 가까운 치정극이었는데, 어째 끝이 다가오니까 오히려 순애물로 바뀐 기분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선택의 시간이었다.

하이디를 내가 써 내려갈 [서사]의 [여주인공]으로서 맞이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그런 선택.

내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하이디에게 말했다.

“먼저, 말해 둘 게 있어.”

“……뭔데?”

“나는 이 세계를 부술 거야. 한 톨의 먼지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다.”

“어째서?”

분명히, 예전에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었다.

지금까지 ‘나’의 역할이었던 ‘노예 소년 아인즈 반’은 이 세계를 부술 그 어떤 이유나 [서사]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마족이자, 불지옥 반도의 왕자로서.”

「다수의 독자가 다시금 명확하게 밝혀진 당신의 목적에 대해서 주목합니다!」

「[악]의 성향이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악의 왕자] 속성이 추가됩니다!」

「[선]의 성향을 가진 세력과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됩니다!」

「[서사]가 강하게 요동칩니다!」

「[서사] [불지옥 반도의 왕자]를 완료하셨습니다!」

「당신의 새로운 [서사]가 갱신됩니다!」

“그래도 나를 따라올 수 있겠어?”

“……응.”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좋아.”

내가 천천히 하이디에게 다가가서 머리를 쓰다듬고는 이마에 살짝 키스했다.

그리고 몸을 부르르 떨고는 살며시 눈을 뜬 하이디의 모습.

“……끝이야?”

“아니.”

“읍!”

「야설 빌런이 조심스럽게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당신의 [서사]가 진행됩니다!」

+

[아인즈 반의 서사]

[1] 노예 소년, 반. [완료]

[2] 불지옥 반도의 왕자. [완료]

[3] 침략자. [현재 진행 중]

[4] ???

[5] ???

+

이것은 선전포고다.

이 쓰레기 같은 세계 속에 나를 처넣은 녀석에 대한 선전포고.

「[선]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끝내 [악]으로 돌아선 당신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악]을 지지하는 소수의 독자가 비로소 확실하게 정해진 당신의 행보를 맹렬히 지지합니다!」

부수고, 죽이고, 빼앗는다.

나는 침략자다.

이 세계의 존재에 반기를 든, 유일한 침략자.

「[선]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한 독자가 어딘가 이상해져 가는 전개에 결국 [하차]를 선언합니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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