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Chapter 15: 침략자 (1)
다시금 찾아온 ‘반의 고향마을’ 속 풍경은 분명히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했다.
마치 이곳만 시간이 흐르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뀐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반 아니니? 하이디도 같이 왔구나!”
“예, 안녕하셨어요?”
“우리야 늘 같지. 그런데 여기는 또 어쩐 일로?”
“그냥 지나가다가 들렀어요.”
“그래? 그러면 편하게 있다 가렴.”
예를 들면, 은근슬쩍 마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가 되돌아온 하이디에 대한 기억이라던가.
“그거 알아? 요즘 들어서 잠잠했던 뒷산에서 다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고 하더군.”
아니면 예전과 어딘가 살짝 달라진 소문이 들려온다던가.
늘 그렇지만, 마을 사람 A가 말하는 소문에 대한 정확도는 대부분 99.99% 이상의 놀라운 적중률을 보여주는 법이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블랙 드래곤 루’의 행적에 대한 발자취를 발견합니다!」
그 말처럼, 그 소문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사라졌던 루의 행방.
도대체 어디로 갔나 했더니, 아무래도 살고 있던 산으로 돌아와서 틀어박힌 모양이었다.
물론, 단순히 그뿐이었다면 계약으로 맺어진 연결고리로 찾지 못했을 리가 없었으니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기는 할 테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마침 루를 찾아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기에 지금의 소문은 딱 맞게 찾아왔다고 볼 수 있었다.
“루를 찾는다.”
“……드래곤을?”
예전과는 다르게 어딘가 미묘하게 경계심이 느껴지는 하이디의 말투를 보니, 아무래도 설득을 위해서는 적당히 개수작을 부릴 필요성이 느껴졌다.
“루는 아주 훌륭한 이동 수단…… 아니, 동료니까.”
「동료애를 중시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쓰레기성 발언에 주목합니다!」
「연애학개론 교수를 자처한 한 독자가 애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당신의 훌륭한 재치에 A 학점을 부여합니다!」
그리고는 어딘가 뾰로통한 얼굴로 마지못해 끄덕이는 하이디의 모습.
“그런 거라면…… 뭐.”
조금 번거롭다고 여겨질 수도 있었으나, 만약 정면으로 설득하려고 했다가는 오히려 피바람이 불어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어쨌거나 설득 같지 않은 설득도 끝났겠다, 이제 남은 일은 사라졌던 루를 되찾는 일뿐이었다.
“가자.”
* * *
이름 없는 뒷산.
과거, 드래곤이 살고 있다고 소문이 파다했던 이 뒷산은 실제로 블랙 드래곤 루의 안식처였었다.
단순히 거기까지만 생각한다면, 사라졌던 루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루!”
산을 타고 울려 퍼지는 공허한 메아리.
하지만 그럼에도 루의 대답이나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수의 독자가 갑작스럽게 잠수를 타 버린 ‘루’의 행적에 불만을 표합니다!」
「일부 독자가 당신이 더 이상 ‘루’에게 집착하지 말고 버릴 것을 요구합니다!」
물론, 단순히 그렇게 편하게 살 수만 있다면 나도 참 좋았을 테지만 아쉽게도 지금 시점에서의 ‘루’는 이렇게 쉽게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카드였다.
내가 침략자로서 사용할, 그런 카드 말이다.
“이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물론, 루가 이곳에 짱 박히게 된 원인을 굳이 따져 보자면 결국 내가 루를 내 시야 바깥으로 보냈기 때문에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작가] 놈의 농간으로 일어난 것이었지만, 그렇다면 그 일에는 합당한 [개연성]이 존재해야만 한다.
만약 [작가] 놈이 최소한의 [개연성]마저도 무시했다면, 나는 이미 그것을 철저하게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분명히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인 [작가] 놈이 그런 최소한의 안전장치마저도 마련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루!”
다시 한 번 대답 없이 울려 퍼지는 공허한 메아리.
불러서 나오지 않겠다면, 이쪽에서 직접 찾아갈 수밖에.
“아자토스.”
[끼릿!]
「다수의 독자가 은근슬쩍 [공기화]되어 가던 ‘호문쿨루스 아자토스’의 등장에 환호합니다!」
「수의사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반려동물에게도 충분한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다며 당신의 무관심함을 맹렬히 비난합니다!」
“루를 찾아.”
그와 함께, 검은빛의 섬광이 순식간에 이름 없는 뒷산 전체에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선 순식간에 산맥 전체를 뒤덮은 검은빛.
이것은 결코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아자토스의 힘이 아니었다.
‘아자토스가 이렇게 강했나?’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아자토스’의 급진적인 성장이 ‘불지옥 반도’에 다녀온 일과 연관이 있음을 추측합니다!」
그 말처럼,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불지옥 반도에 다녀온 일이 아자토스에게 어떤 심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게 이름 없는 산 전체에 검은빛이 들어앉은 지 몇 분이 지난 후, 전신이 따끔거릴 정도로 위협적인 포효가 산맥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크오오오오!]
겁 없이 자신의 영역에 침입한 침입자에 대한 경고와도 같은 포효.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내가 물러설 리가 없었다.
“아자토스, 잡아!”
[끼이잇!]
그 순간, 산을 덮고 있던 검은빛 중 한 곳이 화산이라도 폭발한 것처럼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용이 승천이라도 하는 것 같은 광경.
빈말이 아니라, 그곳에는 정말로 드래곤이 검은빛을 뚫고서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끄오오오오!]
위압적인 포효.
하지만 지금의 나는 과거의 평범한 노예 소년이 아니었고, 그것은 내 옆에 있는 하이디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루.”
내가 살며시 루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검은빛을 뚫고 나온 루의 시선이 차갑게 나를 마주 보았다.
[……아인즈 반.]
또 어딘가 미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몸이 떨어지면 마음도 떨어진다는 옛 선인들의 말은 진짜인 듯 했다.
물론, 그 외에도 루가 저렇게 되어 버린 이유야 있겠지만 말이다.
“찾았어. 이만 나와 같이 돌아가자.”
[내가 돌아올 곳은 이곳뿐이다.]
「다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블랙 드래곤 루’의 말처럼 그만 질척거리고 돌아갈 것을 종용합니다!」
물론, 나도 더 이상 질척거릴 생각은 없었다.
“이유를 듣고 싶어.”
[……나는 내 손으로, 인간을 해쳤다.]
‘그렇게 이어지는 건가.’
인간을 사랑하는 드래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나였기에 루에게 정말로 인간들의 도시를 학살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용사 디오가 행했다고 여겨지게끔 꾸며내라고 했을 뿐.
하지만 그것은 명백하게 내 시야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 이야기는 즉, [작가] 놈이 얼마든지 농간을 부릴 수도 있었다는 뜻.
하지만 그것은 루의 의지가 아니다.
“해치지 않았어.”
[……내가 죽였다.]
“내가 시킨 일이야.”
[내가 행한 일이기도 하다.]
“너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모두 다 내 탓이다.]
앞뒤가 꽉 막혔다는 것이 이런 걸까.
아니, 이 경우에는 죄책감에 잡아먹혔다고 보는 것이 옳아 보였다.
세상에, 죽이지도 않은 인간을 가지고 죄책감을 가지는 드래곤이라니…… 아마 다른 드래곤들이 보았다면 평생 비웃었을 것이다.
「다수의 독자가 말이 통하지 않는 ‘루’의 대답에 고구마를 먹은 듯한 답답함을 느낍니다!」
물론, 그런 드래곤이었기에 내가 선택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할 수 없나.’
이제 남은 선택은 두 가지였다.
루를 버리고서 제 갈 길 가거나, 아니면 몽땅 다 내가 뒤집어쓰거나.
그리고 후자의 선택은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생각보다 나쁜 것이 아니었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백 명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라고.
“내가 죽였어.”
「[악] 성향이 강하게 요동칩니다!」
「당신의 [서사]가 요동칩니다!」
[……뭐?]
“네가 죽였다고 생각하는 그 인간들, 전부 다 내가 죽였다고.”
[그게 무슨 말이지?]
“생각해 봐. 너는 분명히 내가 했던 말 그대로 도시의 인간들을 용사 디오가 해쳤다고 믿게끔 현장을 꾸미고서 그 자리를 떠났어. 그렇지?”
[……그런데?]
“하지만 말이야. 단순히 그것뿐이었다면 결국 제국의 이목을 속일 수는 없었을 거야. 그래서 내가 죽였어. 모조리 다.”
[……뭐?]
“내가 죽였다니까? 네가 인간들을 풀어 주고 난 뒤에, 곧바로.”
그리고 이쯤에서 비릿한 미소 한 번 지어 주면 더없이 완벽한 [악]의 모습이 완성된다.
「대다수의 독자가 이제야 드러난 당신의 [악행]에 대해서 주목합니다!」
「[악]을 지지하는 독자가 당신의 거침없는 행보를 지지합니다!」
[말도 안 돼…… 너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아인즈 반.]
“정말 그렇게 생각해?”
물론, 그 말처럼 지금의 나는 아직 성인조차 되지 못한 애송이 마족이었기에 그 신분이 어떻든 간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루가 알지 못하는 힘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도 나조차도 감히 가늠하지 못하고 있는.
“아자토스.”
[끼이잇!]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아자토스의 진정한 모습은, 루조차도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뱀의 형상을 띄우고 있었다.
말을 한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어마어마한 모습.
「대다수의 독자가 드래곤조차도 지렁이로 보이게 만드는 ‘아자토스’의 어마어마한 위용에 주목합니다!」
[……호문쿨루스? 아니, 달라. 저건 마치…….]
드래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인 루가 저렇게까지 당황한 모습이라니.
확실히 그 반응처럼, 불지옥 반도에 다녀온 후 아자토스의 모습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감이 있었다.
‘자세히 알아볼 필요성이 있겠군.’
분명히, 온갖 지옥 같은 상황이 연출되는 불지옥 반도는 감정을 먹고 사는 호문쿨루스인 아자토스에게 있어서는 뷔페나 다름없었을 테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이 정도의 엄청난 성장을 설명할 수 없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나중에 알아볼 일이었고 지금은 루에게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는 믿겠어? 내 말이 사실이라는 걸.”
[왜…… 왜 죽였는가!]
격렬한 반응.
이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드래곤인 루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렇다면 여기부터가 중요했다. 자칫 잘못하면 루를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었기에.
“너와 같은 이유였어. 바로 인간을 위해서지.”
[……인간을 위해서?]
“그들의 희생 덕분에 결국 타락한 용사의 폭주를 막을 수 있었고, 나아가서 새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어. 모두 다 그들과 너의 희생 덕분이지.”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현재 인간들의 상황은 전쟁 전보다 개판이면 개판이었지, 절대로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게 정말인가?]
물론, 산속에서 짱 박혀 있던 루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럼, 정말이지.”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뻔뻔한 거짓말에 혀를 내두릅니다!」
「[악] 성향이 강하게 요동칩니다!」
「[교묘한 선동가] 속성이 추가됩니다!」
[그런가…….]
그리고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루의 모습.
이제 상황은 완전히 정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루, 나와 다시 함께해 줘.”
그렇게 내가 손을 내민 그 순간, 하늘에 떠 있던 루의 모습이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다.
강철보다도 단단한 비늘과 명검보다도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고 있는 드래곤에서, 긴 흑발을 가진 미녀의 모습으로.
“좋다.”
그녀가 내 손을 맞잡자, 순간적으로 옆에서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호오.”
차갑게 내려앉은 하이디의 시선.
“그래서였구나. 나는 참, 그것도 몰랐네. 아! 방해되면 비켜 줄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변수.
「연애학개론 교수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치명적인 실수에 F 학점을 부여합니다!」
……거참, 썩어 문드러진 전개구만.
물론, 수많은 러브 코미디의 멍청한 주인공들이 이런 상황에 빠지면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며 결국은 둘 다 놓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가 그런 멍청한 전개를 따를 리가 있겠는가.
명색이 왕자인데 말이야.
내가 가볍게 손가락으로 하이디를 가리켰다.
“네가 첫 번째.”
그다음으로는 루.
“그리고 네가 두 번째.”
“지,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좋은 생각이다.”
루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하이디가 두 눈을 크게 뜨고는 루를 응시했다.
“……지금 뭐라고?”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네가 첫 번째. 내가 두 번째. 무척이나 합당한 생각이군.”
“그러니까 도대체 뭐가 첫 번째고, 두 번째라는 건데!”
“그런 말을 서슴지 않고 묻다니, 부끄럽군.”
“도, 도대체 뭐, 뭐가 부끄럽다는 건데!”
어느새 홍당무처럼 빨개진 하이디의 외침에 루가 고혹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노코멘트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