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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이후의 소설 속-59화 (59/164)

◈ 59화 Chapter 15: 침략자 (2)

다시 제국으로 향하는 길.

예전이었다면 진작 도착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었으나, 아직도 우리 일행의 발목이 이곳에 잡혀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걸어가지.”

“뭐? 왜?”

“본체의 모습으로 변하고 싶지 않다.”

「일부 독자가 등장인물, ‘블랙 드래곤 루’의 마음을 전적으로 이해하며 그녀를 지지합니다!」

루의 강력한 주장 아래 본의 아니게 시작된 도보 여행.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일어난 그 만남은 한편으로는 갑작스럽고, 또 어찌 보면 무척이나 뻔하게 일어났다.

“가진 것 전부 다 내놓고 썩 꺼지시지.”

우락부락한 근육.

울던 어린아이도 뚝 그치게 만들 정도로 험상궂은 얼굴.

마지막으로 도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알 수 없는 출처 불명의 호피무늬 민소매까지 입고 있는 그 모습은 분명히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맙소사.”

“핫하! 애송아. 너무 그렇게 겁먹지 마라. 가진 것만 모조리 다 내놓는다면 목숨만은 살려 줄 테니.”

산적.

산을 거점으로 하여 생활하는 도적을 총칭하는 말.

현실에도 이미 질릴 만큼 등장하는 이들은 이 뻔한 세계에서는 본디 주인공의 강함을 측정하는 용도 정도로 사용되고 또 처분될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분명히, 그래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너…… 제법 귀엽게 생겼군.”

그래, 끝내주는 미인이 둘이나 있는 이 상황에서 그 대사도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 대상이 나만 아니었다면 말이지만.

「다수의 독자가 남자 산적도 울고 갈 강렬한 외모와 카리스마를 소유한 ‘여 산적’의 등장에 주목합니다!」

「야설 빌런이 최근 들어서 부쩍 잦아진 [러브 코미디] 전개에 눈을 크게 뜹니다!」

어딘가 미묘하게 비웃음을 머금은 하이디가 말했다.

“혹시 저쪽이 세 번째?”

“……사양할게.”

「일부 독자가 당신을 먹이는 ‘하이디’의 발언에 유쾌함을 표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안전불감증에 걸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무방비한 여행을 지속하면서 그 흔하디흔한 산적 하나 만나지 않았던 것이 어찌 보면 더 용한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왜 지금 시점에서야 산적들이 나타났는가?

이에 대해서는 이미 짐작 가는 점이 있었다.

‘역시 그런가.’

바로 [작가]의 개입.

말하자면, 지금 일어난 산적의 등장은 [침략자]로서의 내 선전포고에 대한 일종의 답변이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내 앞을 가로막겠다면 치우면 그만이다.

내가 살며시 루를 불렀다.

“루.”

“싫다.”

“왜?”

“그러려면 본체로 변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굳이 변하지 않아도 해치울 수 있잖아?”

“그것도 싫다.”

“또 왜?”

“거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다.”

“…….”

「일부 독자가 쌩얼조차도 항상 예쁘게 보이고 싶은 ‘루’의 마음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연애학개론 교수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눈치 없음에 D 학점을 부여합니다!」

“하이디?”

“조금 생각해 보니까, 얌전히 세 번째가 되는 것도 꽤 괜찮을 것 같아.”

작렬하는 뒤끝.

거기다가 어째 주체도 틀렸다.

「연애 고자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끝나지 않는 ‘하이디’의 뒤끝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감을 표합니다!」

「여자어 만점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이럴 때는 무조건 비는 것이 맞는 것이라며 당신의 행동을 재촉합니다!」

참으로 망할 상황.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에게는 최후의 보루가 남아 있었다.

“아자토스.”

내가 아자토스를 부른 순간, 머릿속에서 끔찍한 악몽이 울려 퍼졌다.

[기이이잇!]

「수의사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잠자는 반려동물의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동물애호가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잘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며 당신의 비인간적인 행동을 맹렬히 비난합니다!」

“…….”

마치 다 같이 모여서 작당이라도 한 듯이 일어난 현상.

아니, 그렇기에 이로써 [작가] 놈이 개입했다는 증거는 이제 차고 넘칠 정도가 되었다.

‘아슬아슬하게 걸치는군.’

만약 여기서 조금만 더 개수작을 부렸더라면 [개연성]이 차고 넘칠 만큼 뭉개졌을 텐데, 꼴에 학습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지 딱 이 정도 선에서 멈췄다.

물론, 그런 식으로 나오겠다면 나 역시도 그것을 이용할 뿐이었지만 말이다.

“너희들끼리 뭐라고 떠드는 거냐! 잔말 말고 냉큼 시키는 대로 하지 못해?”

“잠깐만요.”

“뭐냐?”

“당신, 도대체 어디서 온 거죠?”

“그게 무슨 말이지?”

“이 근방 산맥에는 드래곤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었을 텐데, 설마 겁도 없이 드래곤의 영토에서 산적질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 테고, 도대체 어디서 왔냐는 거죠. 설마 갑자기 튀어나온 것도 아닐 테고.”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예리한 지적에 선수를 빼앗겼다며 아쉬움을 표합니다!」

「[개연성]이 요동칩니다!」

“그, 그야 당연히 저 아랫마을에서…….”

“저는 그곳에서 십 년이 넘게 살았습니다. 작은 마을인 터라, 그곳에 사는 사람이라면 서로에 대해서 모를 수가 없죠. 그런데 저는 당신을 처음 봐요.”

그야,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 어느 소설에서도 일개 산적 따위의 소재나 출신지를 일일이 정해 놓지는 않는다.

물론 예외의 경우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 경우에는 특별한 이유나 신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금처럼 [작가] 놈이 날 공격하기 위해서 뜬금없이 나타날 것이 아니라.

“그, 그건…….”

엄청나게 떨리는 목소리.

그 동요는 명백하게 비어 있는 [설정]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다수의 독자가 뜬금없이 나타난 ‘여 산적’의 존재에 대해서 [개연성] 의혹을 제기합니다!」

「[개연성]이 거칠게 요동칩니다!」

“내가 어디서 왔냐면…….”

그리고서 점차 흐려지기 시작한 여 산적의 몸.

그 현상은 하이디 때와 비슷했으나, 그 속도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빨랐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이디는 나와 상당 기간을 함께 다닌 존재였고, 지금의 여 산적은 등장한 지 몇 분도 채 되지 않은 그런 존재였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일 분도 채 되지 않아서 사라질 운명.

물론, 단순히 없애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길게 말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가 맞춰 보죠.”

“마, 맞춰 본다고?”

“먼저, 당신은 이 근처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그건…… 마, 맞아!”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애써 행해진 강한 긍정.

당연히 그 긍정이 사실일 리는 없었으나 그건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늘 그렇듯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실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당신은 아주 먼 곳에서 찾아왔습니다. 다름 아닌 저를 찾아서.”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자신조차도 알아내지 못한 ‘여 산적’의 등장 배경에 대해서 주목합니다!」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그렇다면 왜 찾았을까? 제가 모를 거라 생각하지 마시죠.”

당연히 모른다.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서쪽 마왕의 영토와 인접한 산맥에서 제국조차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존재가 있다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강력한 세력은커녕 그딴 소문도 들어본 적 없다.

「대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어긋나 있던 [개연성]이 폭발하듯이 요동칩니다!」

“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찾아오셨다면, 잘 오셨습니다. 산적왕.”

그리고 그 순간, 투명한 유리잔처럼 희미해져 가던 여 산적의 모습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쩌적-.

쩌저적-.

「어긋난 [개연성]이 회복됩니다!」

그리고서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여 산적의 모습.

경우가 경우인지라 외모는 그대로였지만, 풍기는 느낌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그것이었다.

“눈썰미가 제법이군. 정확히 봤다. 내가 바로 고요한 산맥의 지배자, 산적왕 카밀라다.”

「대다수의 독자가 단번에 ‘산적왕’의 정체를 꿰뚫어 본 당신의 명석함에 감탄합니다!」

찾아올 이유가 없다면, 만들어 주면 그만.

물론, 그 이유는 철저하게 내 의도에 맞춰 줘야겠지만 말이다.

“저를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되겠죠?”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사내로군. 맞다. 내가 굳이 이런 오지까지 찾아오게 된 이유는 너를 찾기 위해서였다. 침략자.”

「[침략자] 속성이 요동칩니다!」

「[악의 왕자] 버프가 발동 중입니다!」

그리고서 시작된 카밀라의 이야기.

“우리가 산적이 된 이유는 그저 살고자 함이었다. 썩어 빠진 제국의 횡포를 피해서, 약자를 유린하는 서쪽의 마왕을 피해서 우리는 그저 살고자 했다. 물론,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그들로부터 둘러싸인 고요한 산맥이라는 것이 우스운 이야기지만 말이지.”

그녀가 숨을 고르고는 말했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침략자, 너라면 이 썩어 문드러진 세상을 모조리 지우고서 다시금 새로운 시대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를 받아들여다오.”

말은 길었지만, 결국 요지는 철저하게 내가 의도한 그대로였다.

[거악]은, 언제나 그렇지만 자잘한 [악]들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그 제안, 받아들이죠.”

「[서사]가 요동칩니다!」

「[고요한 산맥의 지배자] 타이틀을 획득하셨습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비중]이 증가합니다!」

「현재 비중: 15.5%」

“산적왕, 당신은 이제부터 제 도구입니다. 죽이라면 죽이고, 죽으라면 죽는, 그런 도구.”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악]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피도 눈물도 없는 당신의 발언에 감격하며 후원금을 전달합니다!」

「현재 적립금: 25,710G」

“카밀라, 당신은 이만 고요한 산맥으로 돌아가서 제 지시를 기다리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그림자처럼 사라진 산적왕의 모습.

내 시야 바깥으로 사라져 버렸으니 돌아가다가 [작가] 놈의 농간에 비명횡사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으나, 솔직히 말해서 별로 상관없었다.

이것은 경고였다.

함부로 개수작질을 부리지 말라는 [작가] 놈에 대한 경고.

‘그러고 보니, [독자]들 중 한 놈이 하차했다던가.’

물론, 그 하차한 [독자]가 나처럼 이곳에 빨려 들어왔는지 아닌지는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다지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

“뭐, 상관없겠지.”

그렇게 올려다본 하늘은 유난히 우중충했다.

* * *

「용사 디오가 기나긴 잠에서 마침내 눈을 떴을 때, 그가 마주한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여기는?”」

「도대체 얼마 동안 누워 있었던 건지, 정신은 온전히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강건했던 그의 몸은 좀처럼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일어났군.”」

「낯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인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목소리. 그러나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본 디오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네가…….”」

「하마터면 눈물을 쏟아 내릴 뻔한 디오를 향해서 그 존재가 손사래를 쳤다.」

「“잠깐, 무슨 오해를 하는지 알고 있는데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그게 무슨 소리지?”」

「“내 소개를 하지.”」

「그 존재의 정체를 들은 디오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나를 마왕이라고 부르지. 서쪽의 마왕. 그게 지금의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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