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Chapter 16: 쩐의 전쟁 (3)
「그리고 이내 이어진 일상은 말 그대로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대체 어디에서 구해 온 건지 모를 커피 한잔을 시작으로 조용히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며 밥시간이나 기다리는 일상. 이 세계에 떨어진 후 항상 무엇인가에 쫓기듯이 지내 온 디오에게 있어서는 무척이나 오랜만에 맛보는 고요한 일상이 아닐 수가 없었다.」
「“맛있네.”」
「“블랙 트러플. 송로버섯이야. 너라면 이미 맛본 적 있을 수도 있지만, 이곳에서는 구하기 쉽지 않은 거거든.”」
「‘아니, 맛본 적 없는데.’ 그렇게 딴죽을 걸려던 디오는 어느새 자신을 향해서 작게 미소를 짓고 있는 마왕의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왜 그래?”」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서쪽의 마왕이다. 언젠가는 죽여야 할 대상이며, 증오해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왜일까, 디오는 그 사실이 가슴에 쉽게 와닿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오는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얼굴. 그 목소리. 모든 것이 디오가 알고 있던 그녀와 같았지만, 마왕은 그가 알고 있던 그녀가 아니다. 그 단순하고도 믿기 싫은 진실이 디오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괴롭게 다가왔다.」
「“그래?”」
「마치 모든 속내를 읽는 것처럼 느껴지는 마왕의 눈동자. 처음에는 꺼림칙하기 짝이 없던 눈동자가 디오는 이제 더 이상 거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혼자만 앓고 있던 고독함에 대한 유일한 이해자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뭘 그렇게 봐? 하긴, 이 얼굴이 예쁘긴 하지.”」
「“…….”」
「“심각하기는…… 농담이야. 여전히 딱딱하다니까. 조금은 풀어지는 게 어때?”」
「‘여전히?’ 디오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의문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도대체 목적이 뭐냐.”」
「“예전에도 말해 줬을 텐데? 네 손에 죽는 거라고.”」
「“그 터무니없는 소리가 정말로 믿으라고 했던 말이었나?”」
「“성검까지 가져다줬는데도 불신이라니…… 슬픈걸. 인간 불신도 그 정도면 병이야.”」
「“인간?”」
「당연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는 인간이 아니다. 서쪽의 마왕. 모든 악의 정점에 선 존재. 더군다나 마왕과 같은 얼굴을 한 그녀조차도 인간이 아닌 엘프였다. 그런 존재의 입에서 인간 불신이라니, 디오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이상하게 들렸다. 그러나 들려온 마왕의 대답은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말꼬리 잡기는. 그러면 내가 뭐로 보이는데?”」
「“스스로를 마왕이라고 밝힌 것으로 아는데. 거짓말이었나?”」
「“굳이 말하자면 그건 일종의 직함일 뿐, 내 정체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이지.”」
「사용하는 말과 단어 하나하나마다 어째서인지 느껴지는 이질감. 그 이질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디오가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마치 인간처럼 말하는군.”」
「“칭찬으로 들을게.”」
「“내가 순진하게 널 믿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바라던 바야. 너무 정들면 죽이기 곤란할 테니.”」
「마치 자신의 목숨 따위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듯이 말하는 마왕의 모습.」
「진심인가?」
「디오는 그 목소리에서 그 어떤 거짓의 흔적도 읽어 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쉽사리 믿지는 못했다.」
「“…….”」
「결국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비록 지켜본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마왕은 이따금씩 테라스에 홀로 서서 고요한 티타임을 즐겼다. 그 티타임은 기묘하게도 마치 무엇인가를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혼자서 웃거나, 표정을 구기고는 했다.」
「“……재미있는데.”」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는 마왕의 모습을 보며 디오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옆에 서서 그 이유를 묻지는 못했다.」
「조금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고요했던 일상은 디오에게 있어서 더없이 자연스러워졌다. 마치 처음부터 이런 평화로운 일상을 지내오기라도 했던 것처럼.」
「“오늘은 테라스로 안 나가는 건가?”」
「“나한테 꽤 관심이 많은가 보네?”」
「“그냥 물어본 거다.”」
「“귀엽기는.”」
「“……뭐?”」
「정말로 저 존재가 마왕이 맞기는 맞는 건가?」
「디오는 이따금씩 그런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사로서의 직감이,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는 ‘악’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악’이 아닌 악의 정점. 참으로 짓궂기 짝이 없는 모순이었다.」
「“디오!”」
「뒤늦게 고대 정령 물이 깨어난 후, 물은 마왕에게서 결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디오에게 어서 이곳을 떠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마왕의 성에서 머물다니. 인간 녀석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마왕과 손이라도 잡을 셈이야?”」
「“누명을 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그 사건 이후, 디오는 더없이 소중한 동료를 잃었다. 때문에 지금 내뱉은 말 역시도 사실 진심에 가까웠다.」
「“디오!”」
「물론, 물 앞에서까지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낼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냥 해 본 말이야. 어차피 나도 곧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어.”」
「“곧? 지금 당장 떠나자고!”」
「“아직 알아내야 할 것이 있어.”」
「디오는 그렇게 말한 스스로에 대해서 내심 놀랐다. 정말로 그게 이유인가?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은 결국 하지 못했다.」
「“조만간 이곳을 떠날 생각이다.”」
「“뜻대로 해.”」
「디오가 곧 이곳을 떠날 것임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왕의 태도는 여전히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정말로 그래도 상관없나?”」
「디오는 이 질문이 굉장히 이상하다는 사실을 내뱉고 나서야 깨달았다. 용사가 마왕에게 얹혀살고 있는 광경. 그 누가 보아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그에 반해서 마왕의 반응은 그야말로 상식적이었다.」
「“여기서 가만히 붙잡아 둬 봤자 어차피 ‘용사의 힘’은 되찾지 못할 테니까.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밥 좀 그만 축내고 슬슬 독립 좀 하지 그래?”」
「“……알았다.”」
「왜일까. 디오는 마왕의 그러한 상식적인 태도에 서운함을 느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똑같아서인가?」
「그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언젠가부터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 용사와 마왕에 대한 알 수 없는 관계 때문이었다.」
「용사는 왜 마왕을 죽이려 하는가?」
「그동안 해 보지 않았던 새로운 의구심이, 전혀 마왕답지 않은 마왕과 함께 생활하며 디오의 마음 한편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묻지.”」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넌 누구지?”」
「“서쪽의 마왕.”」
「“정말로 그게 전부인가?”」
「“다른 쪽의 대답 역시도 이미 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디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도 쉽게 납득이 가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들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
「“……그런가. 알았다. 그동안 고마웠다.”」
「“서로 죽고 죽일 사이에 감사는 무슨.”」
「마치 가벼운 농담처럼 뱉어진 말. 그러나 그 말은 디오에게 있어서 결코 농담이 될 수 없었다.」
「“보답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주지.”」
「그러나 디오는 스스로 내뱉은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었다.」
「“바라던 바야.”」
「시간은 또다시 흘렀다. 비록 기간이 길지는 않았으나, 체감상 이곳에 머문 지도 어느덧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고 느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드디어 디오가 이곳을 떠날 때가 다가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늘인가.”」
「우습게도, 떠나기 직전까지 디오가 지켜봐 온 마왕의 생활은 그 이름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게 평화롭기 짝이 없었다. 그동안 서쪽 국경에 온갖 힘을 쏟아 넣고 있는 인간들이 머저리처럼 느껴질 만큼.」
「“배웅은 필요 없겠지?”」
「마왕의 질문에 디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죽일 힘을 얻으러 떠나는 용사를 배웅하는 마왕의 모습이라…… 모르고 본다면 그만한 촌극도 없을 것이다.」
「“그것도 꽤 우스운 광경이겠지.”」
「“하긴.”」
「한 걸음. 마왕의 성에서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던 디오가 갑작스럽게 발걸음을 멈추고는 뒤돌아섰다. 그리고 처음으로 마왕에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용사가 마왕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질문에 가까웠다.」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건가?”」
「“재밌는 질문이네.”」
「그렇게 말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질문에 흥미롭다는 듯이 디오의 반응을 살핀 마왕이 가볍게 웃어 보이고는 말했다.」
「“당연히 두렵지.”」
「“……두렵다고?”」
「지금까지 보여 온 언행과는 전혀 맞지 않는 대답. 디오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해가 가질 않는군. 그런데도 나한테 죽으려는 건가?”」
「“그럴 운명이니까.”」
「당연하지만, 디오는 운명론자와는 거리가 먼 타입의 사람이었다. 아니, 디오와 같은 곳에서 자라난 사람이라면 응당 그러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디오에게 있어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운명 같은 말이 쉽게 와닿을 리가 없었다.」
「“……운명이라고?”」
「“다른 말도 쓸 수 있겠지만, 나는 이 말이 마음에 들어. 로맨틱하잖아?”」
「또 장난인가. 디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쉽게 장난으로 넘기지 못하는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지.”」
「그리고 마침내 떠나야 할 때가 다가왔기 때문일까.」
「디오는 지금껏 마음속 깊은 곳에서 꺼내기 두려워했던 말을 천천히 꺼냈다.」
「“키리엘과는…… 무슨 관계지?”」
「마왕은 디오의 질문이 굉장히 의외라는 듯이 대견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이내 천천히 그의 곁에 다가왔다.」
「“그건 말이야…….”」
「마왕이 여유롭게 웃고는 디오에게 속삭였다.」
「“스포일러야.”」
「“뭐?”」
「“스포일러라고. 알아듣기 어려운 말은 아니었을 텐데? 그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직접 알아봐.”」
「자신이 어떤 결심을 하고서 한 질문인지도 모르면서 되돌아온 시답잖은 장난질에 디오는 온몸을 부들거릴 수밖에 없었다.」
「“너는…… 끝까지…….”」
「“화나지? 그러면 죽이러 와. 꼭.”」
「그것은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보라는 배짱이 아니었다. 명백한 진심. 그리고 그 순간, 마왕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라고? 나를 아주 우습게 본 모양이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지?”」
「“너랑은 관계없어. 갈 길이나 가.”」
「그러나 디오는 마왕의 그러한 갑작스러운 변화에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그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 거침없는 마왕의 발걸음에 디오는 저도 모르게 마왕을 붙잡고서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그리고서 마주친 마왕의 표정은 마치 분노와 환희를 동시에 머금은 것처럼 느껴지는 기묘한 표정이었다.」
「마침내 마왕의 입이 열렸을 때, 디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현피 뜨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