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Chapter 17: 개연성의 마왕 (3)
물론, 아무리 돈이 좋다 해도 한계는 있는 법.
「현재 적립된 후원금: 1,451,200G」
비록 아직은 그 바닥이 드러나지 않고 있었으나, 이런 의미 없는 소모전이 계속된다면 쓰러지는 것은 결국 내 쪽이었다.
‘마냥 시간만 끌 수는 없겠어.’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시간만 끌어 봤자,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과연 그럴까?”
“혹여 전대 용사를 믿고 있는 거라면, 그건 상당한 오산이라고 말해 주고 싶은데.”
그 말처럼, 베른이 온다고 해서 이 상황이 크게 바뀌는 건 아니었다.
아니, 경우에 따라서 베른이 지니고 있는 성검과 용사의 힘을 오히려 빼앗기는 최악의 상황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내가 믿고 있는 게 정말로 그것뿐이었다면 말이다.
“딱히 베른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만.”
“시간 끌어도 소용없대도.”
“사람에 대한 믿음을 좀 가져 봐.”
“시끄럽다.”
그와 함께 몰아치는 마왕의 힘.
콰카카카캉-!
그 힘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파멸뿐이었다.
무엇이었는지도 모를 잿더미가 사방에 흩날렸으며, 산은 뒤집히고 강은 범람했다.
「대다수의 독자가 단신으로 재해를 일으키는 [최종보스]의 절대적인 힘에 전율합니다!」
「당신의 죽음을 바라는 일부 독자가 주목합니다!」
잿더미와 흙먼지보다도 작게 분해된 무엇인가로 이루어진 안개가 자욱하게 일어나자, 그 사이로 마왕의 짧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치웠나?”
그 순간.
「[SSS급 부활 주문] 클리셰가 발동합니다!」
「[SSS급 부활 주문] 클리셰의 효과로, 당신의 모든 체력이 회복됩니다!」
비록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내 몸에 자잘하게 나 있던 생채기들과 그을린 머리카락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안개가 걷힌 후 그 광경을 마주한 마왕의 표정이 더없이 황당으로 물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만.
그토록 혐오하는 클리셰였건만, 본의 아니게 도움을 받게 되니 어째 썩 나쁘게만 여겨지진 않았다.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더니.’
내가 마왕을 향해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표정이 안 좋네. 무슨 일 있었나 봐?”
“……무슨 일이 없어서 그런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나 보지?”
“꼭 무슨 일이 있었으면 하는 사람처럼 들리는데.”
“그것도 제대로 들었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보지?”
마치 새끼라도 꼰 것처럼 배배 꼬인 성격.
꼬인 걸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베른도 한 수 접어 줄 성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였다.
쿵-!
쿠웅-!
제도 쪽에서 울려 퍼지는 우렁찬 발길질 소리.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하던가.
그것은 누군가의 접근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누구일지는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애송이!
거친 기함성과 함께 일어난 성검의 빛이 주변에 퍼져 있던 어둠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왔군.”
어둠이 물러난 자리를 채운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그는 과거와는 다르게 깔끔한 셔츠와 멋들어지게 뒤로 넘긴 머리가 이제 더 이상 그가 방랑자가 아님을 말해 주었다.
전대 용사 베른.
그가 도착했다.
* * *
「대다수의 독자가 [진주인공]의 화려한 등장에 주목합니다!」
「파워 밸런스를 중시하는 한 독자가 드디어 성사된 [진주인공]과 [최종보스]의 격돌에 큰 흥미를 표합니다!」
마왕의 얼굴을 본 베른이 짧게 침을 삼켰다.
“익숙한 얼굴인데, 혹시 그대가 마왕인가?”
“다들 그렇다고 하던데.”
“……역시 그렇게 된 건가.”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말투.
아니, 오히려 확인해야 할 것을 드디어 확인했다는 느낌이 드는 그 말투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그에 대해 물어볼 틈은 없어 보였다.
“디오 녀석은 알고 있나?”
“글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지. 중요한 건, 내가 직접 말해 줄 생각은 전혀 없다는 거야.”
“……재미있군.”
“어쨌거나 잡담이나 나누자고 온 건 아닐 테고, 덤빌 테면 덤벼 봐.”
마왕이 손짓하자, 베른이 오히려 들고 있던 성검을 검집에 넣어 버렸다.
“그거 유감이군. 잡담이나 하러 온 거 맞거든.”
「[진주인공]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이런 상황에서까지 꼬장꼬장한 성격을 유지하는 ‘베른’의 성격에 혀를 내두릅니다!」
마왕이 웃었다.
“그래? 그런데 이거 어쩌나, 나는 당신을 그냥 보낼 생각이 없는데.”
그와 함께 다시 드러나기 시작한 흉악한 기세.
객관적인 전투력으로 보자면, 베른은 상대도 되지 않을 수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태도는 여전히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아서라. 그렇게 까불다가 골로 간 놈들만 세어도 날 밤을 샐 지경이니까.”
“전대 마왕도 그중 하나였겠지?”
베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너…….”
“어때? 내 입을 막을 생각이 좀 들었어?”
“정 죽는 게 소원이라면, 죽여주지.”
그 순간, 방금 전까지의 여유는 어디로 갔는지 베른의 몸에서 흉흉한 기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리기라도 한 것처럼.
“기다렸던 바야.”
그와 함께 일어난 격돌로 주변이 빛과 암흑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의 종말이라도 온 것 같은 광경이었다.
「대다수의 독자가 [진주인공]과 [최종보스]의 파괴적인 격돌에 큰 흥미를 표합니다!」
‘……역시 이렇게 되는군.’
비록 예상한 사태이긴 했으나, 저 베른마저도 여유롭게 도발해 내는 것을 보니 역시 보통은 아니었다.
‘꼴에 알 건 다 안다 이거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베른과 마왕의 격돌은 점차 거세져 갔다.
“……크윽”
“역시 제법이네. 아직까지 살아 있다니.”
“건방 떨지 마라!”
「[수세에 몰린 진주인공] 클리셰가 발동합니다!」
「[진주인공]의 전투력이 [25%] 상승합니다!」
「[진주인공]의 방어력이 [200%] 상승합니다!」
「[진주인공]의 체력 회복력이 [200%] 증가합니다!」
그와 함께 몰아친 어둠이 순식간에 베른의 몸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이내 베른을 집어삼켰던 어둠이 튕겨져 나가기 시작했다.
“소용없다!”
……어째 몸빵 특화 클리셰 같지만, 기분 탓이겠지.
“꽤 튼튼한 것 같은데, 언제까지 버티나 한번 보자고.”
“건방 떨지 말라고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베른이 마냥 버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의 몸에는 확실하게 상처가 쌓이고 있었으며, 성검의 빛도 점차 미약해져 가고 있었으니까.
‘아직인가?’
이대로 내버려 두면 베른의 패배는 이미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때문에 지금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수였다.
‘조금 더 굴릴 필요가 있겠군.’
내가 슬쩍 말했다.
“퇴물 용사도 아직 처리하지 못하다니. 마왕도 별거 없군.”
격렬한 전투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들었는지, 마왕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뭐?”
“아, 들었어? 네가 들은 게 맞을 테니 되물을 필요는 없어.”
이건 당장 이 상황을 뒤집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었지, 결코 베른의 꼬장꼬장한 성격 때문에 엿 먹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도발당한 최종보스] 클리셰가 발동합니다!」
「[최종보스]의 전투력이 [100%] 상승합니다!」
「[최종보스]의 방어력이 [250%] 하락합니다!」
「[최종보스]가 치명적인 일격을 당할 확률이 상승합니다!」
“……응원해 줘서 고맙군!”
“아, 들었어요? 농담인 거 아시죠?”
“퇴물 용사한테 농담을 받아들일 아량이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베른의 빈정거림이 스쳐 지나갔으나, 어차피 고작 저 정도의 효과로 이 싸움이 뒤집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니, 오히려 불리해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끄윽!”
끝없는 어둠이 베른을 몰아붙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검은 여전히 그 빛을 발했으나, 정작 사용자인 베른의 몸은 어둠에 사정없이 갉아 먹히고 있었다.
“이만 포기하면 편하게 해 줄 생각도 있어.”
“……싸구려 농담을 보니, 유머 감각이 형편없군.”
“굳이 벌주를 마시겠다면야.”
“끄흐윽!”
베른의 상태는 이제 거의 한계까지 다다른 것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늦는군.’
어차피 매를 맞는 것은 내가 아니었으니까 큰 상관은 없지만 말이다.
내가 슬쩍 양손을 모아서 외쳤다.
“힘내요, 베른!”
“……말이나 못 하면!”
아직도 말할 여유가 있는 걸 보니, 겉보기와는 다르게 죽을 지경까지는 아닌 모양.
그렇다면 내가 몰아붙여 줄 수밖에.
“베른, 저는 믿고 있어요. 당신이라면 비장의 수를 써서 마왕을 무찌를 것이라는 걸.”
그 말에 반응한 것은 오히려 마왕 쪽이었다.
“비장의 수?”
내가 혼신의 연기력을 담아서 외쳤다.
“아차!”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발연기에 안구 테러를 호소합니다!」
「연극학과 대학원생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형편없는 연기력을 지적합니다!」
능히 연기력 논란이 일어날 만한 연기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낚이는 놈은 존재했다.
“비장의 수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쓰기 전에 짓밟아 주지.”
그래, 너처럼.
그리고 그와 함께 몰아치는 어둠을 바라보며 미묘하게 울상을 지은 베른의 표정.
“……내가 이기길 바라는 거 맞지?”
내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그러면 나도 모르는 그 비장의 수라는 것 좀 알려주는 건 어때?”
“아, 없었어요? 난 또…… 당연히 하나쯤은 있는 줄 알았죠.”
“……내가 이 자리에서 살아남지 못하기를 바라야 할 거다.”
“꼭 누가 들으면 반드시 살아남아서 저한테 해코지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아닌 것 같나?”
아무튼, 꼬장꼬장하기는.
“끄으윽!”
그 순간, 다시 한 번 일어난 격돌과 함께 베른의 몸에서 실핏줄이 터져 나갔다.
이제는 명백한 한계라는 증거.
「대다수의 독자가 [진주인공]의 위기에 주목합니다!」
「대다수의 독자가 [진주인공]이 위기를 헤쳐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말은 즉,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이들이 도착할 때가 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쐐애애앵-!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아든 화살 한 개.
놀랍게도, 그 화살은 마왕의 힘을 몰아낸 것도 모자라서 성검과 같은 신성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뭐지?”
마왕이 흩뿌리던 힘을 거두고는 조용히 말했다.
“……지금 이 싸움에 끼어들 이는 더 이상 없을 텐데.”
“글쎄,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말투로군. 아니…… 설마 네가 부른 건가? 누구를 부른 거지?”
“누구긴.”
대체로 모든 이가 그렇겠지만, 원치 않는 조기 완결만큼 끔찍한 건 없거든.
특히 녀석에게라면 더욱더.
그래서 그게 누구냐고?
“신의 뜻대로, 마왕을 처단하라!”
이 소설이 이대로 끝이 나면 가장 곤란한 녀석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