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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이후의 소설 속-68화 (68/164)

◈ 68화 Chapter 17: 개연성의 마왕 (4)

그 빛은 마치 폭풍처럼 어둠을 몰아내며 나타났다.

“마왕을 처단하라!”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휘황찬란한 광채.

그 찬란함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사이, 어느덧 하늘에서 진짜 빛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빛을 머금고 있는 수백 수천 개의 화살 비였다.

콰가가가가-!

화살에는 눈이 없다.

그 이야기는 즉, 마왕과 지척에 닿아 있는 베른 역시도 그 범위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미친!”

상황이 그러했으니, 베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드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정신 나간 광신도 녀석들!”

당장이라도 쫓아가서 결단을 내리려는 것 같은 말과는 다르게, 그의 몸은 정직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새 마왕과의 대치고 뭐고 집어치우고 도망칠 채비를 마친 베른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와도 같았다.

「[진주인공]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매섭게 태세변환을 하는 ‘베른’의 행보에 유쾌함을 표합니다!」

베른이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던 그 순간, 쏟아져 내린 빛이 사방으로 비산하기 시작했다.

콰카카카캉!

응당 일어나야 할 흙먼지조차도 지워 버리는 빛.

빛이 쏟아진 후, 그 자리에 남은 것은 그저 파괴뿐이었다.

단 한 존재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이것 봐라.”

그곳에는 더 이상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도, 눈을 가리는 빛무리도 없었다.

그저 고고하게 서 있는 한 존재뿐.

“재미있는데.”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빛무리 속에서도 상처 하나 없는 마왕의 모습이었다.

「대다수의 독자가 대규모 공습에서도 아무런 상처조차 입지 않은 [최종보스]의 모습에 주목합니다!」

‘……역시 이 정도로는 턱도 없군.’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베른은 이미 과거에 마왕을 죽인 적이 있는 존재다.

그런 그가 지금 과거의 힘은 물론이고, 마왕을 무찔렀던 당시의 경험마저도 온전히 가지고 있다.

즉, 용사로서는 이미 한계치까지 성장한 상태라는 뜻.

그런 베른이 결국 패배한 이유는 별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저, 마왕의 힘이 이미 상상을 뛰어넘었을 뿐.

「[최종보스] 버프가 발동 중입니다!」

「[최종보스] 버프 효과에 의해서, [비중]이 없는 모든 존재에 대해서 [일격필살]을 행사합니다!」

“이제…… 내 차롄가?”

마치 이 상황이 즐겁기라도 한 것처럼 한껏 머금어진 미소.

그 아름다운 얼굴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뜻대로!”

그와 함께 달려드는 기마병들의 모습이 마왕의 손짓 한 번에 바스러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이 먼지뿐이었던 것처럼.

“고작 이따위 것들로 내 발목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자신만만하게 말하기에는 조금 이르지 않나 싶은데.”

“굳이 과정을 볼 필요도 없는 결과도 있는 법이지.”

“그렇다면 네가 지겠군.”

“당연히 내가 이길 거라는 말이었는데…… 어려웠니?”

「키보드워리어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제1차 아가리파이터 대전]의 결과가 무승부로 났음을 선언합니다!」

아무튼…… 한마디를 안 져요.

물론, 내가 고작 말싸움이나 이기자고 여기에 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지.

“뭐, 어쨌든 그건 알아서 하시고. 그러면 나는 이만.”

“뭐?”

제아무리 싸움 구경 불구경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다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나한테 화가 미치지 않을 때의 이야기.

“불똥 튀는 건 싫거든.”

더군다나 내가 끝까지 이 자리에 남아 있으면 기껏 부른 원군의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어차피 이길 싸움이 아니었다는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수의 독자가 당당히 도주를 선포하는 당신의 졸렬함을 맹렬히 비난합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일부 독자가 그럴 줄 알았다면서 당신의 도주를 응원합니다!」

너무나도 당당한 도주 선언 덕분일까, 마왕에게서 명백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

“누가 가게 내버려 둘 줄 알고!”

그와 함께 일어나는 마왕의 힘.

콰카카카캉!

그것은 닿는 모든 것을 분쇄해 버리는 파괴적인 힘이었다.

말 그대로 재앙.

그 어마어마한 위력 앞에서는 신의 종자를 자처하는 데우스 교단의 성기사들 역시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끄아아악!”

“시, 신이시여!”

그 위력이 그러했으니, 나와 마왕 사이에 어떤 장해물이 있는지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맞을 리는 없었지만.

「[행운 매수]를 사용하였습니다!」

콰카카카카-!

그리고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

“미, 미친!”

그 목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어느새 내 뒤까지 도망쳤던 베른이었다.

“…….”

언제 저기까지 튀었대?

성검을 뽑아 든 채로 온몸에서 후끈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베른의 모습.

그래도 꼴에 썩어도 준치라는 건지, 불의의 일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즉사하는 추태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를 향해서 툭 내뱉었다.

“발걸음이 굉장히 빠르시네요.”

그러자 베른이 억지웃음을 한껏 지으며 말했다.

“평소에 산책을 게을리하지 않거든.”

“결단력도 굉장하시고요.”

“찰나의 틈이 결국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법이지.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노하우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방금 전의 공격은 예상외였나 보네요.”

“전장에서 검을 맞댄 상대의 공격은 피하지 않는다. 상대에 대한 예우라고 볼 수 있지.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끝을 보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쉬울 따름이야.”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비아냥거림에 굴하지 않는 [진주인공]의 성격에 유쾌함을 표합니다!」

「심판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판정패를 선언합니다!」

……아무튼, 이놈이나 저놈이나 말은 잘해요.

“그러면 가던 길 가세요. 여기는 제가 마무리할 테니.”

베른은 지금 이곳에서 잡혀서는 안 된다.

그는 이 소설의 끝을 담당하는 핵심 키이자,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패였다.

만약 그가 고집을 부리겠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베른이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그럴래?”

마치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내 기대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만약 용사 협회가 존재했다면, 진즉 제명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졸렬함이 아닐 수 없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네 싸움이었지. 그러면 나는 이만.”

“…….”

「대다수의 독자가 망설임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진주인공]의 유쾌한 행보에 사이다를 표합니다!」

마치 바람이 지나간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진 베른의 모습.

가히 서쪽 마왕의 영토 정중앙에 홀로 떨어뜨려 놓아도 능히 살아남을 법한 생존력이었다.

뭐, 어쨌거나 베른이 여기서 잡히는 것은 나도 원하지 않는 바이긴 했다.

조금…… 아니, 많이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나중에 열 배로 굴려주지.’

내가 그렇게 조용히 다짐하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마왕과 데우스 교단의 종자들이 끊임없이 서로에게 저주와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죽어라!”

“사악한 마왕 녀석!”

“신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한다! 물러서지 마라!”

“방해하지 마라.”

과연 광신도는 광신도인지, 마왕의 손짓 한 번마다 수백에 가까운 숫자가 휩쓸려 나가는 와중에도 두려움 한 조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 그러면…….’

제아무리 [작가] 놈이 직접 나섰다지만, 이곳에서의 마왕은 사실상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그를 해할 수 있는 것은 [설정]상 ‘성검’을 지닌 ‘진정한 용사’뿐.

더군다나 녀석의 목적이 당장 마왕이 베른을 손에 넣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으니, 베른이 떠난 지금은 사실상 녀석의 목적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작가] 놈의 바람일 뿐.

‘그걸로는 부족하지.’

어차피 마왕이 이곳에서 발목을 잡혀 봤자, 나에게 있어서는 그저 시간 끌기에 불과했다. [작가] 놈이 보낸 개들이 모조리 죽고 나면 마왕은 곧바로 나와 베른을 찾아올 테고, 그때는 정말로 위험해질 수 있었다.

결국 모든 문제는, ‘서쪽의 마왕’이 본래의 역할에 맞지 않게 자살을 희망한다는 점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였다.

그렇다면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한다면 바로 이곳에서 취하는 것이 옳았다.

나도 나름대로 고생했는데, 최소한 얻는 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좋겠군.’

시선을 옮기자, 전장에서는 여전히 학살 아닌 학살이 일어나고 있었다.

굳이 이런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얼핏 보면 일방적인 학살로 보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학살당하는 대상인 교단의 병사들에게서 그 어떤 물러섬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자토스.”

[끼잇!]

“먹어 치워.”

이 전장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에 비해서 어떤 한 가지 감정만은 과할 정도로 충만했다.

믿음.

바로 그것이었다.

[끼이잇!]

아자토스가 기쁨의 교성을 내지르며 은밀한 포식을 행하자 군대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지기 시작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들의 행동을 지탱하던 유일한 것이 사라졌으니,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있을 리 없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싸워야 할 것 같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아.”

“마왕과 싸워야 한다니, 이건 미친 짓이야.”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졌어.”

상황이 그러했으니, 마왕과 신의 군대의 대치 사이에 벌어진 작은 틈으로 내가 들어가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시금 나와 재회한 마왕이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 웃었다.

“갑자기 공세가 둔해졌다 싶더니, 네 짓인가 봐?”

“너무 고마워서 눈물 날 지경이지?”

“안 그래도 직접 찾아가려고 했는데, 굳이 먼저 와 주니까 고맙네. 보답으로 살살 죽여줄까 하는데. 어때?”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야.”

「대다수의 독자가 굳이 위험으로 다시금 돌아온 당신의 행동에 대해서 고구마를 표합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당신을 믿고 당신의 행동을 주시합니다!」

“내가 굳이 여기에 다시 온 건, 마지막으로 너에게 한 가지만 경고해 주기 위해서야.”

“나한테 그런 게 필요해 보여?”

“아마 필요할걸?”

“웃기지도 않은 소리. 더 이상 네 세 치 혓바닥을 들어주는 것도 지겨워. 이만 죽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던 마왕의 몸에서 검은색 오라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성격도 급하긴…… 네가 아직 뭘 모르는 모양인데, 내가 이런 말을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

“시끄럽다니까.”

흉흉하게 일어난 검은색 오라가 당장이라도 나를 삼킬 것처럼 달려온 순간, 내가 짧게 말했다.

“설정에 먹히지 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다.”

그와 함께 멈춰 선 검은색 오라.

“……그게 무슨 말이지?”

“무슨 말이긴.”

모든 이야기에 등장하는 점쟁이의 점괘가 으레 그렇듯이, 누군가의 염려 섞인 충고는 의외로 가장 강력한 저주가 되는 법이다.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잠깐, 뭐야 이 기억은?”

마치 처음부터 그런 목적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어디 한 번, 실컷 고민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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