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차 이후의 소설 속-70화 (70/164)

◈ 70화 Chapter 17: 개연성의 마왕 (6)

「“……뭐?”」

「그러나 디오에게 들려온 것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죽어.”」

「짤막한 선고. 그와 함께 디오의 주변 배경이 온통 회색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마치 그를 배척하는 것처럼.」

「“……왜?”」

「마왕이 용사를 죽이는 것.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디오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정을 느꼈다. 디오가 넋을 놓은 채 그대로 순탄하지 못했던 삶의 막을 이만 내리려던 그 순간, 기대하지도 않았던 구원자가 그의 등을 떠밀었다.」

「“용사님, 피하십시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디오가 자신의 등을 떠민 성직자를 돌아보았을 때, 그 성직자의 운명은 이미 잿빛으로 변한 뒤였다. 자신으로 인한 희생. 디오는 그제야 입술을 잘근 깨물며 자신의 적을 응시했다.」

「“……나를 가지고 놀았군.”」

「“꽤 재미있는 유희였지. 아니, 유희였다고 생각했던가?”」

「어딘가 이상한 대답. 그러나 지금 디오에게 있어서 그런 사소한 것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네 소원대로, 너는 내 손으로 반드시 죽여주지.”」

「마왕이 웃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나를 죽이려면 성검과 용사의 힘이 필요하다고. 그 둘 중 어느 것도 없는 반푼이도 되지 못하는 너에게는 명백하게 무리야.”」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약속하지. 우리가 다음에 만나면, 너는 내 손에 죽는다.”」

「“가능하겠어?”」

「마왕의 비웃음 섞인 물음에 디오가 주먹을 꽉 쥐며 대답했다.」

「“……물론.”」

「“역시 심지가 곧다니까.”」

「마왕이 손을 뻗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 때의 얘기지만.”」

「그리고 마왕에게서 일어난 힘은 마치 지금까지 했었던 모든 일은 장난에 불과했다는 듯이 압도적이었다. 그 힘의 파편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졌고, 공기가 타들어 갔다.」

「“큭!”」

「그 광경을 바라보던 디오는 텅 빈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재빨리 바닥에 널린 시체더미에서 검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그가 검을 집어 들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미약한 빛이 그의 검신에 깃들었다.」

「“이건…….”」

「용사인 그가 이 빛을 모를 리가 없었다. 명백한 신의 힘. 비록 진짜 성검에 비하면 태양 앞에 반딧불이 마냥 미약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의 그에게는 이마저도 다루기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 마침내 마왕의 모습이 드러났다.」

「“항상 깨지고, 부서지고, 배신당하는 그런 지긋지긋한 삶이라면 내 손으로 이만 끝내줄게.”」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항상 지켜봤으니까.”」

「의미심장한 말. 그 의문에 대한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디오였으나,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와라.”」

「“사양하지 않을게.”」

「그리고 몰아치는 공간의 일그러짐은 설사 디오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진짜 성검이라 할지라도 상대조차 안 될 수준이었다. 태양 빛조차도 가려질 자욱한 잿더미 속에서 반딧불이의 불빛이 소용 있을 리가 만무했다.」

「“끄으윽!”」

「처음으로 흩어진 것은 잿빛에 대항하던 데우스 교단의 검이었다. 그다음으로는 피부. 그다음으로는 피부 아래쪽의 근육이 사정없이 흩어져 갔다.」

「“으그극!”」

「“……이것 또한 너에게 있어서 그다지 나쁜 마지막은 아닐 거야.”」

「여전히 알 수 없는 마왕의 말을 마지막으로, 이를 악다문 디오의 잇몸뼈가 드러나며 그의 온몸이 바스러지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멈춰라.]」

「마치 모든 것에게 멈추라 명하는 것 같은 절대적인 목소리. 그것은 폭풍이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마왕이여.]」

「디오는 이미 뼈가 드러난 자신의 두 손을 늘어뜨리며 흐려진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존재들은 보통 사람이 한 번 보기도 어렵다는 존재들이었다.」

「“……드래곤?”」

「그저 한두 마리 정도였다면 디오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용사인 그에게 있어서 드래곤을 만나는 것은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나타난 드래곤의 숫자는 무려 수십 마리에 달했다. 마치 이 세계에 살고 있는 드래곤을 모조리 다 모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라. 그대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인지.]」

「“그건 너희들이 끼어들 일이 아닐 텐데?”」

「[끼어들 일이 아니다라…… 혹여 조약을 잊은 것인가? 잊었다면 다시금 상기시켜 주지. ‘서쪽의 마왕은 자신의 영토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마왕과 우리들이 맺은 조약일 텐데. 현세대의 마왕이여.]」

「마왕이 웃었다.」

「“조약이라…… 맞아. 그런 기억도 있었지. 그래서 뭐?”」

「[……결국 그 추악한 본능을 드러내고야 마는가. 너의 위치를 자각하라.]」

「“새삼스럽게 뭘.”」

「[그렇다면 각오는 이미 되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죽을 각오라면 아직 멀었는데? 너희 주제에 그럴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그 순간, 디오의 귓가에 정체 모를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정체 모를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 목소리는 다름 아닌 눈앞에 있는 드래곤의 목소리였으니까.」

「-[용사여.]」

「“……드래곤인가?”」

「-[듣기만 하라. 지금 우리들은 마왕을 막을 수 없다. 아니, 정확히는 죽일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옳겠지. 마왕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검과 그것을 다루는 용사뿐.]」

「“나를 돕겠다는 건가?”」

「-[이 자리를 피하라. 피해서 훗날 너의 의무를 완수해라. 그것이 지금에서야 우리가 나서는 이유이니.]」

「“……그 이야기는 당신들은 죽겠다는 건가?”」

「드래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우렁찬 포효 소리가 울려 퍼졌을 뿐.」

「[크아아아앙!]」

「수십 마리의 드래곤이 산이라도 삼킬 것처럼 거대한 아가리를 벌린 채로 브레스를 토해내는 모습은 그야말로 절경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런 광경에도 불구하고 마왕은 여전히 은은한 웃음을 머금을 뿐이었다.」

「“꽤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어. 자신들이 정말로 이 세계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으스대는 도마뱀들의 꼴을 보는 게.”」

「[크오오오!]」

「그리고 쏟아져 내리는 파멸의 빛. 그러나 그 거창함에 비해서 결과는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이지…… 시시하기 짝이 없어.”」

「마치 먼지를 털어내듯이 손을 저은 마왕의 가벼운 동작. 그러나 이후에 일어난 일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끄오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일제의 브레스와 언제 당했는지 모른 채로 양 날개를 잃고서 추락하는 드래곤의 거체. 마치 응당 일어나야 할 현실의 인과조차도 가볍게 생략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현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을 일으킨 마왕이 가볍게 웃었다.」

「“용사를 도망치게 하려는 수작이구나.”」

「[알았다 한들, 이미 늦었다. 너의 죽음은 우리의 몫이 아니니.]」

「참으로 얄팍한 수작. 고작 그런 수를 서쪽의 마왕이 읽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설마 내가 몰라서 당해 주었다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

「서서히 물들기 시작한 마왕의 끝없는 악의를 머금은 미소에 드래곤이 짧게 침묵했다.」

「[설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가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었다. 마왕이 어째서 단숨에 용사를 죽이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유. 그들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모든 것이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들어라.”」

「그녀가 머금은 미소는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순수한 악의를 머금은 것 같았다. 공기조차도 탁하게 만드는 그 악의에 반응한 드래곤들이 마치 본능처럼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끄오오!]」

「[그만두어라!]」

「드래곤 로드의 절규 섞인 만류가 울려 퍼졌으나, 이미 이성을 잃고서 달려들었던 열 채의 드래곤의 몸은 주인을 잃고서 허무하게 추락했다. 마왕의 목적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너희들은…… 항상 골칫덩이였어. 용사가 위험에 빠질 때면 구세주처럼 나타나고, 길을 잃고 헤매는 용사에게 현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조언을 해 주며, 마지막으로 그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자처했지”」

「그 이상한 읊조림은 마치 과거의 얘기 같으면서도 흡사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바로 그거야. 너희가 살아 있으면 안 되는 이유.”」

「마왕의 말에 드래곤 로드가 짧게 침묵했다. 이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던가? 처음부터 함정에 빠진 것인가? 아니, 만약 끝까지 나서지 않았더라면 결국 용사는 죽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결과는 정해져 있었군.]」

「“그저 순서의 차이라고 해 둘까? 너희가 먼저 죽든지, 아니면 용사가 먼저 죽든지.”」

「드래곤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렇다면 나쁠 게 없지 않은가.]」

「절망이 아닌 희망을 머금은 미소. 그러나 그러한 희망마저도 처참하게 짓밟는 순수한 악의가 그의 앞에 있었다.」

「“과연 드래곤의 마지막 대사다운 멋진 말이야. 그러면 모처럼 나도 멋진 말 좀 해 볼까?”」

「마왕이 선포했다.」

「“오늘로써, 용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 * *

베른이 물었다.

“새로운 국면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전에, 챙기러 갈 게 있습니다.”

“앞 잘라먹고 말하는 건 여전하군. 혓바닥을 다져서 조금 길게 만들면 되려나?”

마치 당장이라도 실행에 옮길 것처럼 성검 손잡이를 쓰다듬는 베른의 모습.

모양새가 그러했으니,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되묻게 되는 게 스스로도 우스울 따름이었다.

“농담치고는 살벌하군요.”

“내가 농담이라고 했던가?”

“그러면 농담인 걸로 해 두고, 어서 움직이죠.”

내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돌리자, 뒤통수에서 베른의 투정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대답까지 잘라먹네. 야! 같이 가!”

「심판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판정승을 선언합니다!」

* * *

어느새 황궁 바깥까지 나를 쫓아온 베른이 물었다.

“그래서 챙길 게 뭔데?”

“곧 나타날 겁니다.”

“뭐?”

내가 지금껏 착각하고 있었던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이 세계를 부수려는 것이, 꼭 [악]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는 사실.

바로 이 점이 맹점이었다.

세계를 부수려는 행위는 곧 그만한 반발을 일으킨다.

실제로도 그 때문에 [작가] 녀석의 개입이 과할 정도로 심해졌고, 이후 [하차자]까지 나타나서 내 골머리를 썩게 했다.

그렇다면 세계를 부순다는 이 천인공노할 행위가 [악]이 되지 않고, 정당성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그 답이 바로 내 앞에 있었다.

“……아인즈 반?”

신체 곳곳에 뼈가 드러날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 되어 있는 [주인공], 용사 디오의 모습.

녀석이 어디서 도망쳐 왔을지는 뻔했다.

“나를 죽이러 기다리고 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아인즈 반’이라는 존재가 [주인공]인 디오 녀석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니다.

“내가 너를 도와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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