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Chapter 18: 용사 (2)
그렇게 도주행으로 시작된 여행길은 시작부터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다.
“……베른, 혹시나 해서 묻는데 여기가 어딘지 알아요?”
“낸들 아나.”
“정말 몰라요?”
“앞장선 건 너면서 왜 나한테 그래?”
도대체 어디부터가 북쪽이고, 어디부터가 제국의 국경인지.
내가 알고 있는 이 세계의 주민 중에서 가장 박학다식에 가까운 인물인 베른조차도 명확한 경계선을 모를 정도라면, 북쪽은 정말로 미지의 땅이 맞는 듯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제도를 떠난 후 언제부터인가 주변의 날씨가 싸늘하다 못해 추워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이곳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장소라는 것을 자연이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디오가 처음으로 말문을 연 것은 바로 그러한 때였다.
“……제국은 확실히 벗어난 것 같군. 그렇다면 이제 말해 주었으면 하는데? 나를 돕는 대가로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글쎄? 한 번 맞춰 봐.”
“너희들이 하는 어쭙잖은 만담에 나까지 끼어 들이고 싶은 모양인데, 혓바닥이 갈라지고 나서도 여전히 그런지 지켜보지.”
성격도 급하긴.
그렇게 말하는 디오의 언행은 정말로 장난 한 번 더 쳤다가는 혓바닥을 갈라 버릴 기세였다.
물론, 그게 실제로 가능한지에 대한 여부는 둘째치고서 말이지만.
“함께 해 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어.”
“……일?”
대체 무엇을 떠올린 건지, 일이라는 단어 한 가지가 튀어나오는 순간부터 눈에 띌 정도로 디오의 얼굴이 흉악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표정 풀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아닐 테니까.”
“미리 말해 두지만, 나를 이용해서 무고한 이들에게 피해를 줄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마라. 그때 가장 먼저 너를 막아서는 건 내가 될 테니까.”
“명심해 두지. 하지만 내 제안은 너에게 있어서도 그다지 나쁜 이야기가 아니야.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볼 수 있지.”
“그렇다면 한 번 들어보도록 하지.”
마음에 안 드는 놈.
꼴에 주인공이라는 건지, 이럴 때조차도 있는 폼 없는 폼은 혼자서 다 잡는다.
더더욱 기가 막힌 것은, 대부분의 독자는 또 이런 걸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다수의 독자가 간악한 당신의 간계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 [주인공]의 우직함에 안도감을 표합니다!」
「[주인공]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당신의 행동을 주시합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어차피 호구는 호구라며 [주인공]의 허세에 혀를 찹니다!」
한 번의 침묵이 지나간 후.
내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신을 죽일 거다.”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충격적인 발언에 주목합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당신의 충격적인 발언에도 불구하고 그러려니 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중2병 보균자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에게 자신의 오른손에 감춰진 흑염룡을 양도합니다!」
제아무리 디오라 할지라도 이 말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는지, 굳어 있던 디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신을…… 죽인다고?”
“그래.”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냉정을 찾은 디오의 표정이 싸늘하게 물들었다.
“북쪽으로 향하는 이유가 이런 거였나…… 고작 이런 미친 소리나 하자고 나를 끌어들인 건가?”
“미친 소리가 아니야.”
“자기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미친놈은 없는 법이지. 더 들을 이야기는 없겠군. 나는 이만 가겠다.”
내가 가볍게 말했다.
“그러면 가시던가.”
“가라고 하면 못 갈 줄 아는군. 그런 개수작질에는 넘어가지 않아.”
「[주인공]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당신의 개수작질을 간파한 [주인공]의 발언에서 사이다를 표합니다!」
사이다는 무슨.
어차피 디오는 이미 내 손에 잡혀 있는 물고기나 다름없다.
물고기가 열심히 발버둥 쳐서 손바닥에서 탈출해 봤자, 손바닥 바깥의 세상은 이미 강이 아닌 싸늘한 흙바닥일 뿐이다.
그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그런 흙바닥 말이다.
“그 이야기는, 그 여자를 포기한다는 말로 해석해도 되겠지?”
“……그녀도 내가 네 손에 들린 장난감처럼 놀아나는 걸 원하지는 않을 거다. 거래는 여기서 끝이다.”
제법 확고한 거절 의지였으나, 어차피 거기까지일 뿐.
“그래? 역시 너도 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장기 말 중 하나에 불과했었어. 어쩔 수 없지. 용사의 운명이란 응당 그런 것이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그의 눈동자에 비친 그것은 명백한 동요였다.
이제 남은 일은 흙바닥에 떨어진 길 잃은 물고기를 건져 올리는 것뿐이었다.
“할 말 없다며? 이만 갈 길 가시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옛날이었다면 저 위압감 넘치는 모습에 당장 없는 말이라도 지어내서 말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지금의 디오는 성검은커녕 가지고 있던 용사의 힘마저도 대부분 잃은 상태.
절대로 저런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서로 묻는 답에 친절하게 답해 주는 그런 사이였던가?”
“뭐?”
“아! 맞다. 조금 전까지는 그랬었지.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제부터는 아니야. 누구의 요청으로 거래는 이미 끝났으니까.”
“어이가 없군. 죽고 싶은 건가?”
이내 흉흉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디오의 기세.
그러나 그 기세는 과거에 보았던 대적 불가능에 가깝던 흉악함과는 현저하게 거리가 있었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내 입가에 비웃음이 번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럴만한 능력은 되시고?”
그 순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뻗어진 디오의 주먹이 마치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 주먹은 이내 누군가의 손에 너무나도 쉽게 붙잡혔다.
“……막았어?”
“이게 무슨 짓이야?”
적대감이 한껏 드러난 채로 날카롭게 울려 퍼진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하이디였다.
그리고 그 사실은 디오에게 예상치 못했던 정신적 충격을 가했다.
“내 주먹을 이렇게 쉽게…… 그것도 여자아이가…….”
제아무리 용사의 힘을 대부분 잃었다지만, 하이디처럼 가녀린 소녀의 손에 진심으로 뻗은 주먹이 이렇게 쉽게 가로막힌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물론, 하이디가 정말로 보이는 것 그대로 가녀린 소녀였다면 디오가 용사의 힘이 있건 말건 관계없이 겉보기에 보이는 신체적 차이만으로도 싸움이 성립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이디의 본질은 성년을 지난 마족.
지금 디오의 수준으로는 [주인공] 버프를 제아무리 받아도,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내 말 안 들려? 이게 무슨 짓이냐니까.”
“도대체 어떻게…….”
자신의 말이 무시당했다는 것에 화가 난 하이디가 잡고 있던 손을 가볍게 비틀자, 이내 디오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그와 함께 형편없이 내동댕이쳐진 디오의 몸이 형편없이 바닥을 굴렀다.
“별것도 아닌 게.”
바닥에 구른 것은 그의 너덜너덜해진 몸뚱어리뿐만이 아니었다.
「다수의 독자가 [주인공]의 비참한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합니다!」
「[진주인공]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주인공]의 비참한 말로에 통쾌함을 표합니다!」
「[미소녀]를 지지하는 소수의 독자가 [주인공]을 단숨에 제압한 ‘하이디’의 모습에 열렬한 환호성을 보냅니다!」
바닥을 넘어서 나락으로 추락하는 평가.
만약 내가 디오였다면 그대로 바닥에 코 박고 죽고 싶을 정도로 비참한 광경이었다.
“이제 그만해, 하이디.”
“괜찮아?”
“응. 걱정해 줘서 고마워.”
가볍게 하이디의 머리를 쓰다듬은 내가 쓰러진 디오의 곁에 다가갔다.
내가 다가섰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형편없이 널브러진 디오의 몸에서는 그 어떤 미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주인공으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많은 것을 잃었을 뿐.
“쪽팔리지?”
“…….”
“괜찮아. 처음에는 다 그래.”
“…….”
“아마 예상하지 못했을 거야. 저런 가녀린 소녀에게 명색이 용사인 네가 이렇게 형편없이 깨질 거라고는.”
“깨, 깨지기는 누가……!”
그제야 고개를 든 디오의 변명은 그야말로 처절하기 짝이 없었다.
「다수의 독자가 [주인공]의 비참한 꼬락서니에 참담한 심정을 금치 못합니다!」
「[주인공]을 지지하는 일부의 독자가 당신에게 적개심을 가집니다!」
「[주인공]을 지지하던 소수의 독자가 더 이상 [주인공]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찌질한 면모를 선보였습니다! 등장인물, ‘용사 디오’의 [비중]이 감소합니다!」
「현재 비중: 28.3%」
제아무리 자업자득이라지만, 이쯤 되면 조금 불쌍해질 지경.
‘이제 괜찮겠군.’
채찍은 때릴 만큼 때렸으니, 이제 당근 반쪽을 줄 차례였다.
“이해해. 보통은 예상하지 못하지. 도대체 어떻게 저 가녀린 소녀가 몇 배는 덩치가 큰 데다가 용사인 너를 가볍게 제압할 수 있었을까?”
대화의 흐름이 바뀌자, 그제야 내 의도를 알아챈 디오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지? 정말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원하는 건 아닐 텐데.”
바닥에 먼지 묻은 카펫처럼 널브러져 있어도 과연 주인공은 주인공인지, 눈치 하나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너는 네 선택이 언제나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선택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
“그게 무슨 말이지?”
“모든 결과에는 언제나 그에 합당하는 원인과 이유가 있다. 그걸 인과율이라고 하지.”
이곳에서는 [개연성]이라고도 말하지만 말이다.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라.”
“네가 마왕을 죽이려고 한 이유는 뭐지?”
“내가 용사이기 때문이다.”
“그게 아닐 텐데.”
내 말에 몸을 움찔한 디오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진정한 목적.
그것은 세계평화나 정복 같은 거창한 야망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소소한 이유.
“……내가 돌아가기 위해서.”
“그래, 바로 그 이유지. 그런데 그 점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해 본 적 없어?”
“이상하다니?”
“어째서 용사인 네가 마왕을 쓰러뜨리면 돌아갈 수 있다고 확신하는 거지? 꼭 누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 순간, 디오의 얼굴이 망치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무엇인가를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약속을…… 했었다.”
“누구랑?”
디오가 씹어 삼키듯이 말했다.
“……데우스.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자가 자신을 뭐라고 소개했지?”
디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마침내 내뱉어진 그의 말은 여러 가지를 담고 있었다.
“……신.”
그와 함께 디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베른을 향했다.
겉보기에는 그저 뺀질뺀질한 아저씨처럼 보였으나, 그의 정체는 과거에 마왕을 처치했었던 전대 용사.
그라면 무엇인가를 알고 있을 거라는 기대였다.
그 눈빛을 본 베른이 너스레를 떨었다.
“배움을 청하는 학생의 눈빛치고는 너무 매서운데? 무서워서 도망가고 싶을 정도야.”
“베른.”
“알았어.”
내 부름에 그제야 장난기를 거둔 베른이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마치 큰 결심이라도 한 듯이.
“조금…… 옛날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겠군.”
베른이 이제까지는 없던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 주지. 용사와 마왕, 그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