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Chapter 18: 용사 (3)
「그의 기억이 시작된 곳은 어느 이름 없는 수도원이었다. 돌가루가 떨어져 내릴 정도로 낡은 건물과 조미료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싱겁고 맛없는 음식. 그리고 바람만 불어도 찢어질 것 같은 누더기 옷. 마지막으로 언제나 그를 향해서 웃어 주던 수녀의 온화한 얼굴이 그가 알고 있는 세계의 전부였다.」
「“베른. 네 이름은 베른이야.”」
「성검 다이베른에서 따온 이름. 갓난아기였을 적에 수도원 앞에 버려진 그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과분한 이름이었지만, 그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 준 수녀는 항상 그렇게 말했다.」
「“용사가 되렴.”」
「“왜요?”」
「그가 그렇게 되물을 때면, 수녀는 언제나처럼 장난스럽게 말했다.」
「“성공해서 나 호강 좀 시켜 달라고. 고아인 데다 딱히 잘난 것 하나 없는 네가 성공하려면 그것 말고는 없잖아?”」
「“……보통 그럴 때는 다른 말 하지 않아요? 예를 들면 용사가 돼서 혼란에 빠진 세상을 구하라든가, 사악한 마왕을 무찌르라든가. 그리고 저 잘난 거 많거든요? 예를 들면 얼굴이라던가.”」
「“그러면 우리 잘생긴 베른 님. 용사가 돼서 세상을 구하는 김에 나 호강 좀 시켜 주렴?”」
「“……말을 말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베른 역시도 다른 또래의 아이들처럼 용사에 대한 로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을 위협하는 마왕을 무찌르고, 마침내 세상을 구하고 공주와 사랑에 빠진 영웅. 그것이 그가 알고 있는 용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핫! 핫!”」
「그래서일까, 언제부터인가 수도원 안쪽에 있는 공터에서 나뭇가지를 휘두르는 것이 그의 일상이 된 것은.」
「“저거 또 저러네.”」
「“쯧쯧. 베로니카가 또 헛바람을 넣은 모양이야.”」
「“저러다가 말겠지. 뭐.”」
「그렇게 정신없이 나뭇가지를 휘두르다가 지쳐서 쓰러지면, 어느덧 하늘은 검게 칠해져서 달빛을 쏟아내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면 늘 기다렸다는 듯이 수녀, 베로니카가 쓰러진 그의 머리맡에 나타나서는 먹다 남은 빵 조각 몇 개를 그에게 내밀었다.」
「“먹어. 매일 밥도 안 먹고 이러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호강시켜 주고 싶나 봐?”」
「언제나처럼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 늘 애늙은이처럼 굴던 베른이었지만, 그녀의 앞에 서면 어느 순간부터 어린 소년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호, 호강은 무슨…… 그냥 하는 거예요.”」
「“부끄러워하기는.”」
「그렇게 나란히 누워서 말라붙은 빵조각을 입에 털어 넣으며 밤하늘을 지켜보는 것은 어느새 그들에게 있어서 또 다른 일상이 되어 있었다.」
「“예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혹시 내 엄마예요?”」
「“푸훕!”」
「제아무리 베로니카라 할지라도 이번 질문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지, 몇 번의 헛기침을 하고 나서야 외쳤다.」
「“뭐, 뭐? 얘가 지금 수녀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무 잘해 주기에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요.”」
「“그리고 이 얼굴, 이 몸매가 어딜 봐서 애 낳은 아줌마라는 거야?”」
「“……그게 문제였군요.”」
「어차피 베른 역시도 그다지 깊게 생각하고 한 말이 아니었기에 이내 남은 빵조각을 모조리 입에 털어 넣고는 바닥에 드러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달은 마치 한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워 보였다.」
「“나는 언젠가 바깥으로 나갈 거야.”」
「베로니카가 늘 입에 달고 살던 말. 그러면 베른이 할 말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면 아예 여기에 들어오지를 말지 그랬어요.”」
「“여자 혼자서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 수도원에라도 들어와야지. 맛없는 밥, 늘 똑같은 옷, 재미없는 규율. 정말 환상적인 곳이라니까.”」
「“수녀 맞아요? 뭐 이렇게 세속적이야.”」
「“그러니까 어서 성공해서 나 좀 데리고 나가 주렴? 이 세속적인 수녀님은 이 우물 안 세계가 이제는 너무 지긋지긋해요.”」
「바깥세상을 꿈꾸는 수녀. 만약 다른 수도자들이 알았다면 경을 칠 일이었으나, 어차피 그들 사이에 있어서 별로 특별한 비밀도 아니었다.」
「“하는 거 봐서요.”」
「“우리 꼬맹이가 이제 많이 컸네? 흥정도 할 줄 알고 말이야. 나중에 상인이 되려나?”」
「“언제는 용사가 되라더니.”」
「그런 잡담이 끝나면, 언제나처럼 베로니카는 베른에게 수도원 바깥세상의 풍경을 이야기해 주고는 했다. 태어나서 바깥이라고는 수도원 정문 밖에 없는 베른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여행과도 같았다.」
「“예전에 오다가다 제국 남쪽 지방의 국경을 잠깐 들른 적이 있었는데, 너무 더워서 남자들이 웃통을 다 벗고 다니더라니까? 그 구릿빛 근육질…… 어머 내가 지금 무슨 얘기 하는 거야.”」
「“이미 다 들었으니까 하던 얘기 그냥 계속하시죠. 구릿빛 근육질이 뭐요?”」
「“호호, 내가 그랬니? 아무리 그래도 질투는 아직 이르단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상심하지는 마. 한 십 년 정도 지나면 너도 꽤 멋진 남자가 될 수 있을 테니.”」
「“……말을 안 하고 말지.”」
「베른의 눈에 비친 수도원 바깥세상의 얘기를 하는 베로니카의 모습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빛나고 있었다. 마치 꿈꾸는 소녀를 보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꿈꾸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이만 들어가자.”」
「바깥세상 이야기가 끝나면, 그 말과 함께 그들은 현실로 되돌아왔다. 맛없는 밥, 늘 똑같은 옷, 재미없는 규율이 있는 그곳으로.」
「“잘 자렴. 이제 이불에 지도 안 그리지?”」
「“빨리 가서 주무시죠.”」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 건데, 자기 전에 화장실 꼭 가야 한다?”」
「“아, 쫌!”」
「베로니카의 말처럼 재미없는 일상이었지만, 그렇기에 안정된 일상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이러한 삶을 무료하다고 말하지만, 베른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때의 그 무료함이 바로 행복이었다는 것을.」
「“하앗!”」
「언제나처럼 나뭇가지를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베른의 몸도 어느새 청소년기에 접어들었다.」
「“독종이네, 독종이야.”」
「“저러다가 정말로 용사님이라도 되는 것 아니야?”」
「“에이, 설마…….”」
「베른의 집념 아닌 집념에 질린 수도자들은 모두 다 혀를 내둘렀다. 처음에는 저러다가 말겠지 한 저 무식한 수행이 어느새 2년을 훌쩍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제, 제법!”」
「기사 출신의 수도자들도 처음에는 재미 삼아 가끔 베른을 상대해 주었으나, 이제는 정색하고 덤비지 않으면 오히려 당할 판이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나도 늙긴 늙은 모양이다. 이제는 못 당하겠어.”」
「“아닙니다. 휴 님에 비하면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겸손하기는.”」
「그렇게 너털웃음을 터트린 수도자가 돌아가고 나면, 또다시 혼자서 나뭇가지 휘두르기. 베른의 일상 속에 생긴 작은 변화라면 변화였다.」
「“이야기 들었어. 오늘 처음으로 휴 아저씨를 이겼다며?”」
「언제나처럼 밤하늘과 함께 나타난 베로니카의 모습.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달빛과 함께 어우러져서 빛이 났다.」
「“이기기는 무슨…… 휴 님이 봐준 거예요.”」
「“보통 애들은 네 나이쯤 되면 허세도 한 번 정도 부리던데, 내가 너를 잘못 키운 걸까? 애늙은이가 되어 버렸어.”」
「그렇게 말하며 조금 슬픈 듯이 옷소매를 적시는 베로니카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베른을 놀리는 모양새였다.」
「“……시끄러워요. 그리고 키우기는 누가 키워.”」
「엄밀히 따지면, 베로니카가 베른을 키우다시피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자, 그러면 네가 용사님이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건가? 짐은 언제 쌀까?”」
「“옥수수 스프 마시지 마요. 저는 아직 멀었으니까.”」
「어느새 자연스럽게 베른의 옆자리에 앉은 베로니카가 언제나처럼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허세도 좀 부리고 그러라니까? 마음이 늙으니까 몸도 같이 늙는 거야. 날 봐. 생각이 젊으니까 몸도 이렇게 젊고 탱탱하잖아?”」
「“……저는 늙은 게 아니라 성장한 겁니다만.”」
「“따박따박 말대답하기는. 그게 바로 늙었다는 거야. 이 애늙은이야.”」
「“수녀님이 너무 철이 없는 거예요. 이 철부지야.”」
「“이게 한마디를 안 지네!”」
「“지금까지 봐준 건데, 더 할까요?”」
「정말 말 그대로 한마디도 안 지는 모습. 그 모습을 바라본 베로니카가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우며 푸념했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어…….”」
「“잘생긴 호랑이 새끼죠.”」
「이 와중에도 한마디도 지지 않는 베른의 모습에 베로니카가 혀를 비쭉 내밀었다.」
「“애늙은이.”」
「대체 누가 애고 누가 어른인지 구분이 안 될 수준. 그렇게 시간이 흘러도 베로니카가 입을 열지 않자, 베른은 그제야 양손을 들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한 일주일은 입을 꾹 다물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알았어요. 내가 졌어요. 졌어.”」
「“진작 그럴 것이지.”」
「그제야 고개를 돌린 베로니카의 모습에 베른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오늘은 어디로 갈 거예요?”」
「“으음…… 동쪽 끝은 어때?”」
「“좋아요.”」
「“동쪽 끝에는 말이야…….”」
「베로니카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베른은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수도원 바깥의 세상을 떠돌았다. 제국 남쪽 지방, 북쪽 미지의 땅, 동쪽 야만족의 영토까지. 그것은 베른에게 있어서 유일한 여행이자, 모험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나머지는 내일 해 줄게.”」
「베른의 기억 속에서 가장 무료했고,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 누군가 그러던가, 우리가 어느 날 마주친 불행은 우리가 소홀히 보낸 지난 시간에 대한 보복이라고. 그날의 아침은 여느 날과 다름없었다. 지루하고, 무료했으며, 또한 평화롭고 행복했다. 그들이 오기 전까지는.」
「“계시오?”」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수도원 문을 두드린 사내는 기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상처 입고, 피와 흙이 잔뜩 들러붙어 있는 그 모습은 누가 보아도 큰 전쟁을 치르고 온 모습이었다.」
「“우리는 왕국 소속의 표범 기사단이오. 갑작스럽게 미안하지만, 오랜 전투로 인한 상처와 피로를 달랠 장소가 필요하오. 잠시 묵어 갈 수 있겠소?”」
「“이곳은 수도자들이 지내는 곳. 죄송하지만 외인의 출입은 철저히 금하고 있습니다. 약간의 약초와 식량을 드릴 터이니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모양이오.”」
「기사가 그렇게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나는 지금 그대의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요. 우리의 결정을 통보하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