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차 이후의 소설 속-75화 (75/164)

◈ 75화 Chapter 18: 용사 (5)

「베로니카의 말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베른은 조금 전부터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마치 이곳에서는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될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불안감. 그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처음 느껴보는 예감이었다.」

「“그래요.”」

「예상보다도 훨씬 더 순순히 수긍한 베른의 모습에 살짝 놀란 베로니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들이 떠날 채비를 위해서 수도원에 있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 베른의 불길한 예감은 이내 현실이 되었다.」

「“저, 저건 설마…… 으아악!”」

「그 비명이 터져 나온 곳은 다름 아닌 표범 기사단이었다. 늘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용맹함을 자랑하는 기사라고는 믿기지 않는 비명. 상황을 살피려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베른의 귓가에 클리프의 씁쓸한 후회가 들려왔다.」

「“……너무 오래 머물렀군.”」

「비명을 내지르는 다른 기사들에 비해서는 비교적 덤덤한 목소리였지만, 그 역시도 멀쩡하지는 않은 듯 어느새 입가에서 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베른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베로니카의 방을 향해서 뛰었다.」

「“베로니카!”」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불안감. 그러나 그 예상과는 다르게 다행히 베른은 곧 방에서 나오는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베른.”」

「“비명소리 들었죠? 서둘러야 할 것 같아요.”」

「평소라면 이쯤에서 애답게 좀 굴라고 딴죽을 걸었을 베로니카였지만, 지금만큼은 별말 없이 순순히 베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건물 밖으로 나온 그들이 마주한 것은 어느새 순식간에 수도원 전체를 감싼 광란의 현장이었다.」

「“이건…….”」

「기사들과 수도자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서로에게 검을 휘두르고, 이빨로 물어뜯는 광경은 결코 인간의 싸움이라고 볼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짐승의 싸움. 본능과 광기만이 남은 그곳에서 처절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죽어!”」

「“끄하아!”」

「“죽여 버릴 거야!”」

「갑작스럽게 눈앞에 닥친 저 광란의 현장은 결코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베른은 저 현상이 바로 클리프가 말했던 재앙이 만들어 낸 현상임을 직감했다.」

「“베로니카?”」

「멍하니 저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베로니카의 모습. 베른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정 많은 베로니카가 저 광경을 보고서 그냥 지나칠 리가 없으니 분명히 어떤 방식으로든 도우려고 할 것이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베른이 그렇게 머릿속을 복잡하게 물들이고 있을 때, 잠시 멈춰 선 그를 이끈 것은 다름 아닌 베로니카였다.」

「“가자.”」

「몇 년을 함께 지낸 가족이자 동료인 수도자들이 죽어 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망설임 없는 베로니카의 행동에 베른은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평소였다면 이쯤에서 농담 한마디를 건넸을 베른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조용히 대답했다.」

「“……예.”」

「그때였다.」

「“죽어!”」

「그들을 향해서 맨몸으로 달려든 한 인영.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수도자 휴였다.」

「“……휴 님!”」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아귀처럼 그들에게 이빨을 들이민 휴의 모습은 지금껏 그들이 지켜봐 왔던 인자하고 강인했던 휴의 모습이 아니었다.」

「“죽어, 죽어, 죽어!”」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든 걸까. 그를 바라보며 지팡이로 만들어 놓은 나무 막대기를 집어 든 베른이 그를 내리쳤으나, 기사 출신으로서 강인하게 단련된 그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만 돋우었을 뿐.」

「“너 이 애송이 새끼!”」

「광기에 휩싸인 휴가 그대로 베른을 향해서 달려들자, 베른의 손에 들린 지팡이 끝이 순식간에 휴의 목을 강타했다. 이성을 잃은 만큼, 약점도 쉽게 노출 시킨 탓이었다.」

「“커, 컥!”」

「제아무리 광기로 미쳐 있다고는 하나, 결코 불사신이 된 것은 아니었다. 휴가 쓰러진 후, 베른이 본 것은 어딘가 놀라움으로 물든 베로니카의 얼굴이었다.」

「“베른.”」

「“안타깝지만, 휴 님까지 챙길 시간은 없으니 어서 이곳을 나가요.”」

「베른의 말에 베로니카가 힘겹게 대답했다.」

「“……그래.”」

「그렇게 그들이 향한 곳은 수도원 뒤쪽에 나 있는 작은 쪽문이었다. 그들이 쪽문에 도착하자, 갑작스럽게 발걸음을 멈춘 베로니카가 말했다.」

「“베른.”」

「한시가 급한 때였다. 베른은 발걸음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지금 베로니카가 하는 말은 들어야 할 것 같았다.」

「“……말하세요.”」

「“나는 말이야. 어렸을 때 농부가 되고 싶었어.”」

「“네?”」

「이 시기에 이런 말이라니? 너무나도 뜬금이 없어서 베른은 잠시 동안 벙찐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는 평소의 모습과는 달랐다가, 이제 와서 평소처럼 실없는 모습이라니? 베른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

「“지금이 그런 시답잖은 말이나 할 때예요?”」

「“조금 일렀나?”」

「어느새 베로니카의 얼굴에 드리워진 작은 미소에 베른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게…… 됐으니까 어서 나가기나 해요.”」

「“우리 잘생긴 예비 용사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확 버리고 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직 소년에 불과한 그에게 있어서 처음으로 겪는 바깥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베로니카는 그런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마침내 그들이 수도원 바깥으로 나오자, 환한 달빛이 그를 반겼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보는 바깥세상에 대한 감상을 깬 것은 다름 아닌 베로니카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치 이야기를 해 주지 못했네.”」

「“오늘은 됐어요. 나중에 해 주세요.”」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말을 들을 베로니카가 아니었다. 숲길에 들어서서 수도원의 모습이 나무 사이로 완전히 가려지자, 베로니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니, 오늘 꼭 해 주고 싶어. 오늘이 아니면 마땅한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이제 수도원 바깥을 나오게 되니까 나 버리려고요? 호강시켜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호호, 그러네. 그러면 버리는 김에 이 미모로 졸부 하나 꼬셔서 팔자 좀 고쳐 볼까?”」

「“말이나 못 하면.”」

「왜일까, 평소와 같은 농담을 나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베른은 베로니카가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당장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음에도 말이다.」

「“오늘 이야기에는 주인공이 있어. 어느 행상인의 딸인데, 어려서부터 행상인인 부모를 따라서 세계 각지를 떠돈 아주 예쁜 아이지.”」

「“주인공?”」

「평소 베로니카가 하는 이야기에는 주인공이 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녀가 하는 말은 마치 자신이 겪은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주는 1인칭 시점이었다. 그러니 주인공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머리도 좋고,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착한 그런 주인공이지.”」

「“그것참, 현실감 없는 주인공이네요.”」

「“꼭 그렇게 없지만은 않아.”」

「“별로 알고 싶지는 않네요. 그래서요?”」

「“……소녀는 모험심 넘치는 행상인인 부모를 따라서 어려서부터 안 가 본 곳이라고는 없을 정도로 세계 각지를 떠돌았어.”」

「베로니카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렇게 오랜 여행 끝에 도착한 곳은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이었어. 소녀는 도대체 이런 곳에서 어떤 장사를 하려는지 부모에게 묻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소녀는 그 대답을 듣지 못하게 돼.”」

「“왜죠?”」

「“갑작스럽게 도적 떼를 만나게 됐거든. 보통 도적이라고 하면 재물만 뺏고 보내주는 것이 관례인데, 그 흉악한 놈들은 모든 것을 앗아가려고 했지. 부모의 희생으로 소녀는 필사적으로 도망칠 수 있었고, 간신히 부모가 가고자 했던 시골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어.”」

「“안타까운 이야기군요.”」

「“그래, 안타까운 이야기지…… 무척이나. 하지만 안 좋은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었어.”」

「“왜죠?”」

「“어렵게 도착한 시골 마을에서, 소녀는 사랑을 알게 됐거든.”」

「그리고 베른에게 들려온 것은 어느 곳에나 있을 법한 아주 평범한 연애담이었다.」

「“……짧지만 소녀에게 있어서 그것은 분명히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생활이었어. 비록 불행으로 시작된 생활이었지만, 사랑하는 이가 있고, 그 사랑하는 이가 사랑하는 고향도 있는. 하지만 그 행복도 머지않아서 곧 깨지게 됐지. 소녀의 부모를 죽였던 도적 떼가 마침내 마을을 습격하게 된 거야.”」

「베로니카가 계속해서 말했다.」

「“마을이 불타고, 모든 것이 무너졌어. 그리고 소녀는 또다시 도망쳤어. 이번에는 사랑하는 이마저도 잃은 채로. 그녀는 도망치면서 혹여 자신이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마녀가 아닌가 하고 의심했어. 주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그런 마녀.”」

「“……불편하면 이런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해도 상관없어요.”」

「정확히는, 듣고 있는 베른 자신이 불편했다. 그 이야기를 하는 베로니카의 모습이 더없이 슬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난 이 이야기를 꼭 하고 싶어.”」

「그녀가 계속해서 말했다.」

「“세상은 험난한 곳이었어. 여자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만큼. 홑몸이 아닌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고.”」

「“……그게 무슨 뜻이죠?”」

「그러나 베로니카는 대답 대신으로 작은 미소를 띨 뿐이었다. 그리고는 살며시 말꼬리를 돌렸다.」

「“어째서 저 광기의 현장에서 우리만 무사할 수 있었을까?”」

「“뭐예요? 갑자기.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너는 빛이란다.”」

「그리고는 한껏 뻔뻔한 미소를 짓는 베로니카의 모습에 베른이 어이없다는 듯이 툭 말했다.」

「“그게 무슨…….”」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주위가 어둠으로 물든 것은.」

「“……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두워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정체 모를 거대한 무엇인가가 유일한 길잡이였던 달빛을 가렸을 뿐. 베른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클리프가 멀리서나마 보았다던 재앙이 무엇인지. 수도원의 사람들이 대체 무엇을 보고서 미쳐 버렸던 것인지.」

「“저게…… 뭐야.”」

「그것의 몸은 무척이나 거대했다. 그것은 두 개의 거대한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흉포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베른을 바라보았다.」

「[찾았다.]」

「대체 무엇을? 그러나 베른은 그 의문을 해소하지 못했다. 그리고 일어난 일은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베로니카?”」

「어느새 자신의 앞을 막아선 베로니카의 모습과 반대편이 비쳐 보일 정도로 텅 비어 버린 그녀의 등이 베른의 눈동자에 비쳤다.」

「“베로니카?”」

「그것은 무척이나 현실감이 없는 장면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농담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던 이의 생명이 꺼져 가고 있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위협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른은 이성보다는 본능으로 움직였다.」

「“베른.”」

「쓰러지는 베로니카를 받아든 베른의 손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그녀가 이미 사라진 폐의 마지막 공기를 빨아들이며 간신히 내뱉었다.」

「“살아.”」

「그리고 이어진 마지막 말은 베른의 기억이 만들어 낸 환청인지, 아니면 진실인지 스스로도 영영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내 용사님, 그리고…… 내 아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베로니카의 몸이 힘없이 늘어졌다. 베른의 손을 타고서 흘러내린 피가 숲 바닥을 가득히 적셨다.」

「“……베로니카?”」

「허무하고 갑작스러운 죽음이었으나, 베른에게 있어서 그 죽음을 슬퍼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다가온 재앙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을 끊겠다.]」

「알 수 없는 재앙의 말과 함께, 베른을 향해서 죽음이 다가왔다. 베른은 느낄 수 있었다. 곧 베로니카의 곁으로 가는 것이라고. 그리고 베른은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앞에 나타난 한 줄기의 빛을.」

「“아무래도 늦은 것 같습니다. 스승님.”」

「“그래.”」

「빛과 함께 나타난 이들은 어른 남성 한 명과 베른 또래의 소년 한 명이었다. 그 모습을 본 베른이 적대감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들…… 뭐야?”」

「베른의 질문에 남자가 대답했다.」

「“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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