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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이후의 소설 속-76화 (76/164)

◈ 76화 Chapter 18: 용사 (6)

「“용사…… 라고?”」

「용사. 마치 전설처럼 내려오는 수많은 이야기와 무용담의 주인공. 모두가 우러러보는 영웅. 언젠가 되고자 했던 목표. 그러나 지금의 베른에게 있어서는 아니었다. 베른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 하하.”」

「수녀 한 명 구하지 못하는 주제에 영웅은 무슨 영웅. 베른이 기대했던 용사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영웅은 이렇지 않았다. 고작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는 것이 용사라면, 이쪽에서 먼저 사양이었다.」

「“꺼져.”」

「베른의 말에 용사와 함께 나타난 소년이 외쳤다.」

「“뭐? 방금 뭐라고 했어? 스승님께서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알아?! 이게 죽으려는 걸 구해 주니까 주제도 모르고……!”」

「“그만둬라. 에단.”」

「“스승님!”」

「“그만두라고 했다.”」

「“이익…….”」

「에단이라고 불린 소년이 씩씩거리며 뒤로 물러나자, 용사가 베른의 앞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용서해라. 내가 늦었다.”」

「“…….”」

「베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부린 것은 그저 철없는 어린아이의 생떼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용사의 저런 모습을 본 순간, 베른은 피가 흘러나오도록 입술을 깨물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한 용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웅이었음을.」

「“이야기는 나중에 더하도록 하자. 지금은 저게 있으니.”」

「그렇게 뒤돌아선 용사가 어느새 지척까지 다다른 재앙과 마주했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재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맞선 용사의 모습은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그 후에 용사의 입에서 나온 것은 놀랍게도 마치 오랜 친우라도 부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오랜만이야.”」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용사만의 생각인지, 재앙의 목소리는 그다지 달갑지 않아 보였다.」

「[……어째서 방해하는 거냐.]」

「“글쎄…… 용사니까?”」

「[결국 너도 운명에 먹혀 버린 게야.]」

「“딱히 그런 건 아니야. 그저…… 이 악순환을 끊어 내는 것이 한 소년의 희생이라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을 뿐이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베른은 저들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용사와 재앙은, 예전부터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이라는 사실을.」

「[그런가, 알겠다.]」

「알겠다고 하면서도 그 모습은 결코 순순히 납득한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 날개를 크게 펼친 재앙이 어둠 속에서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용사가 살짝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에단, 소년과 함께 피해 있어.”」

「“예, 스승님.”」

「용사의 말에 에단이라고 불린 용사의 제자가 베른을 바라보았다.」

「“거기, 스승님 말씀 들었지? 따라와. 정 죽고 싶으면 그냥 거기 그대로 서 있어도 좋고.”」

「에단의 말에 베른은 어느새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는 베로니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일까, 차갑디차가운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도 평안해 보였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이미 알고 있었어.”」

「베로니카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이 이토록 비참할 것임을. 그리고 이들이 찾아올 것임을.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베른은 베로니카의 이야기 속 행상인의 딸이 베로니카임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로니카가 말해 준 것은 단지 그것뿐. 이야기 속 소녀는 불행했지만, 특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베로니카는 항상 베른에게 모든 것을 말해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베른이 눈치챌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베른의 생각이 베로니카의 진의에 닿으려던 그 순간, 용사의 고함성이 베른의 생각 사이에 끼어들었다.」

「“에단! 아직도 안 피했느냐?!”」

「“이, 이놈이 말을 자꾸 안 들어서…… 야! 시간 없다는 말 못 들었어?”」

「베른은 마지막으로 베로니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자리를 피하려면 그녀를 버리고서 가야만 한다. 용사와 재앙의 싸움 끝에 그녀의 시신이 어떻게 될지는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베로니카가 항상 말했어. 나보고 좀 애답게 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이루어 주지 못했던 말이기도 했다.」

「“지금 상황에 그게 무슨 소리야? 빨리 가야 한다고!”」

「“에단!”」

「온갖 고성이 오가는 와중에도 베른은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그러고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베로니카의 시신을 들쳐 업는 베른의 모습에 에단이 비명을 질렀다.」

「“야 이, 미친놈아!”」

「“앞장서.”」

「“아, 진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온갖 성을 다 낸 에단이 어느새 베른의 등에서 미끄러지는 베로니카의 몸을 붙들자, 그 광경을 본 베른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너…….”」

「“같이 들어야 빨리 갈 것 아니야!”」

「짜증 섞인 목소리였으나, 베른은 그 짜증 섞인 목소리가 결코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고맙다.”」

「“시끄러!”」

「그들이 달리기 시작하자, 그제야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용사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성검 다이베른. 악을 멸하고, 빛을 비추는 검. 그 이름처럼 찬란한 빛을 쏟아낸 성검이 당당히 재앙에 맞섰다.」

「“야! 뭐해!”」

「“아.”」

「에단의 외침에 베른은 그제야 자신이 어느새 성검의 찬란함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마치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자.”」

「간신히 유혹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른은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심장이 미칠 듯이 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검을 본 순간부터였다.」

「“뭐, 이해해. 나도 스승님을 처음 봤을 때는 그런 감정이었으니까.”」

「함께 달리는 에단이 뻗대듯이 말했으나, 솔직히 말해서 베른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공감 가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가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은 용사가 아니라 그가 들고 있는 성검,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콰카캉-!」

「베른의 기억 속에서 수도원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평화롭기 그지없었던 한적했던 숲길은 이제 과거의 고요함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 갔다. 마치 그의 삶을 지배했던 고요함과 무료함처럼.」

「“뭐해? 서둘러!”」

「에단의 재촉에 베른이 감상을 접고 시야에서 숲길을 지웠다. 그 너머에 있을 수도원의 모습마저도. 베로니카의 말마따나 항상 지루하고 무료했던 삶이었지만, 베른은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었다. 그 기억 속의 나날들은 진정으로 행복했노라고.」

* * *

「한참을 달리고, 또 달렸다. 베른은 지금껏 이렇게까지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인 적이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유감스럽게도 없었다. 그의 옆에서 나란히 달리던 에단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후욱! 너…… 일반인 주제에 제법…… 후욱!”」

「기세는 당당했지만, 에단의 상태 역시도 베른과 별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오기로 버티다시피 하는 것은 오히려 이쪽이었다. 명색이 용사의 제자라는 자가 저런 근본도 모를 소년에게 져서야 쓰겠는가. 더군다나 저쪽은 사람마저 업고 있었다. 한계를 느낀 에단이 이제 그만 주저앉으려던 순간, 그의 앞을 달려가던 베른이 발걸음을 멈췄다.」

「“쿨럭! 너, 너도 꽤 제법이었지만 역시 용사의 제자인 이 몸에게는…….”」

「“……나왔다.”」

「베른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앞을 응시한 에단은 그제야 지긋지긋했던 숲길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그러네.”」

「그대로 에단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드러눕자, 베른은 눈앞에 나타난 새로운 세상에 잠시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베로니카를 옆에 앉히고는 말했다.」

「“봐요. 바깥이에요.”」

「그 풍경은 베로니카가 늘 말하던 바깥세상의 모습이었다. 어느새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과 그것이 비추는 수많은 건물.」

「“여기가 좋겠어요.”」

「베른은 잠시, 아주 잠시 동안 베로니카와 함께 앉아서 아침 해가 떠오르는 풍경을 지켜보았다. 베로니카가 늘 말했던, 그 풍경을.」

「“여기가…….”」

「조용히 아침 해를 바라보던 베른의 눈가에서 그제야 왕방울만 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슬퍼할 시간조차도 없었기에 뒤늦게 흘러나온 눈물. 베른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버린 베로니카를 붙잡고서는 한참을 오열했다. 그는 마치 애처럼 울고 또 울었다.」

「“이만 일어나.”」

「도대체 언제 잠든 걸까. 베른은 자신이 말 그대로 울다 지쳐서 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에단이 자신이 잠들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사실 또한.」

「“……곧 스승님이 오실 거야. 이 숲길이 끝나는 곳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그래.”」

「“그 사람은…… 어떻게 할 거야?”」

「에단의 시선이 베른 옆에 조용히 누워 있는 베로니카를 향했다.」

「“이만 보내야겠지.”」

「베른이 에단의 허리춤에 있는 작은 철검을 가리켰다.」

「“그것 좀 잠깐만 빌려줘.”」

「“뭐? 이건 왜?”」

「“땅 좀 파게.”」

「“지금 용사의 제자인 내 분신이나 다름없는 검을 고작 삽으로 쓰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안 되면 말고.”」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던 것뿐이다. 베른은 그대로 가져온 지팡이로 굳은 땅을 몇 번 헤집고는 그대로 손으로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없이 땅을 파헤치던 그의 눈앞에 작은 검 하나가 놓여졌다.」

「“……써.”」

「“네 분신이라고 들었는데.”」

「“아, 그냥 좀 쓰라면 써! 검이야 새로 사면 그만이니까.”」

「베른은 사양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고맙다.”」

「“……딱히 네놈이 예뻐서 빌려주는 건 아니야.”」

「“알고 있어.”」

「그렇게 베로니카를 묻고 난 후, 베른은 가져온 지팡이를 조심스럽게 쳐다보고는 그것을 묘비로 삼았다. 베른이 퉁퉁 부은 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끔씩 이것 좀 그만 휘두르고 자기랑 놀아달라고 했었거든. 그렇게 용사가 되라고 할 때는 언제고.”」

「“용사?”」

「“아, 신경 쓰지 마. 그냥…… 베로니카가 나랑 늘상 했던 작은 농담 같은 거였으니까.”」

「베른은 아직도 베로니카가 했었던 마지막 말이 생생했다. 어차피 그 말이 어떤 의미와 진실을 갖고 있는지는 더 이상 베른에게 있어서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존재였든지 간에, 베른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그녀는 항상 같았으니까.」

「“응? 뭐라고 쓰는 거야?”」

「베른이 베로니카의 묘비로 삼은 지팡이에 마지막 글자를 새기고는 대답했다.」

「“어머니.”」

「그리고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베로니카가 항상 입버릇처럼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용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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