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Chapter 18: 용사 (7)
「숲속에서 용사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시간이 흘러 석양이 저물고 나서였다. 가장 먼저 이를 발견한 에단이 맨발로 뛰쳐나갔다.」
「“스승님!”」
「“잘 피해 주었다.”」
「“그런 것보다 스승님 상처가…….”」
「“괜찮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용사의 상태는 결코 무사하지 못했다. 찢어진 옷 사이로 곳곳에 드러난 자잘한 상처들과 기이하게 꺾인 왼쪽 팔. 모르긴 몰라도, 저렇게 괜찮다는 말이 쉽게 나올 수준은 아니었다.」
「“재앙은…… 어떻게 됐죠?”」
「그 질문을 한 것은 다름 아닌 베른이었다. 지금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용사의 생존 여부 따위가 아니었다. 재앙, 베로니카의 생명을 잔인하게 앗아간 그 존재가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의 베른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녀석도 큰 상처를 입었지.”」
「“아직 살아 있다는 말이로군요.”」
「베른은 재앙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두 가지 감정이 함께 들었다. 첫 번째로는 재앙이 아직도 죽지 않았다는 분노와 두 번째로는 아직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일 기회가 남아 있다는 환희였다. 그런 베른의 이질적인 기색을 눈치챘는지, 용사가 베른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년, 나는 네 복수심을 이해한다. 나 또한 그렇게 분노에 사로잡혔던 때가 있었고, 복수의 무용성을 내세우며 그것이 부질없다고 말하는 위선자들처럼 너를 말릴 생각 또한 없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말해 두고 싶다. 지금의 너에게는 백 년이 지나도 무리다.”」
「“……백 년.”」
「까마득한 숫자. 베른은 용사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굳이 용사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그따위 사실은 이미 스스로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직접 보았던 재앙은, 인간의 몸으로 제아무리 단련하고 노력해 봤자 결코 닿을 수 없는 영역에 있다는 것을.」
「“……재앙은 도대체 뭐죠?”」
「“글쎄…… 그건 시대마다 다르게 불리곤 했어. 과거 신성 제국이 존재할 당시에는 신과 대적한다는 의미로 악마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고, 세력이 강성할 때는 오히려 스스로 신이라고 불릴 때도 있었지. 또 어떤 시대에서는 피할 수 없는 재해와도 같다 하여서 재앙이나 재해 같은 것으로도 불리었고,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지.”」
「“그게 뭐죠?”」
「“아, 너에게 있어서는 이쪽이 더 알아듣기 쉽겠어. 마왕. 이렇게 말하면 알아듣겠나?”」
「마왕. 용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충격적인 이름에 베른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마왕.”」
「그 이름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용사의 모험담 중에서도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존재. 베른은 자신의 원수가 그러한 존재라는 사실에 용사가 되어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용사가 지나가듯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내 마누라이기도 하지.”」
「“……예?”」
「이건 또 무슨 질 나쁜 농담이란 말인가. 베른은 용사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표정을 굳히고 정색했다.」
「“……장난 칠 기분 아닙니다.”」
「“지금은 별거 중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게 무슨…….”」
「용사가 짓궂게 웃었다.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그런 미소였다.」
「“농담이야.”」
「베른은 여전히 그의 말을 믿기 어려웠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의 말이 농담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소년, 이름은?”」
「“……베른입니다.”」
「“베른이라…… 과연. 내 이름은 가람이다.”」
「그들의 짧은 인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애초에 아무것도 아닌 사이에 불과한 그들이었다. 짧은 적막이 지나간 후, 용사가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냐?”」
「“우선, 저도 당신의 제자라는 게 되어 볼까 합니다.”」
「너무나도 당당한 베른의 말에 용사가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 시켜 준다고 한 적도 없는데?”」
「“그러면 지금부터 시켜 주십시오.”」
「“하하하.”」
「한바탕 시원한 웃음소리가 지나간 후, 용사가 베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다. 내 질문 한 가지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다면 너를 내 제자로 받아주마. 너는 운명을 믿느냐?”」
「베른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믿지 않습니다.”」
「“좋아, 그 신념. 혹여 용사가 되더라도 지키길 바란다. 내 제자가 된 것을 축하한다.”」
「허무할 정도로 쉬운 승낙에 베른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이게 끝인가요?”」
「“뭐가 더 필요해?”」
「“아니 뭐…… 고울 산 정상에 있는 전설의 약초를 가져오라든가, 바위에 꽂힌 성검을 뽑으라든가 그런 거 안 해요?”」
「설사 그보다 더한 조건이 있더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돌파할 각오를 하고 있던 베른이었다. 그런데 고작 질문 한 가지로 끝나다니?」
「“그 얘기는 또 어디서 들었어?”」
「“……소문으로 들었습니다만.”」
「어차피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소문의 출처는 베로니카였지만 말이다.」
「“그건 내 대에서 끊었어. 직접 해 보니까 아무래도 너무 비효율적이더라고.”」
「“…….”」
「베른은 용사 가람이 자신이 알고 있던 용사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 봐. 제자가 된 기념으로 한 가지는 대가 없이 말해 주지.”」
「“당신들…… 아니, 스승님이 이곳으로 온 이유가 무엇이죠? 마왕을 쫓아서 온 건가요?”」
「노련한 용사가 베른이 한 질문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너를 찾으러 간 거였다.”」
「용사의 충격적인 말에 베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저를? 어째서죠?”」
「고작 일개 수도원에 얹혀사는 고아에 불과한 자신을 구하러 용사가 직접 움직인다?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아니, 이해조차 가지 않는 말이었다.」
「“한 가지만 대답해 준다고 했었다. 베른, 나머지는 네 스스로 알아내거라.”」
「“그런…….”」
「또래의 다른 아이였다면 칭얼거리며 억지를 부렸겠지만, 베른은 지금만큼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이때만큼은 원망스러웠다. 그러한 베른의 모습에 용사 가람이 한숨을 내쉬었다.」
「“애늙은이가 따로 없군. 베른, 잘 들어라. 내가 스승으로서 네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뿐이다.”」
「“……그게 뭐죠?”」
「“아까 운명을 믿지 않는다고 했었지? 그 신념, 반드시 지켜라.”」
「베른은 몰랐다. 스승의 그 충고가, 자신을 그토록 후회하게 만들 줄은.」
* * *
「베른이 용사 가람의 제자가 된 후, 어느덧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소년에 불과했던 베른은 이제 청년이 되었고, 그것은 또 다른 용사의 제자인 에단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야! 그거 내 거라니까!”」
「“뭐 어때.”」
「에단이 울상을 지으며 베른의 손에 들린 닭꼬치를 뺏으려 했으나, 현란하기 짝이 없는 베른의 손놀림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억울함이 한껏 폭발한 에단이 검을 뽑아 들었다.」
「“이익! 대결이다! 검을 뽑아!”」
「“검으로는 나한테 안 될 텐데?”」
「“누가 검으로 한데?”」
「그와 함께 에단의 손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마법이었다. 그 광경을 본 베른이 닭꼬치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겨우 밥 가지고 치사하게.”」
「어렸을 적부터 시작된 용사 가람의 철저한 조기교육 덕에 마법과 검술 모두에 능통했던 에단에 비해, 베른은 마법이라면 쥐약이었다. 물론 스승이 스승인 터라 간단한 생활 마법 정도는 사용할 수 있었지만, 딱 그 정도의 수준. 때문에 베른은 검술 대결이라면 자신이 있었으나, 마법까지 사용하는 에단은 쉽게 이길 자신이 없었다.」
「“먼저 밥 가지고 치사하게 논 게 누군데!”」
「그와 함께 화려한 불꽃이 타오르며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닥불 맞은편에 앉은 용사 가람은 이런 일은 마치 일상이라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마법으로 보존해 둔 다과와 차를 즐길 뿐이었다. 그렇게 가람이 차 한 잔을 다 비우자, 마지막에 서 있는 것은 에단이었다.」
「“허억! 허억! 이, 이겼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에단의 상태가 결코 정상이라는 말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찢어진 옷들과 자잘한 멍들이 그가 얼마나 호되게 얻어맞았는지 알 수 있었다. 베른이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짧게 말했다.」
「“……치사하게.”」
「승자인 에단의 처참한 몰골에 비해서 패자인 베른의 모습은 오히려 깔끔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 머리카락이 조금 그을려 있었을 뿐. 늘 그렇듯이 적당히 져 준 모양새였다.」
「“시끄러워! 정 억울하면 너도 쓰던가.”」
「“그러지 뭐.”」
「베른이 손가락을 튕기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에단의 바닥이 푹 꺼졌다. 당연히 이에 대비했을 리가 없는 에단의 몸이 그대로 추락했다.」
「“아악!”」
「베른이 사용하는 마법치고는 너무 고위 마법이 아닌가 싶었으나, 아니나 다를까 그냥 평범한 함정이었다. 그야말로 무서울 정도의 치밀함이 아닐 수 없었다.」
「“……치사하게!”」
「“네가 쓰라며. 어때? 내 마법이.”」
「“이익!”」
「이로써 무승부로 그들의 대결 아닌 대결이 끝나자, 마침 차를 다 마신 용사 가람이 짧게 말했다.」
「“여기부터는 혼자 가겠다.”」
「“예?”」
「경악한 에단에 비해서 베른은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담백한 반응이었다.」
「“알겠습니다.”」
「“뭐, 뭐? 스승님!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에단이 가지는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장소는 다름 아닌 서쪽 마왕의 영토. 그것도 용사의 마지막 과업인 마왕 토벌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라니? 제아무리 하늘 같은 스승의 말이라지만 에단이 쉽게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기부터는 위험하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가 떠나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에단.”」
「용사 가람이 조용히 에단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이란다.”」
「오랜 세월 동안 가람과 함께 지내왔던 에단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스승은 절대로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라. 금방 돌아올 테니.”」
「그렇게 용사 가람이 홀로 마왕의 성을 향해서 떠난 후, 베른과 에단은 인간의 국경에서 기다리라는 가람의 뜻대로 서쪽 마왕의 영토를 떠났다.」
「“……이해할 수가 없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게 있으신 거야.”」
「베른은 항상 마왕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미묘하게 변하는 스승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얼굴에 묻어난 그리움과 슬픔. 여전히 진실은 알 수 없었으나 베른에게 있어서 이유는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니까 그게 도대체 뭐냐고!”」
「시끄러울 정도로 칭얼대는 에단의 모습에 베른이 한숨을 내쉬며 짧게 말했다.」
「“애군.”」
「“뭐?”」
「옛날이야 정말로 어렸으니까 그러려니 했다지만,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칭얼거리는 에단의 모습에 베른은 짜증이 절로 솟구쳤다.」
「“애라고. 그것도 무척이나 시끄러운 애.”」
「“뭐라는 거야, 이 애늙은이가. 한번 해보자고?”」
「“나야 상관없지만, 스승님이 돌아왔을 때 곤죽이 된 네 꼴을 보면 마음이 꽤 아프실 것 같은데.”」
「“이게!”」
「그 같지도 않는 싸움 때문에 한 달이면 도착했을 귀환길이 무려 두 달로 늘어난 것은 참으로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였다.」
「“나는 네가 싫다.”」
「“그것참, 다행이네. 혹시나 좋아하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티격태격하며 마침내 그들이 국경 도시에 도착한 후, 그들은 스승의 귀환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반년이라는 시간이 더 흘렀을 때, 그들은 마침내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누구인지 모를 여인을 안고 있는 스승을.」
「“스승님!”」
「오랜만에 만난 두 제자의 얼굴에도 불구하고 용사 가람의 얼굴은 마치 영혼이 없는 것처럼 허망해 보였다.」
「“……너희구나.”」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마왕은 쓰러뜨리신 겁니까?”」
「베른이 다급하게 에단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도대체 눈치가 없어도 어떻게 이렇게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에단이 화난 표정으로 베른을 쏘아보았으나, 이내 딱딱하게 굳어 있는 베른의 표정에 무언가 자신이 실언했음을 눈치채고는 입을 굳게 닫았다.」
「“마왕이라…… 그래, 쓰러뜨렸지. 내 손으로 직접. 그럴 운명이었으니까.”」
「한없이 허탈한 목소리. 그의 팔에 안겨 있는 축 늘어진 여인의 모습이 왜인지 모르게 베른에게 익숙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내 운명은 여기서 끝인 것 같구나.”」
「용사 가람의 입가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아니, 애초에 그의 몸 상태로 이곳까지 사람을 안은 채로 온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에단.”」
「“……예, 스승님.”」
「“베른을 잘 부탁한다.”」
「평소라면 기겁을 하고서 비명을 질렀을 말이었지만, 에단은 이번만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고맙다.”」
「용사 가람이 작게 웃어 보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베른, 너에게는 미처 해 주지 못한 말이 너무나도 많구나.”」
「“……들은 셈 치겠습니다.”」
「“이미 전부 다 알아 버린 건 아니고? 아무튼, 너란 녀석은…….”」
「용사 가람이 씁쓸하게 웃어 보이고는 뒤돌아섰다.」
「“배웅하지 마라. 이만 가마.”」
「세상을 구한 영웅의 뒷모습은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부도, 명예도, 아름다운 공주와의 사랑도 없는 마지막이었다. 그가 떠나간 후, 그가 있던 자리에 남은 주인을 잃은 성검이 조용히 다시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어?”」
「그것을 발견한 에단이 성검을 주우려 했으나, 이내 강력한 반발에 의해서 손바닥에 화상을 입고 말았다.」
「“아악!”」
「그리고 그러한 성검의 빛을 본 베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힘이었다.」
「“조심해!”」
「에단이 다급하게 외쳤으나, 이미 베른의 손은 성검으로 향해 있었다. 베른이 성검을 붙잡은 순간, 성검 다이베른에게서 믿을 수 없는 광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그들의 스승이 휘둘렀을 때처럼.」
「“설마…….”」
「에단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저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용사…….”」
「용사, 베른의 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