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차 이후의 소설 속-78화 (78/164)

◈ 78화 Chapter 18: 용사 (8)

「베른이 성검을 집어 든 순간, 그는 자신이 용사로서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게 있어서 용사가 됐다는 것은 조금 떨떠름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은 아니었다. 어차피 가람 이후에 용사가 되는 것은 에단이 아니면 자신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래…… 그렇군.”」

「용사가 된 순간, 그는 지금까지 의심해 왔던 몇 가지 사실들과 미처 모르고 있던 사실들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아니, 느낄 수 있었다.」

「“……스승님은 이런 걸 짊어지고 있었던 건가.”」

「조금만 방심해도 용사라는 이름과 과업이 가진 중압감에 짓눌려 버릴 것만 같은 압박감이 이내 그의 전신에 내려앉았다. 베른은 자신의 스승이 대단한 남자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럽게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자라나는 것을 느꼈다.」

「“에단.”」

「“어? 예?”」

「“앞으로 잘 부탁한다.”」

「의도를 알 수 없는 베른의 말에 잠시 동안 에단의 표정이 벙쪘다.」

「“……뭘?”」

「“스승님 말씀 잊었어?”」

「그제야 베른의 말을 알아들은 에단의 표정이 흉악하게 구겨졌다.」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네 부하가 돼라. 이 말이야?”」

「“부하는 어감이 조금 그렇고, 동료는 어때? 정감 있고 좋은 단어 같은데.”」

「“하! 웃기지도 않은 소리.”」

「에단이 질색하며 소리를 질렀으나, 고작 거절 좀 당했다고 해서 물러설 베른이 아니었다.」

「“그건 곤란한데? 나는 네가 스승님의 말을 착실하게 실천하는 올바른 사람이 되기를 바라거든.”」

「“스승님의 유언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지 마라. 내가 널 인정할 것 같아?”」

「제법 단호한 반응이었으나, 베른에게 있어서는 이미 예상한 상황이었다.」

「“에단, 용사에게는 훌륭한 동료가 필요해.”」

「“그래서?”」

「“스승님께서는 항상 우리 둘 중 한 명이 용사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셨어. 비록 지금은 내가 용사가 되긴 했지만, 만약 내가 아닌 네가 용사가 됐다고 하더라도 나는 순순히 인정했을 거다. 에단, 나는 너를 인정한다.”」

「비록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서 달콤한 말처럼 치장하기는 했지만, 이 말에는 베른의 진심 역시도 어느 정도 섞여 있었다. 용사 가람의 제자 에단. 비록 조금 순진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실력은 진짜였다.」

「“네, 네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내가 동료가 될 것 같아?”」

「명백한 당황.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베른이 이어서 말했다.」

「“그러면 조언자는 어때?”」

「에단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눈치 빠른 베른이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조언자?”」

「‘쉬운 놈.’ 베른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걸렸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에단에게 그럴듯한 감투를 씌어 주는 일뿐이었다.」

「“용사의 조언자가 되어 주었으면 한다, 에단.”」

* * *

「용사 베른의 모험은 그렇게 시작됐다. 비록 여느 용사들처럼 마왕을 무찌른다거나 세상을 구한다거나 하는 거창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모험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용사로서, 그리고 영웅으로서 확실하게 나아갔다.」

「“용사다! 용사님이 나타났다!”」

「“와아아! 우리는 살았어!”」

「용사 베른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다. 마왕 므가 용사 가람에게 퇴치당한 후에 찾아온 혼란은 그를 필요로 했으며, 용사로서 책임과 의무감을 가지고 있는 베른은 망설임 없이 그 요구에 응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의를 베풀며, 악을 배제한다. 용사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이념이 그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그렇게 있을 때면 이따금씩 스승의 충고가 떠오르고는 했지만, 그럴 때마다 베른은 자신의 이러한 행동들이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 살려 줘…….”」

「“배제한다.”」

「그의 검 끝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베고, 또 베며 자신의 정의를 실천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부터 그의 마음속에서부터 자라나기 시작한 이상한 불안감은 잠들지 않았다. 마치 놓쳐서는 안 될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러나 그는 그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그의 눈앞에 후드를 쓴 어떤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당신이 용사죠?”」

「“맞다만.”」

「이때까지 용사를 찾아오는 이는 딱 두 가지 부류였다. 그에게 부탁을 하러 오거나, 말하지 못할 원한을 품고 오거나. 그러나 그 여자는 그 두 가지 전부 다 아니었다.」

「“잘됐네. 함께 마왕을 무찌르러 가죠.”」

「“……뭐?”」

「황당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는지, 옆에 있던 에단이 베른의 앞을 막아섰다.」

「“당신 뭐야? 마왕은 이미 죽었어.”」

「마왕 므는 전대 용사이자 베른과 에단의 스승인 용사 가람에게 최후를 맞이했다. 이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그 사실을 직접 가람에게 듣기까지 했었다. 때문에 에단의 저러한 반응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여자의 반응은 냉소였다.」

「“뭐야, 당신들 정말로 용사 일행 맞아요? 아직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

「“우리가 뭘 모른다는 거지?”」

「“마왕이 부활했어요.”」

「“……뭐?”」

「충격적인 말. 그러나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어느 시대든지, 용사가 있는 시대에는 항상 마왕이 존재해 왔었으니까.」

「“……불안감의 정체가 그것이었나.”」

「“베른, 지금 저 말을 믿는 거야?”」

「“못 믿을 건 없지.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그와 함께 순식간에 뽑혀진 베른의 성검이 여자의 목에 닿았다.」

「“얼굴을 보여라.”」

「베른 스스로 납득을 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얼굴도 모르는 여자의 말을 순순히 들을 수는 없었다. 그와 함께 여자의 후드가 걷히자, 베른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베로니카?”」

「아니, 아니다. 조금 닮긴 했지만 다른 사람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베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태도가 조금 유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너는 누구지? 정체가 무엇이기에 용사인 나조차도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는 거지?”」

「“신탁이 있었어요.”」

「“신탁?”」

「“제 이름은 바네사. 신의 뜻을 따라서 당신을 도와 마왕을 토벌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 에단이 경악한 표정으로 외쳤다.」

「“잠깐, 바네사라고? 설마…… 성녀 바네사?”」

「“그쪽 분은 저를 아시는 모양이네요.”」

「“이자를 알아?”」

「베른이 묻자, 에단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 머저리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성녀를 모른단 말이야?”」

「“모른다만.”」

「정확히는, 성녀라는 존재 자체를 모른다는 것은 아니었다. 용사와 더불어서 성녀에 대한 이야기는 베로니카에게 질리도록 들어왔었으니까. 다만, 눈앞에 있는 성녀 바네사라는 인물에 대해서 베른은 금시초문이었다.」

「“예전에 들은 적이 있어. 어느 이름 없는 교단에서 무려 성녀가 탄생했다고. 그 자애 넘치는 기품과 미모를 찬사하는 목소리가 높다고 해.”」

「“본인을 앞에 두고 그리 치켜세우시니 조금 부끄럽네요.”」

「바네사의 말에 에단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붉게 물들었다. 하기야, 평생을 용사의 뒤만 따라다녔으니 이성에 대해서 숫기가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아, 아니 네가…… 아니, 당신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소문이…….”」

「“소문이 부끄럽다는 뜻이었는데, 혹시 제가 모르는 다른 의도도 있었나요?”」

「“그, 그건…….”」

「어느새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에단을 놀리는 바네사의 모습에 베른이 짧게 중얼거렸다.」

「“성격 좋다는 소문은 없나 보군.”」

「“다른 소문은 인정한다는 뜻이네요?”」

「어느새 목에 닿은 검을 치운 채로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민 바네사의 모습에 베른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미녀라면 모험 중에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보아왔던 베른이다. 그녀가 단순한 미녀였다면 베른이 이런 반응을 보일 이유가 없었으나, 문제는 그녀의 얼굴이 어딘가 베로니카를 미묘하게 닮았다는 사실이었다.」

「“…….”」

「때문에 베른은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이 불편했다. 하지만 마왕이 부활한 것이 사실이라면 유능한 동료가 더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한참을 바네사의 시선을 피하던 베른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뭘 할 줄 알지?”」

「“상처가 많네요.”」

「갑자기 말을 옆으로 돌리는 바네사의 말에 베른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여러 가지로 거슬리는 여자였다.」

「“내 질문에 대한 답은 그게 아닐 텐데.”」

「“아뇨. 이게 맞아요.”」

「그리고는 천연덕스럽게 상처를 가리킨 바네사의 손가락 끝을 따라간 베른의 시선이 경악했다. 어느새 온갖 전투로 생긴 상처가 흉터도 없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본인인 베른조차도 그 어떤 이질감을 느낄 새도 없이 말이다.」

「“……어느새?”」

「“이 정도면 충분한가요?”」

「과연 성녀는 성녀라는 건가. 성녀가 병든 자를 돌본다는 이야기는 이미 질리도록 흔한 이야기였다. 베른은 그제야 눈앞에 있는 바네사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성녀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마음대로 해.”」

「이토록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마왕을 토벌해야 할 의무가 있는 용사로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잠시 지켜본 그녀의 성격상 베른이 거절한다고 해서 포기할 것 같지도 않았다.」

「“좋아요.”」

「이내 화사하게 지어진 바네사의 미소. 그렇기에 베른은 그녀의 미소가 너무나도 거슬렸다. 그녀의 미소를 볼 때면, 떠올리기 싫은 기억과 그리운 기억이 함께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른은 그녀를 떨쳐내지 못했다.」

「“……가지.”」

「도대체 왜일까, 스스로도 그에 대해서 확실할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만은 한 가지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 운명이라는 고약한 녀석의 장난질일 것이라고.」

* * *

「서쪽 땅. 여전히 인간이 살 수 없는 불모지에 가까운 그곳으로 다시 떠나는 여행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쉬지 않고 밀려드는 몬스터들의 습격과 마왕에게 복종한 인간들의 권모술수가 끊임없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꺼, 꺽! 도, 도대체 어떻게 알아본 건가?”」

「“보이니까.”」

「내부의 적이 무섭다고 하던가, 하지만 그것도 용사의 눈을 가지고 있는 베른에게는 전혀 소용없었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그의 눈이, 마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인간들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사, 살려 주게! 가족이 인질로 잡혀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악 주제에 시끄럽군.”」

「“끄아악!”」

「한 번 인류를 배신한 자가 두 번은 못 하리라는 법은 없다. 베른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애원하는 노인을 베어 넘기고는 성검에 묻은 피를 마치 더럽다는 듯이 닦아냈다.」

「“베른! 죽일 것까지는 없었잖아!”」

「에단이 기겁하며 외치자, 베른이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왜?”」

「“그, 그야 가족이 인질로 잡혀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거니까…….”」

「“에단, 너는 무언가 큰 착각을 하고 있어.”」

「“……뭘?”」

「“내가 그를 죽인 이유는 그가 마왕의 끄나풀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본질이 악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지만…….”」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단을 향해서 베른이 가볍게 말했다.」

「“그런 값싼 동정심이 또 다른 선의의 피해를 낳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나? 내가 방금 한 일은 악을 배제한 것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생길 수도 있었을 피해자를 구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손을 더럽힐 생각은 없다. 이건 용사로서 내가 응당 짊어져야 할 무게니까.”」

「베른의 말에 에단은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비록 스승인 용사 가람과 오랜 시간을 함께 다닌 에단이었지만, 스승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다. 그가 어떤 것들을 짊어지고 있는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내가 괜할 말을 한 것 같다.”」

「“괜찮다. 아니, 가급적이면 그렇게 계속해서 나를 말려 주었으면 해. 혹시나 내가 운명이라는 녀석에게 먹히지 않도록.”」

「에단은 베른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스승의 유언과 관련이 있을 거라 막연히 추측했다.」

「“알겠어.”」

「이야기가 끝나자, 둘 사이에 기나긴 적막이 찾아왔다. 평소였다면 바네사가 이쯤에서 싱거운 이야기라도 해서 분위기를 환기시켰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그녀는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런 분위기를 못 견뎠는지, 베른이 먼저 말했다.」

「“너, 바네사 좋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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