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Chapter 18: 용사 (9)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말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일까. 에단이 대놓고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뭐, 뭐? 누, 누가 그래!”」
「“누구긴, 지금 네 표정이 열렬하게 말하고 있네.”」
「“어, 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도 유분수지, 애써 표정을 가리려는 에단의 손바닥 사이로 붉은 홍조가 깃들었다. 이내 이 모든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에단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네사에게는 비밀로 해 줘.”」
「“이미 그러고 있다만.”」
「‘아마 그 여자라면 진작 눈치챘겠지만.’ 베른은 굳이 이 뒷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만약 말해 주었다가는 에단이 너무 불쌍해질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러한 베른의 배려를 모르는 건지, 에단이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그러는 너는 어떤데? 너는 바네사를 어떻게 생각해?”」
「“나?”」
「에단의 입장에서는 한 방 먹일 생각으로 한 말이었겠지만, 그에 대한 베른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거슬려.”」
「“……뭐?”」
「“그 여자가 웃는 것도 거슬리고, 밥 먹는 것도 거슬리고, 심지어 숨 쉬는 것마저도 거슬려. 도저히 거슬려서 참을 수가 없어.”」
「바네사가 웃으면 베로니카의 실없는 농담이 생각났다. 바네사가 밥을 먹을 때면 베로니카가 밤마다 떼어 주던 빵조각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바네사의 조용한 숨소리가 들려오면 베로니카와 함께 밤하늘을 바라보며 나란히 누워서 떠들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베른에게 있어서 바네사라는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온통 거슬리는 것투성이였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네.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놈인데 너랑 연적까지 됐다가는 그대로 칼부림이라도 일어날 것 같거든.”」
「‘글쎄.’ 베른은 에단의 그러한 생각에 대해서 굳이 긍정하고 싶지도,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만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바네사에 대한 감정이 기묘했기 때문이었다. 베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언덕 너머로 바네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 오는군. 네 피앙세가.”」
「“……적당히 해 두는 게 좋을 거야.”」
「“농담이다.”」
「베른의 입장에서 언제나 앙숙에 가까웠던 에단을 일방적으로 놀리는 일은 꽤 재미있는 일이었기에, 아무래도 당분간은 지루할 틈이 없을 듯했다.」
「“저 없어도 잘 있었죠?”」
「그녀가 후드를 걷자, 흙먼지와 핏자국으로도 가릴 수 없는 그녀의 찬란한 미모가 다시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한 에단이 결국 도망치자, 베른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를 마중했다.」
「“늘 그렇지. 갔던 일은 잘됐나?”」
「바네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다지 멀지 않은 인근 마을에서 발생한 역병 때문이었다. 용사의 의무가 악의 배제라면, 성녀의 의무는 병자의 구제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저도 늘 그렇죠.”」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는 바네사의 모습에 베른의 표정이 절로 찌푸려졌다. 비록 짧은 대화였으나, 베른은 이런 대화가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이런 대화 역시도 결국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으니까.」
「“그래. 오늘은 이만 일찍 쉬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지.”」
「아직까지는 인간의 영토였기에 성녀인 바네사의 개별 행동도 용인이 될 수준이었지만, 내일이 되면 본격적으로 마왕의 영토로 들어서게 된다. 그 이야기는 즉, 그 후에 찾아올 시련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때문에 베른은 지금 쉴 수 있을 때 쉬어 두려는 생각을 하며 일찍 자리를 잡고서 자리에 누웠다. 그렇게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밤하늘에 달빛이 드리워졌을 때 그의 머리맡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요?”」
「누워 있는 베른을 부른 것은 다름 아닌 바네사였다.」
「“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 해서요. 아무래도 분위기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서.”」
「“별일 아니야.”」
「“있기는 있었다는 얘기네요.”」
「쓸데없이 눈치 빠른 건 여전했다. 베른은 어째서 그 빠른 눈치로 조용히 넘어가 달라는 자신의 뜻은 도대체 왜 눈치를 채지 못하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신경 쓸 거 없어.”」
「“괜히 그러니까 더 신경이 가는데.”」
「“내가 잘못 말했군. 신경 꺼라.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니.”」
「“그렇다면 저도 질문을 잘못 말했네요. 제가 도대체 누구의 피앙세라는 건가요?”」
「그걸 듣다니? 베른은 용사의 감각조차도 가볍게 뛰어넘는 그녀의 청력에 경악했으나, 지금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베른이라 할지라도 이 상황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베른이 입을 꾹 다물자, 바네사가 짓궂은 악동의 표정을 지었다.」
「“왜 말이 없어요?”」
「어쩔 수 없나. 그녀를 상대로 어설픈 거짓말은 통하지 않을 것이 뻔했기에, 베른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으로 진실을 택했다. 다만, 에단의 입장에서는 조금 불쌍한 진실이었지만.」
「“에단이 너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더군.”」
「마치 당연한 사실을 수긍하듯이 바네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건 알고 있어요.”」
「만약 소심하기 짝이 없는 에단이 보았다면 삼 일 밤낮은 홀로 가슴 아파했을 만한 광경. 하기야, 옆에서 봐도 그렇게 티가 나는데 귀신 같은 눈치를 가진 당사자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긴 했다.」
「“그게 전부다.”」
「“정말요?”」
「“정말로.”」
「베른이 덤덤하게 말하자, 바네사의 눈가가 이내 가늘어졌다.」
「“그것참, 거슬리네요.”」
「어디서 많이 듣던 말. 베른이 그 말의 출처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것도 들었군.”」
「설마 했건만 그것까지 들었단 말인가. 베른은 앞으로 바네사에 관해서는 입 밖으로 절대로 내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으나, 이미 뒤늦은 후회였다.」
「“네? 뭘요?”」
「저건 정말로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명백한 놀림. 어차피 더 얘기를 나눠 봤자 손해만 볼 것 같았기에 베른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지금까지 했던 얘기 전부 다 모르는 척해 드릴게요.”」
「베른은 문득 눈앞에 있는 여자가 성녀가 아니라 사실은 천년 묵은 여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예전에 베로니카가 그런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었다. 동쪽 야만의 땅에서는 천년 묵은 여우가 사람을 유혹한다고.」
「“……말해 봐라.”」
「“이야기를 해 주세요.”」
「베른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어렸을 때부터 교단 안에서만 살아가는 바람에 저는 바깥세상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용사인 당신이라면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요. 저한테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해 주세요.”」
「“그건…….”」
「거절해야 한다. 베른은 그렇게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왜인지 모르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베른이 힘겹게 입을 열기 위해서 그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자 베른의 눈앞에 너무나도 그리웠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와 함께 지난날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베로니카! 오늘은 무슨 이야기 해 줄 거야?”」
「-“오늘은…… 좋아. 제도에 갔던 얘기 해 줄까?”」
「베른은 그제야 자신이 이 부탁을 거절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이유에 의해서. 베른은 이것이 바로 그 운명이라는 것을 느꼈다.」
「‘스승님.’」
「베른은 문득 스승의 충고가 떠올랐다. 운명을 믿지 말라는 말. 그러나 지금 그에게 닥쳐오는 운명은 그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알겠다.”」
「“와아! 정말요?”」
「눈을 크게 뜨고서 그에게 안겨든 바네사의 모습을 보며 베른은 그제야 어째서 그녀가 그렇게까지 거슬렸는지 깨달았다. 아니,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애써 외면해 왔을 뿐. 그는 이제 더 이상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
「베른은 그 운명이라는 소용돌이에 자신을 완전히 맡겼다.」
* * *
「우습게도, 마왕의 성까지 가는 그 짧다면 짧은 여행길이, 베른의 기억 속에서 몇 없는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래서요?”」
「“완전히 당했지 뭐야.”」
「“정말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베른은 바네사에게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베로니카에게 들었던 수많은 이야기와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들을. 시간은 마치 도망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빠르게 흘렀고, 어느덧 그들의 앞에 용사 일행의 종착지인 마왕의 성이 나타났다.」
「“……이곳인가.”」
「만약 성녀 바네사가 없었더라면 베른과 에단은 미처 반조차도 오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그 정도로 고단한 모험이었지만, 그들의 눈은 아직도 생기가 넘쳤다.」
「“어서 마왕 놈을 처치하고 돌아가자고.”」
「“그러지.”」
「그렇게 말하며 베른은 뒤에서 힘겹게 서 있는 바네사를 바라보았다. 찬란한 금발이었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어느덧 하얗게 새 버렸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베른과 에단을 무리하게 치유하다가 생긴 부작용이었다.」
「“가지.”」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이곳에 두고 가고 싶었으나, 홀로 마왕의 성 근처에 있는 것이 더 위험했기에 그는 동행을 선택했다. 베른의 손을 맞잡은 바네사가 힘겹게 말했다.」
「“우리 모험도…… 이야기로 남겠죠?”」
「“물론.”」
「“다행이에요.”」
「“곧 죽을 사람처럼 말하기는.”」
「“힘들어 죽겠어서 한 말인데, 티 났어요?”」
「“엄청.”」
「“아깝네. 조금 쉬었으면 했는데.”」
「지금껏 조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던 바네사였지만, 오늘따라 어딘가 이상했다. 하지만 베른은 늘 하는 농담 정도로 넘기고는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그들이 마침내 마왕의 성에 들어서자, 그들을 반긴 것은 음침한 박쥐 떼가 아닌 환한 샹들리에였다.」
「“뭐 이렇게 밝아?”」
「에단의 말처럼, 마왕의 성 내부는 외부에서 보이는 음침함과는 다르게 밝기 그지없었다. 간혹 깃들어 있는 생기는 마치 누군가의 생활공간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때, 바네사가 갑작스럽게 쓰러졌다.」
「“하아…… 하아…….”」
「그 광경을 본 에단이 재빨리 그녀를 안아 들었다.」
「“바네사, 괜찮아?”」
「“조금…… 어지럽네요.”」
「애써 웃고 있었으나, 그녀의 신체에는 이미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어느새 검게 물들기 시작한 그녀의 머리카락. 그 모습을 본 순간 왜인지 모르게 베른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바네사가 숨을 몰아쉬며 베른을 바라보았다.」
「“베른.”」
「“……말해.”」
「“그거 알아요?”」
「“……뭘?”」
「어딘가 굳어 있는 베른의 반응에 그녀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역시 말 안 해 줄래. 내가 지는 것 같아.”」
「그러나 베른은 그녀의 농담에 웃을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에 잔혹한 진실이 비쳤기 때문이었다. 이내 바네사가 기절하자, 에단이 비명을 질렀다.」
「“베, 베른, 바네사가 왜 이런 거야?”」
「“에단.”」
「에단의 눈동자가 거칠게 떨렸다. 그 모습을 보며 베른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 하지만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으니 너는 당장 바깥으로 나가서 해열 작용이 있는 약초 좀 뜯어와 줄 수 있겠어? 알다시피 내가 약초 쪽 지식은 별로 없어서.”」
「“아, 알겠어!”」
「에단이 이곳이 어디인지도 잊었다는 듯이 망설임 없이 마왕의 성을 뛰쳐나가자, 베른이 그제야 쓰러져 있는 바네사를 향해서 조용히 말했다.」
「“……어째서.”」
「그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질문이었다. 의문, 원망, 그리고 애정. 그러나 그 질문에 대답해 줄 이는 이곳에 없었다. 아니, 사실은 단 한 명 있었다.」
「“마왕.”」
「베른이 그 이름을 읊조리자, 쓰러져 있던 바네사의 머리카락이 완전히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갈색 후드는 어느새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몸이 마치 실이 달린 인형처럼 기묘하게 일어섰다. 다시금 떠진 눈은 과거의 푸른빛이 아닌 검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째서 네가…….”」
「베른은 이 상황을 도저히 자신의 머리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바네사에게 속은 걸까? 아니면……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일어난 걸까? 여전히 의문투성이인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한 가지 있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악이자, 용사의 숙적인 마왕이라는 것을.」
「“베른.”」
「평소와 하나도 다를 것 없는 그녀의 목소리에 베른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그녀가 어설프게 웃었다. 아니, 울었다.」
「“구해 줘…….”」
「그와 함께 베른의 몸이 움직였다. 이제 그의 몸은 더 이상 자신의 의지가 아닌 용사의 의지로 움직이고 있었다. 악을 배제하며, 마왕을 처단한다. 오직 그것만을 위한 움직임이었다.」
「“……배제한다.”」
「그리고 일어난 것은 용사와 마왕의 치열한 전투가 아니었다. 아니, 싸움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그저 일방적인 집행에 불과한 그 행위가 끝난 후, 성검이 붉게 물들었다.」
「“금방 끝날 거야.”」
「베른의 표정이 울상을 지었다. 그 말 또한 사실 스스로에게 하는 위안에 불과했다. 악을 배제하는 성검에 의해서 마왕의 몸이 먼지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고마워.”」
「베른은 피가 나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도 마왕이 아닌 바네사로서 자신을 대했다. 하지만 베른은 그러지 못했다. 그녀의 마지막 말 또한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른은 스스로 말했다. 그저, 용사가 마왕을 처치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미 스스로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아…….”」
「모든 일이 끝나서일까, 베른은 자신이 한 일이 용사로서의 대의가 아닌 그저 살인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손바닥에 묻은 피가 유난히 붉었다.」
「“신이시여…….”」
「베른은 바네사가 믿었다는 신에게 기도했다. 신이 화답한 것일까? 아니면 의무를 다한 장기 말의 효용성이 끝났음을 선고하는 것일까? 찬란하게 일어난 빛과 함께 그와 언제나 함께했던 용사의 힘이 그의 전신에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베른이 용사가 아니게 되었을 때, 잔혹하기 그지없는 진실이 그의 앞에 다가왔다.」
「“……어?”」
「베른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용사가 어째서 마왕을 죽여야만 하는지. 그리고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진실은 잔혹했다.」
「“……없어.”」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일 그 어떤 이유나 명분도 말이다. 그저 용사니까, 마왕이니까 서로를 죽이려 했을 뿐. 그 본질 속에는 사실 그 어떤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마왕이라는 존재 자체가 용사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존재였다. 용사가 스스로 악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용사와 가장 가까운 타인에게 전가된 악의 집합체가 바로 마왕의 정체였다. 애초에, 마왕은 용사가 있기에 탄생했다는 이야기였다.」
「“아, 아아…….”」
「베른은 온통 피로 물든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붉고, 또 붉었다. 베른은 소리 없이 오열했다. 영원히 낙인처럼 지워지지 않을 피로 물든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며.」
* * *
「양손에 가득 약초 꾸러미를 진 채로 다급하게 들어온 에단이 처음으로 본 것은 공허한 눈빛으로 피로 물든 바닥에 앉아 있는 베른의 모습이었다.」
「“바, 바네사는?”」
「“죽었어.”」
「“……뭐?”」
「에단이 베른의 멱살을 잡았으나, 베른의 몸은 힘없이 흔들릴 뿐이었다.」
「“바네사 어디 있냐고, 이 자식아!”」
「“그녀가 마왕이었다. 에단.”」
「“뭐? 그게 무슨 개소리야!”」
「“처음부터, 처음부터 잘못됐던 거야. 내가 용사가 된 것부터…… 아니, 그날 살아남았던 것부터.”」
「그제야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낀 에단의 표정이 굳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단 한 가지도 빠뜨리지 말고 말해야 할 거다.”」
「베른은 에단에게 자신이 용사의 운명에서 벗어나게 되며 알게 된 사실을 말해 주었다. 용사와 마왕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든 이야기를 끝낸 베른이 성검을 짚고서 일어섰다. 성검에서는 더 이상 그 어떤 빛도 나지 않았다.」
「“에단, 나는 이제 이 저주받은 굴레를 끊을 거다. 스승님이 미처 하지 못했던 그 일을.”」
「스승인 용사 가람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왕 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스승은 결국 굴레를 끊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은 다를 것이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굴레를 끊어 버릴 것이다. 간신히 바네사의 죽음을 받아들인 에단이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어쩔 생각인데?”」
「“더 이상 용사가 탄생하는 것을 막아야겠지. 나는 성검을 누구도 찾지 못할 장소에 숨길 거다. 그리고 나는…… 어느 한적한 시골로 가서 농사나 지을 생각이야. 용사와 마왕의 굴레는 여기서 끝이다.”」
「베른은 이제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었다. 이 지긋지긋한 굴레를 끊고, 그 역시도 자유로워지리라. 그러나 그러한 베른의 말에 에단의 눈이 점차 광기로 물들었다.」
「“고작…… 도망치기 위해서 바네사가 죽었다고? 고작 이따위 결말을 위해서?”」
「“에단, 다른 방법은 없어.”」
「공허한 베른의 말에 에단이 악을 썼다.」
「“다른 방법이 없다고? 이 모든 게 신의 뜻이라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나는 인정 못 해. 운명으로부터 도망친다고? 아니, 나는 도망치지 않겠어. 맞서서, 정면으로 깨부숴 버리겠어.”」
「그러나, 베른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어느새 또 다른 운명에 사로잡혀 버린 에단의 모습이었다.」
「“이 세계가 운명이라는 녀석의 손바닥 안에 있다고?”」
「에단이 코웃음 쳤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걸 불러오면 될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