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Chapter 19: 플래그 (1)
“…….”
베른의 이야기는 길었다. 분량으로 치면 7화, 글자 수로는 43,838자 정도는 될 만큼.
「다수의 독자가 기나긴 회상 장면에 지루함을 표합니다!」
「소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과거 이야기에 흥미를 표합니다!」
「지나치게 길어진 [과거 에피소드]에 일부 독자가 소리 소문 없이 하차합니다!」
슬슬 망해 가는 징조가 보이는구만.
이런 식으로 망하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겠지만, 왠지 점찍어 놨던 먹잇감을 빼앗긴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건 그렇고, 무언가 찜찜한데…….’
베른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자 은근슬쩍 생기는 의문점.
아니, 그것은 말이 의문점이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느낌에 가까웠다.
‘응?’
내가 그렇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찜찜함에 신경이 쏠려 있을 때, 베른의 이야기를 들은 디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녀석의 표정이 그렇게 변한 이유는 자신을 이 세계로 불러들인 이가 바로 자신의 스승이었다는 충격적인 진실 때문이 아니었다.
“서쪽의 마왕이…… 키리엘이었던 건가.”
베른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디오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많은 것이 담긴 그 침묵을 지켜보던 베른이 조용히 말했다.
“네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이야기는 이게 전부다. 어때? 아직도 마왕을 죽여야만 할 것 같나?”
베른의 말에 디오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건…….”
디오는 베른의 이야기로 이제 용사가 반드시 마왕을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용사의 입장이지, 디오의 입장이 아니었다.
“나는…….”
디오의 목적은 항상 같았다.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사실 마왕을 죽이는 것은 그 목적을 위해서 필요한 과정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마왕은 그저 죽여야 할 대상이자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타인이었으며, 자신은 용사라는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을 타고난 존재였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디오에게 있어서 마왕은 더 이상 타인이 아니었으며, 용사로서 죽여야 할 필요성도 성립이 되지 않았다.
고민이 전혀 필요 없을 그의 행보에, 크나큰 고민이 닥쳐온 것이다.
“…….”
디오의 그런 고민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베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망설이는군. 이해한다. 나 역시도 내 스승의 충고를 끝내 외면했었으니까.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던지 한 가지만 말해 두고 싶군. 결코 후회할 선택은 하지 마라.”
마치 목이 꽉꽉 막히는 고구마를 억지로 쑤셔 넣은 듯한 상황.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수의 독자가 [주인공]에게 닥쳐온 시련에 주목합니다!」
「비극을 좋아하는 소수의 독자가 [주인공]에게 닥쳐온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비극적인 결말을 예상합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적당히 내가 나설 필요가 있었다.
“내가 도와주지.”
“뭐?”
“네가 고민하는 게 뭔지 알아. 그러니 내가 너를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당신에게서 [사기꾼]의 냄새를 감지합니다!」
「[주인공]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뻔히 보이는 당신의 개수작질에 코웃음을 칩니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디오 녀석이 순순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내가 두 번이나 속을 만큼 미련해 보였나?”
물론, 이미 예상했던 사안이었지만.
“그렇다면 증거를 보여 주지.”
“증거? 무슨 증거?”
“내가 타 차원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증거.”
“……뭐?”
내 말에 가만히 있던 베른까지도 나섰다.
“잠깐, 다른 차원이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베른에게는 생소하기 그지없는 말.
그러나 디오 녀석에게 있어서는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애써 부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은 이미 충분할 정도로 내 말에 동요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일단 보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을걸? 하이디.”
내 부름과 함께, 갑작스럽게 어디선가 불쑥 머리를 내미는 하이디의 모습.
마치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등장이었다.
“응.”
베른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소녀도 있었군. 왜인지는 몰라도 이상하게 자꾸만 까먹는단 말이야.”
그야 그럴 수밖에.
「등장인물, ‘하이디’의 [공기] 속성이 강하게 활성화 중입니다!」
작가 놈마저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의 압도적인 존재감은 설사 [진주인공]일지라도 일개 등장인물이 쉽사리 인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다수의 독자가 새삼 잊고 있었던 등장인물, ‘하이디’의 존재에 대해서 다시금 상기합니다!」
“하이디, 그걸 보여줘.”
“그걸?”
“그래.”
“조금 부끄러운데…….”
“괜찮으니까 어서.”
「야설 빌런이 당신과 ‘하이디’의 기묘한 대화에 콧김을 내뿜으며 큰 흥미를 표합니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기는.
어쨌거나 지금은 저놈과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나 할 때가 아니었기에 내가 가볍게 무시하고는 하이디를 바라보았다.
“꺼낸다.”
「다수의 독자가 ‘하이디’가 꺼낸 정체불명의 물건에 대해서 큰 궁금증을 표합니다!」
하이디가 품에서 꺼낸 물건의 정체는 작은 빗이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빗.
베른이 실망했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뭐야? 별거 아니잖아.”
「야설 빌런이 독자들을 우롱한 당신과 ‘하이디’의 기묘한 대화에 깊은 적개심을 표합니다!」
「다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실망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디오의 반응은 달랐다.
경악하다 못해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반응.
“그걸 어떻게…….”
“저게 도대체 뭔데 그래? 색깔이 조금 특이하긴 하지만 고작해야 빗이잖아.”
베른의 말처럼, 하이디가 내민 건 고작 빗이 맞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오가 이토록 열렬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빗의 재질.
척 봐도 느껴지는 반들반들한 그 광택은 명백한 플라스틱의 그것이었다.
고분자 화합물인 플라스틱은 명백하게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이었고, 때문에 내가 증거로 내세운 것이었다.
물론, 이 물건은 불지옥 반도의 물건이었지만 사실 여부 따위는 나에게 있어서 전혀 상관없었다.
문제는 눈앞에 있는 [주인공] 녀석을 이용해 먹을 수 있는가, 아닌가.
오직 그뿐이었다.
“어때? 충분한 증거가 되었나?”
“…….”
혼란으로 물든 디오 녀석의 얼굴.
그러나 그 혼란이 수습되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믿겠다.”
“당연히 그래야지.”
“하지만 조건이 있다.”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간계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는 [주인공]의 의지를 지지합니다!」
어차피 순순히 납득하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이미 충분히 예상했었다.
더불어서 그 조건이 무엇일지 역시도.
“내 정체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거로군.”
“……맞다.”
정 궁금하다면, 딱히 말해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그 정체 역시도 내가 만들어 낸 하나의 [설정]에 불과했으니까.
“왕자.”
“……뭐?”
“왕자라고.”
“왕자라니? 네 정체가 왕자라는 말인가?”
“맞아.”
디오가 코웃음을 쳤다.
“어이가 없군. 제아무리 왕자라지만, 나에 대해서 그토록 잘 알고 있고, 타 차원까지 오간다고? 그렇게 적당히 넘어가려는 속셈이라면, 나 역시도 너를 믿지 못해.”
“이 세계의 왕자라는 말은 안 했는데.”
“……뭐?”
이곳보다 훨씬 더 구멍이 숭숭 뚫린 곳이지.
“나는 이곳과는 다른 세계에서 왔다. 나는 그곳의 왕자다.”
내 말을 들은 디오와 베른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 정도로 충격적인 말이라는 뜻이었다.
“……보통 소년이 아니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른 세계의 존재라니…… 황당해서 말이 더 안 나오는군. 그렇다면 혹시 소녀도?”
이미 마족의 모습을 보였던 하이디였기에, 어찌 보면 베른의 질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맞아요. 저는 왕자님과 함께 이곳으로 왔습니다.”
“허어…….”
베른이 허탈하게 웃을 때, 디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믿기 어렵군.”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드디어 납득이 된다. 도저히 납득 되지 않았던 네 존재가.”
“내 제의를 받아들인다는 말로 알아들어도 되겠지?”
“그래. 네 제의를 받아들이겠다.”
「일부 독자가 당신의 간계에 꾀어 넘어간 [주인공]에게 고구마를 호소합니다!」
「또 다른 일부 독자가 오직 진실만을 말한 당신의 발언을 토대로 당신에게 악의가 없음을 추측합니다!」
「소수의 독자가 [주인공]의 선택을 지지합니다!」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베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뭔가 충격적인 말이 많았지만, 어쨌든 잘됐군. 이제 우리 목표는 한 개만 남은 건가?”
“그런 셈이죠.”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렇게 말한 베른은 어딘가 감성적으로 보였다.
아무래도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옛날 생각에 빠져든 모양.
굳이 방해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기에 나는 가만히 뒤돌아서서 디오를 바라보았다.
“먼저 말해 두지만, 결코 쉽지는 않을 거다.”
아무리 날림 설정에 클리셰 중독자라지만 상대는 명색이 작가다.
이 세계에서의 녀석은 신이었고, 실제로도 신으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체격 차.
그것이 지금 내가 하려는 싸움의 정체였다.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낼 거다.”
[주인공] 녀석의 말처럼, 나 역시도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낼 생각이었다.
“좋아.”
그렇게 나와 디오 녀석이 결의를 다지고 있을 때, 베른 역시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혼자서 조용히 주먹을 꽉 쥐었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조용한 각오.
그러나 결코 가볍지는 않은 각오였다.
그 순간.
「베른은 지금껏 자신이 지나온 나날을 되새겼다. 운명이라는 고약한 장난에 희생되었던 삶.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이 지긋지긋한 굴레를 끊을 것을 다짐했다.」
갑작스럽게 드는 이질감과 함께, 눈앞에 이상한 장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이건 그보다 훨씬 더 익숙한 것이었다.
「베른은 그렇게 마침내 자신의 죽음을 각오했다.」
「용사로서.」
마치 소설 속의 어떤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
이 현상이 무엇을 말하는지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사망 플래그]가 요동칩니다!」
「[사망 플래그] 성립까지 남은 시간: 71시간 47분」
마침내, 녀석이 직접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