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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이후의 소설 속-81화 (81/164)

◈ 81화 Chapter 19: 플래그 (2)

과거에 세상을 구했던 영웅이 다시 한번 세상을 위해서 나서고, 결국 쓰러지는 이야기.

흔하디흔하고 낡아빠진 이야기였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베른의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더 이상 지금처럼 여유롭게 이야기나 나눌 시간은 없다는 뜻이었다.

“……서두르죠.”

“왜 그래?”

“시간이 얼마 없어요.”

베른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눈치 빠른 그답게 무언가 눈치챘다는 뜻.

“……또 무언가 감추고 있군. 어차피 딱히 말해 줄 생각은 없겠지?”

그래, 보통은 그랬을 터.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당신은 곧 죽을 겁니다.”

“뭐?”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진주인공]을 맹렬하게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당신의 발언을 불쾌하게 여깁니다!」

「[사망 플래그]가 일부 파괴됩니다!」

「[사망 플래그]가 일부 파괴됨에 따라, [사망 플래그] 성립까지의 시간이 일부 연장됩니다!」

「[사망 플래그] 성립까지 남은 시간: 71시간 57분」

‘이 정도로는 무리였나.’

물론 약간의 성과가 있기는 했지만, 베른의 생명이 고작 10분 정도 늘어났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지금 필요한 일은 이 [사망 플래그] 자체를 부숴 버리는 일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베른이 그렇게 말한 그 순간,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요하기 짝이 없던 풀숲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마치 무엇인가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처럼.

「[사망 플래그]가 강렬하게 진동합니다!」

제일 먼저 이변을 알아차린 디오가 표정을 찌푸렸다.

“온다.”

무엇이 올지는 나도 아직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초대한 손님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베른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소리죠.”

내 얼굴을 본 베른이 어이없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다른 차원의 인간들은 다들 너처럼 뻔뻔한가?”

“제가 좀 유별나긴 하죠.”

“그것참, 다행이군.”

풀숲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온 것은 이 세계에서 몇 번 본 적도 없던 고블린 떼였다.

“캬오오!”

“죽여! 죽여!”

“고기다. 고기!”

대체 몬스터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체계가 왜 동일한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런 게 한두 개도 아니고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게 편할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고 말이다.

‘이놈들은 아니다.’

아직 베른이 죽음에 다다르기 위한 시간은 71시간씩이나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 몬스터들의 목적은 베른의 죽음보다는 그저 우리 일행의 체력을 빼놓고 극한으로 몰아넣기 위한 장치라는 소리.

그렇다고 해서 무시하고 도망치면, 또 도망치는 대로 체력을 소모할 테니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였다.

‘도망칠 수 있다면 말이지만.’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건지, 고블린 떼는 마치 땅에서 솟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우리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최소한 수백에서 수천 마리였으니, 앞으로 쏟아질 수가 몇만이 될지 몇십만이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일행에 용사가 둘이나 있다지만 체력을 소모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숫자.

당연히 그런 내막을 알 리가 없는 베른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고작 이런 놈들이 날 죽일 거라고 말한 거냐? 수가 조금 많기는 해도, 고작 고블린 정도가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당연한 말이었으나, 문제는 지금 이 습격이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고작 튜토리얼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이 튜토리얼에서 베른을 아무런 상처 없이, 그리고 철저하게 [생존 플래그]로 이끄는 일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아마도?”

“어이가 없군.”

“자신감에 찬 그 태도, 좋아요. 앞으로도 쭉 그러길 바랄게요.”

“……말을 말지.”

「제3자의 도발로, [생존 플래그]가 미약하게 진동합니다!」

「[사망 플래그]의 효과로, [생존 플래그]가 무효화됩니다!」

어차피 고작 말 몇 마디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최소한의 돌파 방법은 확인한 셈이었으니 꽤 괜찮았다.

그때, 디오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잡담은 끝났나?”

“아까 전에.”

“그러면 조금 거들지?”

그곳에는 어느새 디오가 홀로 고블린 떼와 치열하게 전투 중이었다.

비록 용사의 힘도, 성검도 없는 그였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고작 고블린 따위에게 당하지는 않는 듯 했다.

“잘하고 있네. 조금만 더 힘 써 봐.”

“……뭐?”

제아무리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있다지만 명색이 [주인공]이다.

베른과는 다르게 최소한 죽지는 않는다는 소리.

그렇다면 그 점을 더 철저하게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어이쿠, 뒤 조심해.”

고블린의 머리를 하나 더 자른 디오의 눈빛이 당장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바라보았다.

뭐, 지가 째려보면 어쩌겠는가.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좀 연약해서. 워낙 귀하게 자랐다 보니. 알잖아?”

“고블린 다음에는 너다.”

“최소한 고블린은 전부 다 잡아 주겠다는 말이네?”

“……망할 놈.”

「[주인공]의 팬을 자처하는 일부 독자가 당신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습니다!」

「다수의 독자가 당신에게 휘둘리는 [주인공]의 모습에 고구마를 호소합니다!」

「등장인물, ‘용사 디오’의 [호구] 성향이 증가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디오에게 이 상황을 전부 다 맡길 수는 없었다.

용사의 힘이 있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의 디오로서는 고작해야 고블린 몇십 마리를 상대하는 것이 전부일 터.

“아자토스.”

[끼에에!]

비대칭 전력.

밸런스 파괴범.

드래곤마저도 한 수 접어 주는 지금의 아자토스는 그 명칭에 딱 어울리는 존재였다.

그 이유는 굳이 설명해 봤자 입만 아프리라.

[끼히이이!]

아자토스의 꼬리가 한 번 스쳐 지나가자, 순식간에 고블린 수백 마리가 흔적도 없이 바스라졌다.

가히 절대적인 무력.

만약 아자토스가 이대로 날뛰기만 해 준다면, 고블린 따위는 몇 마리가 오던지 아무런 상관도 없을 터였다.

그렇게 아자토스가 몇 번이나 꼬리를 휘둘렀을까.

사방이 고블린의 시체로 쌓이고, 또 그 시체를 넘어선 고블린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려올 때였다.

「호문쿨루스는 약 2만 마리 정도의 고블린을 거침없이 학살한 후, 그제야 자신의 몸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갑작스럽게 눈앞에 나타난 새로운 전개.

자칭 신 녀석이 또다시 개입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아자토스의 몸이 급격하게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끼에에…….]

「과거, 치열했던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호문쿨루스는 결국 다시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깨어날 날이 언제인지 기약이 없는, 그런 잠이었다.」

아자토스가 다시 내 품으로 돌아와서 잠이 드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망할 놈.’

어차피 막강하다 못해 상식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성장한 아자토스를 녀석이 이대로 날뛰도록 방치할 리가 없다고 생각해 두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쉬운 것은 아쉬운 거였다.

더군다나 나름의 [개연성]까지 챙긴 것을 보니, 아무래도 과거의 경험에서 교훈이라도 얻은 모양.

‘쉽게 가게 두지는 않는다는 거지.’

어차피 예상했던 사태이기는 했으나, 문제는 무려 2만 마리나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고블린들의 수가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고블린들은 모조리 다 긁어모아 온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

‘개연성이 대놓고 의심되기는 하지만…….’

문제는 내가 아무리 [개연성]에 의구심을 제기하고 싶어도, 이 소설 내의 시점들이 전부 다 우리 일행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외부의 상황을 [독자]들이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시점’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이 없다는 점을 철저하게 이용했다는 뜻.

“……끝이 없군.”

치열하게 성검을 휘두르고 있는 베른의 말처럼, 저 압도적인 수는 마치 처음부터 아자토스를 계산에 넣은 것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제법…… 위험한데.’

물론, 베른의 예정된 사망 시간이 있으니 당장 이 자리에서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흘러가는 것 자체가 이미 녀석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뜻.

때문에 상황을 바꿀 수 있다면 이 자리에서 바꾸는 것이 맞았다.

“끄윽!”

용사 디오의 몸이 어느새 피칠갑을 한 채로 좀비처럼 검을 휘둘렀다. 어차피 [주인공]이라서 죽지는 않을 테지만, 그 정도로 핀치에 몰려 있다는 뜻.

‘어쩔 수 없나.’

상대가 이렇게까지 룰을 어기면서 나온다면야, 나 역시도 언제까지고 정정당당을 지켜 줄 생각은 없었다.

“하이디.”

내가 하이디를 부르자, 도대체 어디 있었는지 하이디가 내 옆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응.”

「등장인물, ‘하이디’의 [공기] 속성이 강하게 발동 중입니다!」

뿔과 날개조차도 펴지 않은 모습을 보니, 고블린들과 싸우기는커녕 편하게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

아니면 고블린들조차도 못 보고 지나쳤거나.

어쨌거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그곳’을 떠나올 때 상당히 많은 짐을 챙겨 왔던 거 알아?”

“응? 그랬어? 짐은 꽤 간소해 보였는데.”

어찌 되었건 간에 내가 지금 이런 다급한 순간에 굳이 하이디에게 말을 건 이유는 간단했다.

말하자면, 떡밥 뿌리기였다.

“‘그분’이 주신 아주 특별한 보관 도구가 있거든.”

당연히 그딴 게 있을 리가 만무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은 간단했다.

없어도 있는 척, 있으면 많은 척.

이 세계에서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그분이라고? 설마…….”

“그래, 맞아. 내 부모에게 받은 선물이지. 나는 그곳에 꽤 많은 걸 넣어 왔어.”

“그게 뭔데?”

“기다려 봐. 보여 줄 테니까.”

「대다수의 독자가 위기에 빠진 [주인공] 일행을 구원할 당신의 특별한 물건을 기대합니다!」

내가 멋들어지게 허공에 손을 뻗었다.

마치 어느 소설 속에서 대마법사가 아공간 창고에서 물건을 꺼내기라도 할 것처럼.

물론, 지금 내가 사용할 것은 아공간 마법 따위가 아니었다.

「[개연성 무시]를 사용하였습니다!」

그 순간, 공간이 일그러지며 내 손에 무엇인가가 잡히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내 손에 이끌려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어느 흉악한 물건.

그것을 본 베른은 고개를 갸우뚱했고, 디오는 경악했다.

“……그게 뭐냐?”

“그, 그건 설마…….”

“너, 저게 뭔지 아는 거냐?”

“그, 그야, 저건…….”

여전히 경악한 디오와 멍한 표정을 지은 베른을 향해서 내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아, 이것은,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이란 것이다. 쓸모라고는 조금도 없는 네놈들 머리에 수박만 한 구멍을 낼 수 있지.”

치열한 서바이벌에서, 움직이는 과녁 맞히기로.

이 튜토리얼의 장르가 변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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