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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이후의 소설 속-82화 (82/164)

◈ 82화 Chapter 19: 플래그 (3)

가끔씩, 그런 장면들이 있다.

총알은 우습게 튕겨 내면서, 자칭 소드 마스터들이 휘두르는 검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참히 썰려 나가는 몬스터들이 나오는 장면.

누군가가 본다면 터무니없다며 욕을 쏟아낼 법한 장면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세계들도 나름대로의 개연성을 위해서 마나라든지 이능력이라든지 하는 몇 가지 설정들이 존재하고는 했다.

그러나 이곳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검과 마법, 그리고 용사와 마왕이 존재하는 세계.

애당초 총기가 존재하지 않는 이곳은 그런 장소였고, 때문에 [작가] 놈에게는 그런 [설정]들을 짜낼 필요성이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꾸에에엑!”

“저, 저게 무엇…… 꾸엑!”

평균적으로, 고블린들의 신체 능력은 성인 남성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즉, 수만 많지 본질적으로는 별 볼 일 없는 상대라는 뜻.

물론, 상황이나 개체에 따라서 얼마든지 흉악한 놈들이 있을 수야 있겠지만, 상관없었다.

총알은 누구에게나 평등했으니까.

「대다수의 독자가 터무니없는 당신의 비밀병기에 빵 터집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은 당신의 모습에 유쾌함을 표합니다!」

콰카카카캉!

둥!둥!둥!둥!

연달아 총성과 착암기 소리가 울려 퍼진 후.

그 끝을 모르고 해일처럼 몰려오던 고블린 떼의 습격이 고작 한순간에 지나간 막강한 화력에 의해서 사정없이 휩쓸려 나갔다.

고블린들이 오랜 천적을 만났다고 착각을 할 만큼.

“쿠에엑!”

“드래곤, 드래곤이 돌아왔다!”

“드, 드래곤이라고?”

“도망가!”

이 광경을 바라보던 베른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저런 게 존재했다니, 어이가 없군.”

대체 몇 발을 쏘았을까.

본래의 기관총이었다면 총알이 부족해지거나 총열이 과열되어서 더 이상 쏘지 못했을 상황이 몇 번이고 찾아왔을 테지만, 나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딴 건, 개나 줘 버리면 되는 거였으니까.

「[개연성 무시]를 사용하였습니다!」

「[개연성 무시]를 사용하였습니다!」

「[개연성 무시]를 사용하였습니다!」

“꾸에에엑!”

“도망가!”

고블린은 비록 몬스터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의 공포조차도 모르는 맹목적인 좀비 떼는 아니었다.

그렇게 어느새 고블린들 사이에서 번지기 시작한 공포는 순식간에 그 끝을 모르고 번져나갔고,

“비켜!”

“나부터야!”

“꾸엑!”

끝난 건가.

만약 저 수만 마리의 고블린들이 그대로 덤벼들었다면 제아무리 이런 무식한 화력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꽤 귀찮아졌을 것이다.

괜히 좀비 영화에서 군인들이 총씩이나 들고 팔다리도 제대로 안 달린 놈들에게 쩔쩔매는 게 아니다.

“죽어!”

온몸에 피를 칠한 채로 반쯤 정신이 나간 디오 녀석이 도망가던 고블린 한 마리의 등 뒤에 칼을 꽂아 넣었다.

“이제 그만해.”

내 제지에 그제야 고개를 들고서 주위를 살핀 디오의 눈이 간신히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끝난 건가?”

“그래.”

내 입장에서야 슈팅 게임만도 못한 단순 버튼 게임이었지만, 바로 옆에서 내 주위를 지키던 디오와 베른에게 있어서는 말 그대로 순간순간이 생사를 오가는 치열한 생존의 장이었으니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대다수의 독자가 위기를 극복해 낸 당신의 기지에 감탄합니다!」

「[주인공]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당신의 능력에 감탄하며 후원금을 전달합니다!」

「현재 적립된 후원금: 1,450,100G」

어느새 정신없이 들썩이던 수풀은 잠잠해졌고, 주변에 보이는 고블린들도 하나 같이 도망치기 바빴다.

싸움이 끝난 것이다. 아니, 그렇게 보이고 있었다.

‘너무 쉽게 끝났는데.’

비록 치트키에 가까운 물건을 꺼내기는 했다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건 너무나도 이상했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그런 내 낌새를 알아챘는지, 베른이 물었다.

“왜 그래?”

“아뇨. 조금…… 찜찜해서요.”

“역시 네 생각도 그렇군.”

역시라고?

등장인물인 베른이 미리 인지하고 있을 정도라면 사실상 이미 일어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어디지?’

그러나 주변은 조금 전까지의 습격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였다.

쿠웅!

쿵!

고요함이었기에 더욱 묵직하게 울려 퍼진 발걸음 소리.

“……아무래도 기다리고 있던 게 오나 보군.”

베른의 말처럼, 이내 모습을 드러낸 그것의 정체는 머리에 왕관을 쓰고 다른 고블린들보다 덩치가 다섯 배는 더 큰 고블린이었다.

그 거대 고블린은 나타나자마자 눈앞에 도망치던 어느 고블린의 목을 치고는 크게 외쳤다.

“꾸엑!”

“누가 감히 도망가느냐?”

다른 고블린들과는 다르게 어눌하지 않고 명확한 언어.

그 덩치와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저 고블린이 우두머리인 듯 했다.

“꾸에엑! 대, 대왕님!”

“지금부터 내 뒤로 서는 놈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래, 그렇군.

어쩐지 시시하게 끝난다 싶더니만, 아무래도 메인 디쉬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 처음 보는 녀석들이지만, 내 백성들을 이렇게나 죽여 댔다니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구나. 죽여주마!”

그와 함께 울려 퍼지는 우두머리 고블린의 포효.

「일부 독자가 [보스 몬스터]의 등장에 주목합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베른이 성검을 다시 잡았다.

“내가 나서지.”

「대다수의 독자가 [진주인공]의 활약을 기대합니다!」

「다수의 독자가 곧 샌드백 신세가 될 [보스 몬스터]에게 약간의 연민을 느낍니다!」

그래, 본래라면 그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이 습격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베른이었으니까.

“기다려요.”

“왜?”

“디오가 해결할 겁니다.”

“……뭐?”

별로 놀랍지도 않은 발언에 베른이 그처럼 황당한 표정을 지은 이유는 간단했다.

용사의 힘과 성검을 떠나서, 디오의 몸 상태 자체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진심이냐?”

“제가 언제 허튼소리 하는 거 봤어요?”

“아무리 그래도…….”

베른의 시선이 슬쩍 디오를 훑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디오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그는 용사입니다. 조금 더 믿어 보시죠.”

“……알았다.”

이렇게 철저하게 본인을 제외하고서 이루어진 비밀스러운 대화가 끝나자, 내가 슬쩍 디오의 등을 떠밀었다.

“네 상대야.”

“……조금 크기는 하지만, 이미 많이 상대해 보았던 상대다.”

그래, 아마 그럴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는 용사의 기준에서 보자면 그저 튜토리얼 던전에서 등장하는 덩치 큰 고블린 정도에 불과할 테니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용사의 힘과 성검을 지닌 용사로서의 기준이지, 지금의 디오의 기준은 아니었다.

물론, 지금 이 시점에서 고작 고블린 우두머리 정도가 나타났다고 해서 우리가 이렇게까지 쩔쩔맬 이유는 없었다.

고블린 대왕이건 우두머리건 어차피 머리에 총알 몇 발 박아 주면 끝날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굳이 이런 번거로운 행동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여기서 디오를 성장시킨다.’

그것은 용사로서가 아닌, 디오 개인이 가진 힘을 의미했다.

디오가 가진 가능성은 무척이나 크다. 그것은 용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인공]이기 때문에 가지는 가능성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않고, 무슨 일이 있어도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존재.

때문에 지금 같은 상황을 이용해서 약간의 위기로 내모는 것은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네 상대는 나다.”

디오가 나서자, 그제야 우두머리 고블린이 못이 박힌 통나무 하나를 들어 보였다.

“다 죽어 가는 놈이 나타났군. 너부터 죽이고, 다른 놈들도 모조리 죽이겠다!”

말은 험악했지만, 사실 우리가 토론하고 이런저런 잡담을 나눌 시간까지 기다려 준 걸 보니 역시 이 뻔한 세계의 몬스터답게 여간 젠틀한 게 아니었다.

“크오오!”

비록 드래곤이나 여타 다른 강력한 존재에 비하면 마치 참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빈약하기 짝이 없는 포효였으나, 지금 상태의 디오에게 있어서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크윽!”

그렇게 시작된 우두머리 고블린과 디오의 전투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치열했다.

디오는 썩어도 준치라고 명색이 용사라고 우두머리 고블린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며 검으로 자잘한 상처를 내고 있었으나, 너무나도 지친 상태와 온몸에 입은 상처에서 쏟아지는 피로 인해서 제풀에 무너져 가고 있었다.

“요리조리 잘도 피하는구나!”

그렇게 공방을 이어 가던 디오의 팔이 결국 축 늘어지고, 마침내 그에게 위기라고 할 만한 순간이 다가왔다.

물론, 말이 위기지 정말로 위험할 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위기에 빠진 주인공] 클리셰가 발동합니다!」

「[주인공]의 전투력이 [50%] 상승합니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꽤 순차적이었다. 디오가 날이 나간 철검으로 우두머리 고블린이 들고 있던 통나무를 통째로 베었고, 이어서 마치 물 흐르듯이 이어진 동작에 우두머리 고블린의 머리를 베었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낸 디오가 남아 있는 다른 고블린들을 응시하자, 고블린들이 기겁했다.

“대, 대왕님이 당했다!”

“모두 도망가!”

「다수의 독자가 [주인공]의 활약에 환호합니다!」

고블린들이 모두 다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디오가 기절하듯이 쓰러졌다.

“고생했다.”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이 아무런 상처 없이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사망 플래그]에 미약한 균열이 생깁니다!」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1.16%」

고생에 비해 소득이 조금 적은 게 아닌가 싶었지만, 상관없었다.

사장이 임금을 체불하면, 고용노동부에 민원을 넣어서라도 받아 내면 그만이었으니까.

“베른.”

“어.”

대답이 퉁명스러운 걸 보니, 아무래도 디오의 전투를 바라보면서 내심 가슴을 졸였던 모양이다.

“아까 저 우두머리 녀석이 하는 말 들었어요?”

“그래, 아무래도 우리를 노린 건 그냥 우연이었던 모양이야. 운이 안 좋았다고 봐야겠지.”

“아니요. 우연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이상하지 않아요? 한두 마리도 아니고 저 수많은 고블린이 그저 지나가는 길이었다는 게.”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발언에서 [개연성] 오류를 지적합니다!」

「[개연성]이 요동칩니다!」

자, 이제 어쭙잖게 건 싸움에 대한 결산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말해 봐.”

“제가 당신이 죽을 운명이라고 말했었죠?”

그제야 베른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재미있는데.”

“그런 의미로, 저에게 계획이 있습니다.”

“말해 봐.”

그렇게까지 베른을 죽이고 싶다면야, 소원대로 해 주면 그만.

“죽어 주세요. 가급적이면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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