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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이후의 소설 속-83화 (83/164)

◈ 83화 Chapter 19: 플래그 (4)

베른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농담을 제법 진지하게 하는데.”

“농담 아닌데요.”

“그러면 정말로 나를 죽이기라도 하겠다고?”

“못할 것도 없죠.”

“허어.”

헛바람을 켠 베른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래, 늘 이런 식이었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그 잘난 계획을 물어봤자 설명해 주지 않을 테지?”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아무래도 나랑 하도 붙어 다니다 보니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낌새에 대해서 눈치는 채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말해 줄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베른이 말했다.

“그러면 질문을 바꾸지. 네가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고 세 말하면 입이 아프다.

“아니요.”

“그런데 나를 죽이겠다고?”

“제 손으로 죽이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만.”

베른이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면 뭐, 나보고 자살이라도 하라고?”

“그러면 편하겠지만, 아무래도 그렇게까지 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잘 아는군.”

“그래서 조금 번거롭겠지만, 어쩔 수 없죠.”

그와 함께 내 뒤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호문쿨루스 아자토스.

웬만한 기사라 할지라도 보는 것만으로도 절망에 빠져 버릴 것 같은 아자토스의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른은 마치 이웃집 애완견을 보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큰 것 같지 않아? 도대체 뭘 먹인 거야?”

“사랑과 애정이요.”

“퍽이나 그렇겠군.”

약간의 사담이 끝난 후, 베른이 넣어 두었던 성검을 다시 뽑아 들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마지막으로 묻겠는데, 생각을 바꿀 생각은 없겠지?”

“당연하죠.”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 같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될 줄은 몰랐군.”

“실망인데요. 저는 꿈에도 몰랐었는데.”

농담처럼 말했지만 이 말은 사실이었다.

베른은 그 본질부터가 어딘가 꺼림칙한 상대이니만큼, 결코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상대였으니까.

물론, 상대가 내 진심을 알아주는 건 별개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기는.”

「대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갑작스러운 변모에 충격을 받습니다!」

「[진주인공]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당신의 뜬금없는 배신에 [개연성] 오류를 지적합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당신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당신이니까 그럴 수 있다며 억지로 납득합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배신자] 속성이 추가됩니다!」

지금 베른에게 닥친 문제는 간단했다.

그에게 현재 [사망 플래그]가 떠 있고, [작가] 놈은 그것을 이용하려 한다는 점.

모르긴 몰라도, 확실한 것은 이대로 방치한다면 베른은 결국 죽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유감스럽지만, 우리 일행의 전력은 이미 [작가] 놈에게 있어서는 상정 내였다.

이번에야 어떻게든 넘겼다지만, 결국 언젠가는 한계가 찾아올 수밖에 없다는 뜻.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사망 플래그]를 무효화시킬 정도로 강력한 [생존 플래그]를 띄우는 일이었다.

예를 들면, 베른을 죽음의 위기로 내몬 끝에 어느 이름 없는 절벽 아래로 떨어뜨린다던가.

“아자토스.”

[끼이잇!]

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어.”

* * *

[끼기깃!]

치열하다면 치열한 전투.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베른의 입장에서였고, 다른 관점에서 보면 애초에 성립이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정말이지, 말 같지도 않은 괴물이야.”

전신에 난 자잘한 상처를 통해서 피를 꾸역꾸역 쏟아내는 베른의 모습은 수만의 고블린들의 습격에도 끄떡없었던 그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분명히, 용사라는 존재는 인류에게 있어서 재앙이나 다름없는 마왕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결전 병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가 상성상 명백히 우위를 점하고 있는 마왕일 때나 가능한 소리.

결코 지금 이 자리에서 통하는 말은 아니었다.

「[위기에 빠진 진주인공] 클리셰가 발동합니다!」

「[진주인공]의 전투력이 [75%] 상승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사의 힘을 되찾고 성검까지 지닌 베른의 힘은 막강했다. 이제 드래곤조차도 한 수 아래로 볼 정도로 성장한 아자토스가 큰 피해를 감수하게 했고, 결국 잠자코 있었던 하이디까지 나서게 만들었다.

“……치사하긴.”

“미안해요. 딱히 악감정은 없어요.”

뿔과 날개를 펼치고서 마족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 하이디의 가세와 함께, 미묘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힘의 균형도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망할.”

그 이후의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베른은 분전했지만, 인간의 몸으로 규격 외의 존재인 아자토스와 마족을 모두 다 상대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어느 이름 모를 절벽 끄트머리까지 몰린 베른의 발밑으로 흙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습니다.”

“……그런 것 같군.”

철저하게 의도된 연출.

이제 남은 것은 베른을 저곳으로 떨어뜨리는 일뿐이었다.

「다수의 독자가 [진주인공]이 저 아래로 떨어져 내릴 것이라 예상합니다!」

「[생존 플래그]가 요동칩니다!」

“잘 가십시오.”

내 손짓과 함께 아자토스의 거대한 아가리가 벌어졌다.

그리고 일어난 광경은 마치 어디선가 한 번쯤 본 적이 있는 듯한 광경이었다. 아슬아슬하게 허공을 가르는 아자토스의 아가리와 어느새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베른의 모습.

절벽 아래에는 당연하듯이 한 번 흘러내려 가면 다시는 올라올 수 없을 만큼 거친 계곡물이 흘렀고, 그곳에 떨어져 내린 베른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수의 독자가 너무나도 뜬금없이 [진주인공]을 공격한 당신의 모습에 깊은 배신감을 느낍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이런 복선도, 개연성도 없는 반전은 반전이 아니라며 [작가]의 정신건강 상태를 의심합니다!」

「대다수의 독자가 괴상한 전개 방식에 맹렬한 비난을 쏟아냅니다!」

그 광경을 바라본 하이디가 말했다.

“죽었나? 한 번 내려가 볼까?”

“됐어.”

정말로 확인이라도 했다가는 이 모든 일이 수포가 되어 버릴 텐데 그럴 수야 없지 않겠는가.

「[생존 플래그]가 거칠게 요동칩니다!」

이게 누구의 [생존 플래그]일지는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제 마무리만 남은 상황.

내가 이미 쓰여 있는 대본을 읽듯이 말했다.

“‘이 높이에서 떨어지고서, 살아남을 수는 없을 테니까.’”

죽은 이도 살리는, 그런 기적의 대본을.

「[생존 플래그]가 발동합니다!」

「[생존 플래그]의 효과로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체력이 일정 수치 이하로 하락하지 않습니다!」

「[생존 플래그]의 효과로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체력 재생력]이 [500%] 증가합니다!」

「[생존 플래그]의 효과로 [사망 플래그]의 효과가 일부 약화됩니다!」

* * *

우두머리 고블린과의 사투 후에 기절했던 디오가 깨어난 것은 조금 더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지?”

“대충 6시간 정도.”

이야기를 들은 디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미안하다. 시간이 얼마 없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건 됐어.”

“됐다고?”

그리고는 디오의 시선이 재빨리 일행을 훑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이질감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베른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군.”

내가 넘어야 할 산이 한 가지 더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택한 방법은 진실이었다.

“그는 죽었어.”

“……뭐?”

디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별거 없어. 내 손으로 그를 절벽으로 밀었고, 그는 죽었지.”

“네가 죽였다고?”

앞뒤를 싹 다 잘라먹은 내 말에 디오의 표정이 처음에는 황당함으로, 그다음에는 분노로 물들었다.

“미친 건가?”

“아니, 멀쩡해.”

“그런데 동료를 네 손으로 죽였다고? 그는 내 동료는 아니었지만, 너에게는 동료였을 텐데.”

나름대로 선을 긋고 있었지만, 이미 베른의 이야기를 들은 디오에게 있어서 베른은 더 이상 단순한 남이 아니었다.

함께 용사라는 운명을 지닌 공감대를 가진 자.

바로 그렇게 때문에 디오를 더욱 자극할 필요가 있었다.

“동료애에 대해서 훈계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 말은 네 동료나 잘 챙기고 말해. 어디서 어느 노처녀 정령이 혼자서 울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디오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제 몸도 가누기 힘든 상태였고, 애초에 그가 멀쩡하다 한들 지금의 그로서는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디오였기에, 디오는 그저 주먹을 꽉 쥐고는 나를 노려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너…….”

내가 굳이 그를 이렇게까지 자극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디오로부터 어떤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그리고 그 유도는 정확하게 먹혀들어 갔다.

“웃기지 마라.”

“뭘?”

“그가 정말로 죽었다면 용사의 힘이 나에게 되돌아왔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지. 베른은 살아 있어.”

「[생존 플래그]가 강화됩니다!」

「[생존 플래그]의 효과로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이 우연히 지나가던 [제3의 인물]에게 도움을 받을 확률이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생존 플래그]의 효과로 [사망 플래그]의 효과가 크게 약화됩니다!」

‘됐군.’

이제 지금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다 했다고 볼 수 있었다.

남은 일은 베른의 귀환을 기다리는 것과 기존의 여행을 지속하는 것.

이 두 가지였다.

“좋아.”

“……뭐?”

“네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그건 또 무슨…….”

디오가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자, 내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제 너는 어떻게 할 건데? 나와 함께 계속 갈 거야?”

지금 디오의 입장에서 나는 동료를 아무렇지도 않게 배신한 희대의 배신자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뻔뻔하게 이런 의견을 물을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암담하다 못해 절망적인 상황 속에 있는 지금의 디오에게 있어서, 잡을 수 있는 줄은 오직 나뿐이었으니까. 그것이 썩은 동아줄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뻔히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망망대해에서 침몰하는 배 위에 서 있는 녀석이라면 잡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의심으로 가득 물든 디오의 눈.

그 눈이 말하는 바는 간단했다. 그동안 내가 저질러 왔던 수많은 일과 행보가, 디오에게 내 행동에 대한 어떤 이상한 믿음을 만들어 낸 것이다.

내가 하는 행동이라면 혹시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믿음.

아니나 다를까, 주인공답게 호구의 자질을 차고 넘치게 가진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건 네가 알 필요가 없어. 다만 확실한 건, 네 목적이 나와 꽤 유사하다는 거야.”

“그 말은, 베른을 죽음으로 내몬 것도 그 목적과 관련이 있다는 뜻인가?”

「다수의 독자가 [주인공]에게 [배신자]의 단죄를 강렬하게 요구합니다!」

「일부 독자가 또다시 호구가 될 조짐이 보이는 [주인공]의 모습에 강력한 고구마를 호소합니다!」

“좋을 대로 생각해.”

어차피 굳이 확답해 주지 않아도 그렇게 생각할 테지만 말이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마침내 디오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좋다.”

「다수의 독자가 깊은 탄식을 내뱉습니다!」

내가 하차할 정도로 답답하게 여겼던, 호구의 재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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