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Chapter 20: 데우스 교단 (3)
「다수의 독자가 갑작스럽게 등장한 ‘루’가 누구인지 의아함을 표합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이번에 나타난 그림자의 정체가 ‘블랙 드래곤 루’임을 밝혀냅니다!」
「대다수의 독자가 ‘루’가 등장하거나 말거나 아무런 관심을 표하지 않습니다!」
이쯤 되면 대놓고 공기 취급당했던 하이디는 오히려 양반이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
물론 저렇게 개무시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독자]들의 입장에서지, 내 입장에서는 조금 달랐다.
“별로 놀랍지는 않은가 봐?”
“어느 정도는 예상했었으니까.”
왜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지금 내 상황이 딱 그 상황이었다.
“늘 그런 식이지.”
체념하듯이 말하는 루의 모습은 상당히 수척해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입고 있는 사제복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더욱 부각시켰다.
“신앙심이 그렇게 깊은 줄은 몰랐네.”
드래곤에게 사제복이라니.
특별한 플레이가 아니고서야 더없이 진귀한 광경이긴 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사정이 있다.”
“알아.”
“안다고?”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어차피 이미 예상했던 사태였다.
죽은 줄 알았던 동료가 적이 돼서 나타나는 일은 고이다 못해 썩은 클리셰 중 하나였으니까.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 그래서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뭔데?”
“……이제, 그만해.”
“뭘?”
“네가 하려는 모든 일.”
“내가 왜?”
「[클리셰]가 거칠게 요동칩니다!」
그와 함께 루의 입에서 씹어내듯이 나온 말은 당연하지만 무척이나 진부한 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를 죽여야 할 테니까.”
「[적이 된 아군] 클리셰가 발동합니다!」
「등장인물, ‘블랙 드래곤 루’의 전투력이 일시적으로 [500%] 상승합니다!」
「등장인물, ‘블랙 드래곤 루’의 [사망 플래그] 발동 확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세상에.’
상황이 이쯤 되니, 오히려 너무 뻔해서 놀라울 지경.
시대가 어느 때인데 이딴 짓거리나 한단 말인가.
이쯤 되면 뻔한 게 아니라 뻔뻔한 거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갑자기 없었던 신앙심이 무럭무럭 자라나서 교단에 귀의한 건 아니지?”
“……그래.”
차라리 그렇다고 했다면 이토록 참담하지는 않았으련만.
상황이 그러했으니, [독자]들의 반응이 싸늘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대다수의 독자가 이미 고착화된 [클리셰]에 큰 지루함을 표합니다!」
「사이다패스에 걸린 일부 독자가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루’를 죽이면 되지 않느냐고 건의합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당신에게서 사이다 같은 행보를 기대합니다!」
평소에 비중이 있던 등장인물이 배신해도 난리가 나는 마당에, 최근 들어서 공기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루에게 면죄부가 쥐어질 리가 만무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야기가 이대로 흘러갔을 때의 얘기였지만.
당연히 내가 그런 뻔한 진행을 방치할 리가 없었다.
“그러지 뭐.”
“……응?”
“네 말대로 하겠다고.”
“그게 무슨 말이지?”
“그만하라며? 그 말대로 하겠다니까.”
루의 동공이 거칠게 떨렸다.
명백한 당황이었다.
“……진심인가?”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어?”
“……많이.”
……거참,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솔직한 드래곤일세.
“오늘은 아니야. 이래봬도 내가 제법 신앙심이 투철한 편이거든.”
“……정말로?”
“정말이고말고.”
그렇게까지 포교를 하고 싶다면야, 일단은 믿는 척을 해 주면 그만이었다.
물론, 내가 믿는 신이 이쪽 동네에 있는 미신만도 못한 신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를 믿어.”
내가 그렇게 루에게 작게 속삭인 순간이었다.
「[클리셰를 파괴하는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2.11%」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파격적인 붕괴율.
그러나 진짜 놀라운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후드득-.
갑작스럽게 무너져 내린 것은 다름 아닌 신전 중앙에 놓여 있던 어느 동상이었다.
그 동상이 무엇의 동상인지는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작가 놈의 현신이자, 이 세계의 신.
‘이것 봐라.’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던 사안이었지만, 저렇게까지 힌트를 준다면 알아버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예전부터 생각했었던 [클리셰 붕괴율]이 가진 의미.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려면, 먼저 [클리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었다.
상투어, 진부한 표현, 틀에 박힌 표현.
하지만 이 뻔한 세계에서의 저것들의 의미는 조금 달랐다.
일종의 법칙이자,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진리.
말하자면, [클리셰]야 말로 이 세계의 질서이자, 그 근간을 이루는 본질이나 다름없다는 말이었다.
‘자, 이제 어떻게 나올 거냐.’
그리고 그 대답은 비교적 빠르게 나왔다.
무척이나 익숙하고도 새로운 문장들이 눈앞에서 새겨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비밀스러운 만남이 성사되었을 때, 아인즈 반은 신성한 교단 내에서 신의 모습을 새긴 동상마저도 파괴하는 불신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와 같은 행위는 데우스 교단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팩트는 팩트가 맞긴 한데…… 어째 조금 억울한걸.
그러나 내가 억울하거나 말거나 상대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쿵! 쿵! 쿵!
거칠게 울려 퍼지기 시작한 발걸음 소리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신전 바깥에서 어지럽게 울려 퍼졌다.
“불신자를 처단하라!”
안 믿는다고 한 적도 없는데, 불신자라니.
아무래도 녀석이 화가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소란을 눈치챈 루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들썩이는 신전 문 앞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내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렇게까지 마음 넓은 신은 아닌가 보지.”
“……신이?”
“아마, 그 작자는 네 생각보다도 훨씬 더 쪼잔한 작자일 거야.”
하차한다거나, 하차를 할 예정이라거나, 또는 하차를 했다던가 하면 사람을 이딴 쓰레기 같은 곳으로 끌고 올만큼.
그리고 신전의 문에서 거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앙!
거칠게 열린 신전의 문과 함께, 사제복을 입은 수많은 성직자와 갑옷을 걸친 성기사들이 신전 내부로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모르긴 몰라도, 여기서 이러는 건 신성모독 아니야?”
“그 더러운 입으로 감히 신의 뜻을 담지 말라!”
내 말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사제 바알이었다.
그것참, 이름만큼이나 성깔 있는 목소리였다.
“들었지 루? 네 말대로 해도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네.”
“……보고 있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녀석이 직접 나서기 시작했으니, 아무래도 쉽게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증거로,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자토스가 잠이 들어 있었다.
마치 이때를 기다려왔다는 듯이.
「호문쿨루스는 전대 용사 베른과의 치열한 전투로, 깊은 잠에 빠진 상태였다.」
그것참, 빌어먹게도 편리한 [개연성]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무튼, 현재 내가 가진 전력 중에서 가장 강력한 패는 늘 그렇듯이 사용하지 못한다는 소리.
내가 루에게 물었다.
“도망갈 수 있겠어?”
“……불가능해.”
“어째서?”
“본신의 모습을 포함해서, 내 힘은 모조리 봉인 당한 상태다. 신의 뜻 없이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어.”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다른 동료들의 힘이었는데, 웃긴 것은 어느 순간부터 사라진 디오와 하이디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이디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디오까지 사라진 것을 보니 아무래도 따로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
작가 놈이 제법 공들여서 수작질을 부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무튼…… 찾을 때면 없어요.’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하던가.
딱 그 상황이었다.
‘이걸 어쩐다.’
그러나 고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쏟아진 빛의 화살들이 순식간에 우리를 향해서 쇄도했기 때문이었다.
쐐애애액-!
그와 함께 어느새 나를 가로막은 그림자 하나와 울려 퍼진 목소리.
“피해!”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굳이 보지 않아도 되는 뻔한 클리셰.
그러나 그것을 두고 볼 내가 아니었다.
「[행운 매수]를 사용하였습니다!」
「[3000G]가 소요됩니다.」
「[행운 매수]를 사용하였습니다!」
「[3000G]가 소요됩니다.」
「[행운 매수]를 사용하였습니다!」
「[3000G]가 소요됩니다.」
마치 비처럼 쏟아져 내린 빛의 화살 세례가 끝난 후, 나를 가로막은 루가 자기도 모르게 감았던 눈을 살며시 다시금 떴다.
“……어?”
자신이 살아 있는 것도 모자라서, 아무런 상처조차도 입지 않았다는 모습에 루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게 어떻게…….”
“운이 좋았어.”
정확히는, 돈이 좋았던 거지만 말이다.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2.13%」
그와 함께 신전의 기둥에서 작은 돌가루가 흩어져 내렸다.
작은 징조였으나, 분명히 효과가 있기는 있었다는 소리.
이제 남은 것은 이곳에 큰 거 한 방을 남기고 가는 일이었다.
“……운이 좋은 불신자로군. 다들 무기를 들자!”
“불신자를 처단하라!”
교단 내에서의 계급상 말단인 일개 사제 주제에 명령하듯이 외치는 바알의 모습에 어째 괴리감이 느껴졌으나, 어차피 이 세계에서는 신분보다는 [비중]이 먼저였으니 썩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광신도 집단] 클리셰가 발동합니다!」
「‘데우스 교단’ 소속 인물들의 전투력이 [200%] 상승합니다!」
내가 살며시 말했다.
“루.”
“……응.”
죽음이라도 각오한 듯이, 무척이나 차분하고 무겁게 내려앉은 목소리.
그녀의 각오에는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아직 죽을 생각 따위는 없었다.
“내가 여기에 왜 왔는지 알아?”
“그야…….”
무언가를 말하려던 루의 말문이 턱 막혔다.
어쩌다 보니 루를 만나게 되었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데우스 교단이 나를 찾을 이유였지 내가 교단을 찾아온 이유는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내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루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모르겠어.”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해 줄까?”
루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걸 굳이 지금 해야 돼?”
“아마 들어보면 꽤 유익할 거야. 나는 사실 이곳의 인간이 아니야.”
“뭐?”
“너는 아마 못 알아듣겠지만, 내가 인간계행 비행기를 탔을 때, 나 말고도 그 비행기를 타고 있던 자들이 있었어.”
“잠깐, 설마 하인즈가 발견한 차원계의……!”
명색이 드래곤이라고, 완전히 [설정]에 무지하지는 않은 듯 했다.
“내가 이곳까지 온 이유를 알려주지.”
물론, 내가 한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한 인간계 관광객이었지, 내 전력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자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떻게 보여질지에 달라지는 이야기.
어차피 구멍이 숭숭 뚫린 [설정]이라면, 입맛대로 채워 넣으면 그만이었다.
「[개연성 무시]를 사용하였습니다!」
「[500G]가 소요됩니다.」
그와 함께 내가 품에서 꺼낸 것은 작은 무전기였다.
“들리지? 시작해.”
작은 속삭임.
그와 함께 하늘에서 어마어마한 굉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마치 전쟁 중의 폭격기라도 지나가는 것처럼.
“아까 화살 비는 잘 받았어. 너희도 내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걸.”
“……뭐?”
그 순간,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신전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피, 피해라!”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어느새 구멍 뚫린 신전의 천장 위에서, 마치 융단처럼 쏟아지는 폭격들.
그 목표 지점이 어디인지는 굳이 결과를 보지 않아도 뻔했다.
“어디, 너희들의 잘난 신이 폭격도 막아 줄 수 있는지 시험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