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Chapter 20: 데우스 교단 (5)
“……고심한 것 치고는 실망인데. 내가 정체성 혼란이나 겪는 사춘기 청소년 같나?”
잠깐 흔들렸으나, 어차피 그런 건 이미 질리도록 겪어 보았다.
「증거를 보여 주지. 네 이름은 뭐지?」
“그야…….”
자연스럽게 ‘아인즈 반’이라고 대답하려던 내 입이 멈췄다.
순간적으로 녀석이 바라는 대답이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김 대리!”
그와 함께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
그러나 내 기억 속에 있는 명칭은 그것뿐이었다.
「대답하지 못하는구나.」
“……내 기억에 무슨 짓을 했나 본데. 아무리 그래도 헛수고야. 나는 네 등장인물 따위가 아니니까.”
「그렇게 믿고 싶은 건 아니고?」
그것은 그저 글자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조롱이 느껴지는 어조였다.
마치 내가 정말로 녀석이 만든 등장인물 따위라도 된다는 듯이.
“지랄.”
이것은 개수작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당연히 저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믿으려는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이렇게 넘기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래, 마치 누구나 한 번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이 가짜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고는 하는 것처럼.
지금 나에게 든 의심은 일종의 그 생각의 연장선이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도통 믿으려고 하지를 않는구나. 하지만 이해한다. 그게 너의 설정이니까.」
또다시 써 내려간 개소리.
그때였다.
‘어?’
단순한 개소리로 치부하던 그 글자를 본 순간, 한 가지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혹시 통 속의 뇌라는 사고 실험을 알아?”
「데카르트의 악마 가설을 풀어낸 것을 말하는 것인가.」
“맞아.”
「그게 어쨌다는 거지?」
그 반응을 본 순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녀석의 말이 그저 몰릴 대로 몰린 자의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퍼트넘이 제시한 이 가설은, 먼저 우리가 통 속에 담긴 뇌라고 가정을 한 후에 시작해. 그리고 그 통 속에 담긴 우리의 뇌는 생각하지. ‘사실 우리는 통 속의 뇌일 뿐이고, 과학자 혹은 미지의 존재들이 나에게 어떠한 전기적 신호를 줘서 현실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가설이지.”
「그게 지금 상황에서 무슨 의미가 있지?」
아니, 의미가 있다.
녀석이 이 말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면 더욱더.
작가를 뛰어넘는 등장인물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법이었으니까.
“의미가 있지. 이 사고 실험의 요지는 ‘자신이 정말로 통 속의 뇌라면, 통 속의 뇌라는 사실 자체를 의심할 수 없다.’라는 거니까. 만약 내가 정말로 네가 만든 등장인물이었다면, 너는 굳이 이렇게 복잡한 방식을 선택할 필요도 없었어. 그냥 쭉 내가 이렇게 믿고 살게 내버려 뒀으면 될 일이었으니까.”
「……재미있군.」
말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사실 이 사고 실험에도 반박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내가 이미 ‘통 속의 뇌’라는 사고 실험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는 경우라던가.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철학 시험에서나 써먹을 그 사고 실험의 성립 여부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내가 말했고 녀석은 동요했다.
나는 알고 있고, 녀석은 모르고 있다.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내가 원하는 것은 충분히 얻어낸 것이다.
「그것조차도 내가 의도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건가?」
그래, 그렇게 말하겠지.
그렇다면 내 대답 역시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러면 어디 한 번 지금부터 마음대로 해 보던가. 어때? 못하겠지?”
그리고 기나긴 침묵이 찾아왔다.
그 기나긴 침묵이 끝났을 때, 눈앞에 나타난 것은 다소 화가 난 것처럼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원하는 게 그거라면.」
그와 함께 또 다른 단어들이 눈앞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꼭두각시 인형. 끝나지 않는 굴레. 자신의 처절한 처지에 비관한 아인즈 반은, 결국 그 끈질긴 삶을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제아무리 쪼잔해도 꼴에 신은 신이라는 건지, 그 문장과 함께 내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타의에 의한 이끌림에 어느새 내가 도착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베른을 밀어 버린 바로 그 절벽이었다.
“괜찮겠어? 여기서 떨어져도 별로 죽을 것 같은 생각은 안 드는데.”
「끝까지 입만 살아서.」
“정말인데.”
아닌 게 아니라, 여기서 떨어져 봤자 죽기는커녕 기연이나 안 얻으면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이 나를 이 장소로 이끌었다는 것은, 녀석은 현재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베른이 죽었다고 생각하나 봐?”
「네 손으로 직접 죽이고도 확인하는 건가.」
모르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한 가지 사실을 더 일깨워 주었다.
“내가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 하나 알려줄까?”
「네 생각 따위는 이미 전부 다 짜여진 각본에 불과하다.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라면 소용없다.」
“일단 들어보면 생각이 바뀔걸?”
과거에 내가 제국에 있던 시절, 베른에게 마왕과 용사에 관한 이야기를 잠깐 들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죽였던 마왕의 이름은 줄리아.”
-“……마왕과 잘 아는 사이였나요?”
-“잘 알고 있었냐라…… 하하. 그럴 수밖에 없지. 그녀는…… 내 아내였던…… 아니, 내 아내였으니까.”
베른이 죽였던 마왕의 이름은 줄리아였고, 자신의 아내였다고.
하지만 이것은 베른에게 최근에 들었던 이야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마치 무언가 큰 변화라도 생긴 것처럼.
“베른이 죽인 마왕의 이름은 바네사였어. 줄리아가 아니라. 하물며 그 둘은 부부조차 아니었지.”
「……그게 무슨 말이냐.」
처음에는 그때의 베른이 적당히 거짓말을 했었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이야기는 그에게 있어서 그다지 밝히고 싶은 이야기는 아닐 터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녀석의 반응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설정 오류]
더 이상 녀석이 이 세계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더 이상 네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는 거지. 이 신 조무사 놈아.”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9.44%」
* * *
“……뭐야?”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현상에 베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멈췄다.
옆에서 종달새처럼 시끄럽게 지저귀던 아모스도, 연신 쉬지 않고 들썩이던 산기슭도.
그 모든 것이 멈춘 것이다.
“아모스?”
베른은 함께 달리던 아모스를 연신 흔들어 보았으나, 마치 딱딱한 인형을 만지는 것처럼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이 이상한 상황 속에서 가장 합리적인 가능성을 떠올렸다.
“……정신계 마법인가?”
그쪽 계열의 마법이라면 지금 겪는 현상도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어느새?
그는 용사다.
그것도 전성기의 힘을 온전히 되찾았고, 성검도 지니고 있는 진짜 용사.
그의 스승이었던 용사 가람이 말했었다.
용사는 특유의 힘으로 마법, 특히 정신계 마법에 대해서만큼은 절대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면역력을 가진다고.
때문에 그런 용사의 힘마저도 뚫어 낼 정신계 마법은 마법의 종주라고 불리는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왕의 짓인가?”
마왕이라면 응당 용사인 자신에게도 정신계 마법을 성공시킬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가 보았던 마왕은 이런 교묘한 정신계 마법을 사용할 정도로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지금 이 상황은 단순히 정신계 마법이라고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다.
정신계 마법은 보통 마법에 당한 자들이 스스로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교묘하게 작동한다. 만약 마법에 대한 저항이 크거나, 마법에 큰 조예가 있는 자들이라면 마법을 풀어낼 방법을 찾아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 이질감을 눈치채지 못하기는커녕 너무나도 대놓고 드러나 있었다.
마치 정신계 마법이 아닌 것처럼.
“……그것을 의도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현실인 것 같군.”
만약의 가능성으로 그것조차도 계산에 넣은 치밀한 함정일 가능성에 있었으나, 조금 전부터 시도하고 있는 모든 정신계 마법 파훼 방법을 사용한 베른은 이곳이 현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지금 그가 겪고 있는 현상은 분명했다.
온 세상이 멈췄다.
조금 전부터 숨 쉬는 것조차도 힘들어진 것을 보니 아무래도 공기조차도 멈춘 듯 했다.
“……움직여야겠군.”
어차피 한자리에 있어 봤자 공기만 부족해질 뿐이었다.
베른은 조금 걱정스럽게 멈춰 버린 아모스를 한 번 바라보았으나, 그녀 역시도 세상과 함께 멈춰 버렸기에 질식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향한 곳은 조금 전에 자신이 마왕으로부터 도망쳤던 장소였다.
만약 이 현상이 진짜라면, 이 이상한 현상을 기회로 삼아서 마왕을 끝장낼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다.
‘만약 이게 날 끌어들이려는 마왕의 함정이라면…… 그때는 죽어 주지 뭐.’
그 정도로 치밀하고 무서운 함정을 팔 정도의 상대라면, 애초에 이길 생각을 안 하는 게 맞았다.
그렇게 베른이 조심스럽게 썩어 버린 길을 따라서 발걸음을 옮기자, 그 끝에서 주저앉아 있는 마왕의 모습이 보였다.
‘함정은 아닌가?’
베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마침내 마왕의 앞에선 그가 성검을 뽑아 들었다.
키이잉-
평소였다면 들리지도 않았을 발검 소리가 적막 속에서는 너무나도 크게 울려 퍼졌다.
그의 검이 조용하고 확실하게 마왕의 목을 내리치려던 순간이었다.
“……누구야?”
“흡!”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베른은 재빨리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역시 함정이었나.’
의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걸려들 수밖에 없는 그런 함정이었다.
만약 이곳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언제 깨어날지도 모를 환상에서 영영 헤맸을 테니, 더욱더 그랬다.
“안 그렇게 생겨서 제법 간악하군.”
그렇게 베른이 조심스럽게 검으로 마왕을 겨눴으나, 들려온 대답은 딴판이었다.
“……누구냐니까?”
“뭐?”
조금 전까지 쫓아와 놓고 이제 와 누구냐니?
정상이 아닌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정도가 심했다.
“장난 그만치고 덤벼라. 네 소원대로 끝장을 봐주지.”
어차피 베른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기에 내린 결단이었으나, 그 굳은 결단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가벼웠다.
“나는 누구야?”
순간적으로 베른은 성검을 쥔 손의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장난 그만치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서는 공허한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무서워…… 여긴 어디야…… 엄마…….”
이내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린 그녀였으나, 베른은 경계를 멈출 수 없었다.
“셋을 세겠다. 제대로 할 생각이 없다면 얌전히 목이나 내밀어라. 조용히 끝내주지.”
“아, 아저씨는 뭐야? 엄마! 어디 있어!”
“……장난은 그만 쳐!”
번개처럼 휘둘러진 검이 순식간에 마왕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제아무리 마왕이라고 한들, 무방비로 용사에게 성검으로 베이면 치명상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마왕의 목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본래였다면 단숨에 목을 쳤어야 했지만,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망설임이 검을 무디게 한 것이었다.
“자, 아직도 할 생각이 안 드나?”
그러나 베른에게 들려온 대답은 애원이었다.
“사, 살려 주세요!”
“……뭐?”
얼마 전까지 보았던 위압감 넘치는 마왕의 모습은 어디 가고, 어느새 눈앞에는 그저 목숨을 애원하는 겁에 질린 소녀만이 있었다.
“제발 죽이지 마세요…… 제발.”
베른은 맥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과오를 떠올렸다.
-“……배제한다.”
자신의 손에 무참히 쓰러진 바네사의 모습이 눈앞에 있는 마왕과 겹쳐져 보였다.
깊은 한숨을 내쉰 베른이 결국 성검을 다시금 검집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이해할 수가 없군. 해치지 않을 테니 이 마법이나 풀어라.”
“마, 마법이라니요?”
“네가 건 이 이상한 마법 말이다. 세상을 멈춘 이 말도 안 되는 마법.”
“제, 제가 그런 걸 어떻게 해요? 저는 그저…… 공시생일 뿐인데.”
“지금 이 마법을 쓴 것이 네가 아니라는 말이냐?”
“다, 당연하죠.”
베른의 표정이 어이없음으로 물들었다.
“그러면 넌 뭐야? 내가 알고 있던 마왕은 아닌 것 같은데.”
“저, 저도 몰라요…… 그냥 평소처럼 소설을 읽고 있었던 것뿐인데…….”
“소설?”
찌푸려진 베른의 표정에 마왕이 기겁했다.
“주, 죽이지 마세요!”
그러나 베른이 주목한 점은 그 점이 아니었다.
“그 얘기, 자세히 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