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차 이후의 소설 속-89화 (89/164)

◈ 89화 Chapter 21: 클리셰 파괴자 (1)

「클리셰 붕괴율이 일정 수치를 초과하여, 일부 법칙이 붕괴합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영향력이 크게 약해집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매우 희미해집니다! 일부 등장인물이 망자가 아닌 모습으로 재등장합니다!」

「일부 등장인물들의 사고방식이 변화합니다!」

「더 이상 새벽에 닭이 울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일어난 변화.

그와 함께 흘러나온 글자들에게서 느껴진 것은 명백한 당황이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냐.」

뻔한 걸 묻는 걸 보니, 역시 머리는 별로 안 좋은 모양이었다.

“뭐겠어? 당연히 네가 싫어할 짓이지.”

「……감히.」

그와 함께 눈앞에서 아찔함이 느껴졌다.

어느새 다다른 절벽 끝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만 갈 때가 됐다는 거군.’

절벽 아래의 풍경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까마득한 높이에 절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끝장을 보고 싶었지만…….’

더 이상 녀석에게서 조금의 여유도 느껴지질 않는 걸 보니, 제아무리 머리 나쁜 녀석이라도 현재의 자신이 몰릴 대로 몰려 있다는 상황이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로서는 조금 아쉬운 상황이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제 시작에 불과하니까.’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다했다.

데우스 교단이 완전히 무너졌다고는 볼 수 없었으나, 어쨌거나 본단을 무너뜨렸고, 덕분에 자칭 신 녀석의 영향력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제 남은 일은 이곳을 떠나는 것.

말이야 쉬었으나, 그것 역시도 당장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째 베른한테 조금 미안해지는데.’

다름이 아니라, 발아래에 놓인 절벽의 풍경이 더없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차피 죽을 리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나 평범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고소공포증이 나라고 해서 피해 갔을 리는 만무했다.

그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혓바닥이 조금 길어진 것은.

“이왕 떨어뜨릴 거면 천천히 밀어 주면 안 될까? 내가 고소공포증이 조금 있어서.”

물론,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제시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사소한 개인적인 의견제시의 효과는 생각보다 컸다.

「……끝까지.」

딱 봐도 분노에 찬 글자.

굳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건만, 아무래도 제대로 열 받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분노에 대한 표현은 꽤 직설적이었다.

「아인즈 반은 결국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참으로 간결하고도 직관적인 문장.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는 확실했다.

그 순간,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힘이 내 몸을 떠밀었다.

그렇게 마침내 내 몸에 허공에 떴을 때, 멈춰 있던 세상이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했다.

「관리자 권한에 의해서 작품이 다시 공개됩니다!」

「대다수의 독자가 갑작스러운 작품 비공개에 큰 원성을 쏟아냅니다!」

「일부 독자가 갑작스럽게 변한 작중 상황에 큰 이질감을 표합니다!」

그 이유야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분명했다.

굳이 말하자면, [개연성] 지적을 받지 않기 위한 녀석 나름대로의 공개처형인 셈이었다.

물론, 세상사가 전부 다 녀석의 생각대로 될 리가 있겠는가.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뜬금없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당신의 모습에 크나큰 의구심을 표합니다!」

「일부 독자가 갑작스럽게 건너뛴 전개에 큰 불편함을 호소합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추측성 발언을 내놓습니다!」

우습게도, 내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죽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독자들은 거의 없었다.

당연히 작가 놈만 모르고 있는 그 믿음을 내가 활용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 이만.”

짧게 말한 그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참으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예를 들면 지금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린 것이 타의가 아닌 순수한 내 의지이며, 곧 다시 돌아올 예정이라든지.

그것도 아니면 무언가 큰 건을 터트리고 유유히 도망치는 장면이라든지.

상황이 그러했으니, 당연하게도 그 효과는 확실했다.

「[생존 플래그]가 발동합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체력]이 일정 수치 아래로 하락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행운] 수치가 일시적으로 크게 상승합니다!」

* * *

“쿨럭!”

당연하지만, 보기만 해도 아찔한 절벽 위에서 떨어져 내린 후에 물살에 떠내려갔다가 기절한 후에 어딘지 모를 뭍에서 깨어나는 경험은 보통 사람이었다면 평생을 걸려도 겪기 힘든 경험 중 하나였다.

그것이 자기가 다른 사람을 떠민 장소라면 더욱더.

「[진주인공]을 지지하는 한 독자가 혹시 죄책감을 느낀 당신이 ‘전대 용사 베른’을 찾기 위해서 절벽에서 뛰어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성 발언을 내놓습니다!」

내가 그렇게 보이도록 떨어져 내린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단순한 보여 주기식은 아니었다.

데우스 교단에서의 볼일이 대충 끝났으니, 아무래도 이제 정말로 베른을 찾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확인해야 할 것도 있고.’

베른에게 발생한 [설정 오류].

그것은 그가 더 이상 지금처럼 기존의 [등장인물]의 영역에 갇혀 있지 않게 되었을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때문에 안 그래도 상대하기 껄끄러운 상대였으니, 괜한 감정의 골 같은 게 생겨서 골치 아픈 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손을 써 둘 필요성이 있었다.

아무래도 베른과는 앞으로 함께 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역시는 역시군.’

베른과의 [비중] 차이 때문인지, 똑같이 절벽에서 떨어져 내려도 나에게는 베른처럼 누군가가 물에서 친히 건져 와서 보살펴 준다거나 하는 행운은 일어나지 않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늘 그렇듯이 현실에서는 돈 많은 놈이 갑이었고 이 세계에서는 [비중] 많은 녀석이 갑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적당히 길 따라서 가다 보면 만나겠지.’

어차피 같은 곳에서 떨어졌으니, 아마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강가를 따라서 쭉 걷다 보니,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민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본 적이 있는 곳인데.’

정확히는 베른을 건져냈던 아모스가 살고 있던 곳이자, 검은 마탑의 마녀 일족이 살았다던 마을이었다.

마을에 다가서자, 당연하게도 그곳에는 베른은커녕 원래의 거주민인 마녀의 모습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떠났었지.’

목적지는 이미 알고 있었으나, 문제는 내가 방금 목적지를 통째로 날려 버리고 오는 길이라는 점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현재 베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라는 이야기.

‘아무래도 직접 볼 수밖에 없겠군.’

나름대로 시간이 촉박했기에 되는 데까지는 직접 찾아볼 생각이었지만, 흔적이 끊긴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리보기 결제]를 사용하였습니다!」

「[100G]가 소요됩니다!」

* * *

“……꽤 재미있는 이야기군. 그러니까 네 말은, 네가 내가 알고 있는 마왕이 아니라는 말인가?”

“어…… 네.”

베른은 표정을 찌푸렸다. 그녀가 베른에게 해 준 이야기는 간단했다. 그저 소설이나 보면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던 그녀가,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곳이었다는 이야기. 당연히 의심 많은 베른이 그 이야기를 순순히 믿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군. 알겠다.”

물론, 늘 그렇듯이 말과 행동은 본심을 감추는 법이었지만 말이다.

“……저, 그런데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베른.”

“베른? 설마…… 에이 아니지.”

어딘가 이상한 그녀의 반응에 베른의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지?”

“저…… 진짜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아저씨 혹시 용사였어요?”

너무나도 기묘한 질문.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무언가 있는 건지 모를 질문에 베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래.”

그러나 그러한 베른의 반응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그녀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세상에…….”

그녀가 경악하는 와중에도 베른은 속으로 계속해서 그녀를 살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색이 보이면 당장이라도 베어 버릴 생각으로.

그러나 그녀가 보인 행동은 그러한 베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미처 대비할 새도 없을 정도로.

“……말도 안 돼.”

자연스럽게 다리에 힘이 풀린 듯이 풀썩 주저앉은 그녀가 어느새 흐느끼기 시작했다.

원래 울음이 많은 걸까, 아니면 무언가 힘든 일이 있는 걸까.

그것은 베른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다만, 이 상황이 몹시 곤란할 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아니야…… 이건 꿈이야…….”

또 정신이 나가 버린 건가?

베른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적막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

이런 세상 속에서 미친 여자 한 명과 단둘이 남겨진 심정은 그야말로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그것도 숙적인 이 여자가 속내를 감출 수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더욱더.

‘미치겠군.’

그러나 그러한 베른의 심정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그녀의 상태는 심각해져 갔다.

“……집에 가고 싶어.”

“집이 어디지?”

“……신도림.”

“신도림? 거기는 또 어디지? 내가 데려다주지.”

“……여기서는 못 가.”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베른이 미쳐 버릴 것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첫 번째 이변이 일어났다.

쩌적-.

쩌저적-.

균열은 작았다. 그러나 그 효과는 컸다.

멈춰 있던 시간이 아주 조금씩 다시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어?”

그 순간, 베른은 느낄 수 있었다.

어딘가 이질적인 그 감각을.

그것은 마치 운명이라는 녀석이 자신을 삼켰을 때와 유사했다. 마치 어디론가 자의인 듯 타의인 듯 끌려가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베른은 그 흐름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건…….”」

「평소였다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이질감이었으나, 멈춰 있던 세상에서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세상으로 변했을 때, 베른은 무언가 거대한 운명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세상 전체가 그 거대한 흐름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은 느낌.」

「“이게 도대체 어떻게…….”」

「그러나 이변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아악……!”」

「머리를 붙잡고서 비명을 지르는 마왕의 모습에 베른은 또다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무척이나 유감스럽게도,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나는 뭐야!”」

「또다시 일어난 발작. 베른은 그녀를 기절시켜서라도 저걸 막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어느새 그녀에게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압도적인 기운에 그럴 생각을 싹 버렸다. 혹시나 했었지만, 역시 그녀는 마왕이 맞았던 것이다.」

「“……역시 그랬군.”」

「베른이 다시금 성검을 뽑아 들고서 그녀를 마주했을 때, 그녀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소설 속…… 말도 안 돼…… 내가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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