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차 이후의 소설 속-90화 (90/164)

◈ 90화 Chapter 21: 클리셰 파괴자 (2)

「[미리보기]가 종료됩니다.」

“…….”

딱 중요한 장면에서 끊기는 것이 절단마공도 이런 절단마공이 따로 없는 수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점이라면, 아직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이라는 점이었다.

즉, 지금부터 서두른다면 어찌어찌 시간은 맞출 수 있다는 이야기.

“아자토스.”

[끼릿!]

내 부름과 함께 아자토스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내 몸을 집어삼켰다.

필요한 준비는 모두 끝났다는 이야기.

자, 이제 꼬장꼬장한 아저씨를 만나러 갈 차례였다.

「[개연성 무시]를 사용하였습니다!」

「[500G]가 소요됩니다.」

그와 함께 순식간에 뒤집어진 주변의 풍경과 시점.

그 어지러움 속에서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다름 아닌 꼬장꼬장한 베른의 목소리와 어느새 자연스럽게 목젖에 닿은 싸늘한 성검의 날이었다.

“……반.”

“겨우 찾았네요.”

“찾았다고? 나를 죽이려고 한 녀석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정말로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 죽었겠죠.”

“그건 네가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내가 살아난 건 기적이었어.”

“정말로 죽였다고 생각했다면 굳이 이렇게 찾아올 리가 없잖아요? 시체 보러 온 것도 아니고.”

“그저 우연히 만난 걸 수도 있지.”

그와 함께 목젖에 닿은 성검의 날이 목을 파고들며 목에서 화끈한 감각이 느껴졌다.

어차피 내심 다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굳이 이런 확인 작업을 거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일종의 시위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은 저를 지켜봐 온 베른 당신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텐데요?”

“다 아는 척하지 마라. 언제부터 네가 네 속을 남에게 그렇게 터놓고 다녔지?”

“오늘부터.”

“말장난하지 마라. 당장 목이 날아가고 싶지 않다면.”

단순한 협박이었으나, 어느 정도는 진심이 느껴지는 협박이었다.

“알겠어요. 아무튼 제가 당신을 찾은 이유는 이곳에 온 목적을 이뤘기 때문입니다.”

“……이뤘다고?”

“데우스 교단의 본단이 붕괴했습니다.”

“뭐?”

잠깐 놀란 베른이 되물었다.

“네가 한 짓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죠.”

“……터무니없는 일을 했군. 하지만 고작 그걸로는 신을 무찔렀다고 볼 수 없지 않나?”

아니나 다를까, 베른다운 제법 예리한 질문이었다.

“맞아요. 제가 당신을 찾아온 이유이기도 하고.”

내 말을 들은 베른이 심각한 표정을 몇 번 지어 보이고는 이내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 갔지?”

누구를 찾는지는 굳이 물어볼 것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굳이 물어보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나도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이었다.

“누가 있었나요?”

“여기에 분명히 마왕이…….”

“마왕?”

이보다 더 심할 수는 없을 정도로 심각해진 표정의 베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지만, 여기서 웃었다가는 기껏 마왕을 빼돌린 것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기에 간신히 참아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겠지.

명색이 용사라는 작자가 마왕과 사이좋게 담소나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다수의 독자가 눈뜨고 코 베어 간 당신의 인성에 감탄합니다!」

“당신도 찾았으니, 이제 디오 녀석을 찾을 차례네요.”

누군가 그랬다.

불리한 화제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라고.

때문에 베른은 지금 내가 던진 먹이를 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의 화제는 그에게 있어서 전혀 좋을 게 없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은 어떻게 됐지?”

결국 그 암묵적인 합의에 동의한 베른의 말에 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폭격에 휩쓸려서 어디에 나자빠져 있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명색이 [주인공]인 녀석이 그럴 리는 만무.

‘마침 잘됐어.’

안 그래도 적당히 베른을 떼어 놓을 구실이 필요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흩어져서 찾아보죠. 찾든 못 찾든 한나절 후에 여기서 다시 만나는 걸로 하고.”

“……알겠다.”

그렇게 베른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자연스럽게 내 그림자 속에 있던 아자토스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끼잇!]

“이만 뱉어도 좋아.”

[끼이잇!]

괴롭다는 듯이 구슬프게 울던 아자토스가 뱉어낸 것은 다름 아닌 마왕 키리엘이었다.

만약 그녀가 온전한 마왕이었다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으나, 당장은 아무런 힘도 사용하지 못하는 반쪽짜리 마왕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 여기는…….”

“안녕?”

“너는…… 부, 분명히…….”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내 얼굴만큼은 어느 정도 알아보는 걸 보니, 내가 새겨 준 이미지가 상당히 강렬하긴 한 모양.

“꽤 힘들어 보이네.”

“도대체…… 내가 왜 여기에…….”

“내가 도와주지.”

저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영 몹쓸 짓이었고, 무엇보다도 예측되지 않는 변수만큼 불편한 것은 없었기 때문에 이제 슬슬 저 주박에서 풀어 줄 필요성이 느껴졌다.

마왕이라는 존재는 그 행보에 따라서 이 소설이 순식간에 완결에 도달해 버릴 수도 있게 만드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때문에 이제 그녀에게 제 자리를 찾아줄 필요성이 느껴졌다.

온전한 [최종보스]로서의 자리를.

그리고 그 방법은 꽤나 간단했다.

“이만, 하차해도 좋아.”

단 한마디의 말.

그러나 그 효과는 내가 이미 겪었다시피 절대적이었다.

뭐, 머리는 조금 아프지만.

“아아악!”

그와 함께 듣는 사람도 같이 아플 정도의 끔찍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비명소리가 멎었을 때 눈앞에 있는 것은 다시금 눈에 생기를 되찾은 마왕의 모습이었다.

“……아인즈 반.”

“어때? 역할에서 하차한 소감이.”

“잘도 나를…….”

당장이라도 나를 죽일 것처럼 흉악한 기세를 피어 올린 마왕의 모습은 더 이상 조금 전까지 자기 정체성도 찾지 못하던 반푼이가 아니었다.

“……꽤 재미있는 경험이었어. 그 보답이라고 하기는 조금 뭐하지만, 죽여줄게.”

아니나 다를까, 정신을 차리자마자 대놓고 살인 예고라니.

아무래도 쉽게 친해지기는 글러 먹은 듯했다.

“더 이상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다.”

“그래서?”

흉악하게 드러난 기세와는 전혀 다른 차가운 냉소.

산 넘어 산이라고 하던가.

이미 충분히 예상했던 사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직접 맞닥뜨리니, 앞선 내 선택에 약간 후회가 찾아왔다.

“디오 녀석의 해피엔딩을 원한다고 했었지? 내가 그걸 돕지.”

일단은 첫 번째 미끼.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철저한 비웃음이었다.

“그딴 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 이 지긋지긋한 곳. 이제 나갈 거니까.”

아무래도 마왕의 역할에 잡아먹혀 있는 동안, 그녀의 생각도 꽤 많이 바뀐 모양이었다.

예전의 그녀가 잠깐 이곳에 놀러 온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상당히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 듯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게 말처럼 그렇게 쉬우면 나도 참 좋을 텐데 말이다.

“방법은 알고?”

“그건…….”

예전에 잠깐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이 세계를 빠져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예전에는 하차 후에 마왕으로서 모습을 드러낸 두 번째 하차자인 그녀의 행동을 보고서 그녀라면 혹시 그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최근에 그녀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고서 깨달은 것이 있다.

내가 모르는 것을, 그녀라고 해서 특별히 더 알고 있다는 발상 자체가 글러 먹었다는 것을.

그녀가 디오의 행복을 바란 것은 단순한 [주인공]을 지지하는 독자로서의 감정이 [마왕]으로서 [용사]에게 죽어야 한다는 역할에 먹혀 버린 결과일 뿐이었다.

“……너는 알고 있다는 말이야?”

“당연히 모르지.”

이 부분에 있어서는 허세를 부릴 필요가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만약 그렇게 잘 알고 있는데 정작 나는 왜 이곳에서 안 나가고 있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어지니까 말이다.

“그런데 뭘 그렇게 잘난 듯이 떠들어?”

이제 두 번째 미끼를 뿌릴 차례였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 방법에 도달하는지는 대충 알고 있어.”

“……그게 뭔데?”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답은 간단했다.

이곳에 있는 것이 싫다면, 있을 곳을 없애면 되지 않겠는가.

물론, 이것이 정말로 정답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그것을 보는 이들이 어떻게 보고, 어떻게 생각하는가였지.

「대다수의 독자가 [최종보스]를 홀리는 당신의 언변에 감탄합니다!」

「[진최종보스] 속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야설 빌런이 마침내 [최종보스]마저도 꾀어낸 당신의 남성력에 감탄합니다!」

「[서사]가 강하게 요동칩니다!」

「[서사] [침략자]를 완료하셨습니다!」

「당신의 새로운 [서사]가 갱신됩니다!」

그와 함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었던 한 가지 의문에 대해서 더욱 강한 확신이 들게 만들었다.

내가 아직 모르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의문.

‘이건…….’

「당신의 [서사]가 진행됩니다!」

+

[아인즈 반의 서사]

[1] 노예 소년, 반. [완료]

[2] 불지옥 반도의 왕자. [완료]

[3] 침략자. [완료]

[4] 클리셰 파괴자. [현재 진행 중]

[5] ???

+

「디오는 쓰러진 건물 잔해 속에서 자신을 감싼 채로 쓰러져 있는 고대 정령 물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다급하게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물!”」

「갑작스럽게 쏟아져 내린 막대한 폭격은 제아무리 고대 정령이라고 할지라도 무시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서서히 흩어져 가는 물의 모습은 그녀의 생명이 이제 꺼져 가는 촛불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디오…….”」

「디오가 데우스 교단에 도착한 후, 별도의 안내에 따라서 만난 것은 다름 아닌 물이었다. 디오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감히 원망이나 의문을 내뱉지 못했다. 그녀를 버린 것은 정작 디오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죽지 마!”」

「그런데 어째서일까, 약해지지 않기 위해서 버리고 왔던 과거의 인연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 가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을 감싼 대가로 말이다. 빌어먹게도 잔인한 운명. 디오는 다시 한번 이 저주받을 운명에 대해서 저주의 말을 쏟아냈다.」

「“개새끼들아!”」

「디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은 고대 정령의 기나긴 생에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디오.”」

「“괜찮아. 살 수 있어. 우선 이곳만 벗어나면…….”」

「“이제…… 혼자 안 둘 거지?”」

「디오는 마지막으로 어색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었다. 디오는 서서히 흩어져 가는 그녀의 몸을 바라보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더 이상 잃지 않기 위해서 했던 그 선택이, 결국 이런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 버리고 만 것이다. 디오는 애써 그녀의 손을 맞잡고서 이제는 더 이상 지킬 수도 없는 약속을 했다.」

「“물론이지.”」

「“……다행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물의 모습이 완전히 흩어졌을 때, 디오는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그가 소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은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디오는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것의 정체가 결코 마법 따위가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마법치고는 너무나도 파괴적이고, 잔학무도했다. 마치 철저한 파괴와 죽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처럼. 그리고 이런 짓을 저지를 만한 사람은 그가 알기에 오직 한 명뿐이었다.」

「“……아인즈 반.”」

「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디오의 몸에서 정체 모를 힘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용사의 힘과 비슷하지만, 그보다도 훨씬 더 파괴적이고 강력한 힘이었다. 디오는 단숨에 그것이 운명이 자신에게 내린 족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

「하지만 왜일까, 너무나도 뻔히 보이는 함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디오는 그 족쇄를 거절하지 못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이제 단 한 가지뿐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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