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Chapter 21: 클리셰 파괴자 (3)
내가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어느새 결심을 마친 마왕이 말했다.
“……그래서 내가 이제부터 뭘 하면 되는데?”
“아.”
비록 의문은 여전히 더욱더 커진 상태였으나, 어차피 앉아서 생각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현실로 눈길을 돌리기로 했다.
“우선, 서쪽으로 돌아가 있어. 때가 되면 내가 직접 찾아갈 테니까.”
마왕은 용사와 더불어서 이 소설을 완결로 도달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때문에 그녀와 용사를 한 자리에 모아놓는 행위 자체가 어떻게 보면 위험 요소였다.
그렇기에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런 ‘정상적인’ 엔딩이 나오기 전에 [클리셰 붕괴율]을 100%로 만드는 일이었다.
‘작가 놈이 가장 원하지 않는 방향이기도 하고.’
만약 녀석의 말대로 내가 녀석의 [등장인물]이었다면, 애당초 이러한 내 행위를 방해할 이유가 없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어도 어차피 상관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녀석은 막으려 했고, 실패했다.
결코 전지전능하지는 못하다는 소리.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클리셰 붕괴율]을 100%로 만들어야만 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렇게 된다면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것만큼은 확실했으니까.
“……알겠어.”
그렇게 고개를 끄덕인 마왕이 밀려들어 온 어둠과 함께 조용히 사라진 후, 남은 일은 이제 어딘가에서 홀로 헤매고 있을 디오를 찾는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디오를 찾는 일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작정하고 찾으려면 못 찾을 것도 없었을뿐더러, 급한 일도 아니었으니까.
사람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던가.
당연하다는 듯이 디오는 찾지 못했고, 한나절이 지난 후에 보인 것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베른의 얼굴뿐이었다.
“못 찾았다.”
“그렇군요.”
“별로 크게 신경 쓰지는 않나 보군.”
“어차피 만날 테니까요. 해야 할 일도 있고.”
“해야 할 일?”
“이만 제국으로 돌아가시죠.”
“상관은 없지만, 이곳에서의 일은 이제 다 끝난 건가?”
“그런 셈이죠.”
북쪽에 존재하는 데우스 교단은 사라졌다.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은 마쳤다는 이야기.
하지만 종교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이 이미 여기저기에 전파되어 있는 종교는 여전히 건재할 테고, 그것들도 모조리 싹을 뽑을 필요가 있었다.
이미 확인했듯이, [클리셰 붕괴율]에 가장 영향이 큰 것이 바로 그쪽이었으니까.
그리고 제국으로 가려는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혹시 오지랖 부리는 거 좋아해요?”
“갑자기 오지랖이라니?”
“지금부터 짜증 날 정도로 부려야 하거든요.”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존재한다.
현재의 [클리셰 붕괴율]은 10%가 조금 안 되는 수준.
어떻게 보면 어마무시한 수치였으나, 무려 ‘신’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말 그대로 개 박살이 났는데도 고작 이 정도라는 이야기는, 지금부터 아주 바쁘게 이 세계 곳곳을 다니며 깽판을 쳐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내 일, 남의 일 가리지 않고 말이다.
“……남의 일에 끼어드는 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그런데 왜지? 아니, 어차피 말해 줄 생각은 없겠지?”
이제는 아예 단정 지어 놓고 말하는 수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말해 줄 생각이 드는 건 아니었다.
“잘 아네요.”
굳이 말하자면 말하지 못할 것도 없었으나, 문제는 그 이후에 베른이 어떤 존재가 될지 전혀 예상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지금조차도 정상적인 [등장인물]의 틀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데, 그 이상이라면?
갑자기 폭주해서 미쳐 날뛰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자 그러면…….”
그렇게 길을 떠나려던 순간이었다.
“나도 데려가!”
멀리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마녀 일족의 아모스였다.
베른과 약간의 인연이 닿았던 그녀가 찾아온 것이다.
그녀의 얼굴을 본 베른의 얼굴이 보기 드물게 사색이 되었다.
“……거절한다.”
“좋아.”
“뭐? 반!”
“그런데 당연히 맨입으로 데려가 달라는 건 아니지?”
“……뭐?”
베른이 얼이 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으나, 내가 언제 저런 시선을 신경이나 썼던가.
「[선]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경멸 섞인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뇌물수수 혐의로 현재 자택 근신 중인 한 독자가 처음에는 다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걸 받아 줘.”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아모스가 꺼낸 것은 작은 유리구슬이었다.
“우리 일족에 내려오는 보물이야. 비록 일부지만, 이걸로 미래를 볼 수 있어.”
“겨우?”
“겨, 겨우라니? 제대로 들은 것 맞아? 미래를 본다니까?”
“네가 들은 게 맞아. 다른 건 없어?”
기껏 준비한 사람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 정도라면 [미리보기]를 통해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즉,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전혀 필요한 아이템이 아니라는 소리.
“이 정도는 되는 걸로 말이야.”
[끼릿!]
내 말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아자토스의 모습.
어느새 주변의 시야를 모조리 채워 버린 그 압도적인 모습에 아모스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호, 호문쿨루스? 저걸 어떻게? 그리고 저 덩치와 힘은…… 말도 안 돼. 과거에 온 세상의 분노를 집어삼켰던 ‘화’도 저 정도는 아니었어. 도대체 뭘 먹인 거야?”
“나도 몰라. 그래서 있어? 없어?”
“고작 그 정도라면…….”
‘고작?’
고작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저 유리구슬의 가치는 호문쿨루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정도인 듯 했다.
‘하긴, 미래를 본다는 게 흔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것도 필요한 사람에게나 그렇지, 나에게 있어서는 일부가 아닌 전체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저런 거에 목을 맬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때?”
그와 함께 그녀가 꺼낸 것은 낡고 꾀죄죄한 고깔모자였다.
“이걸 쓰면, 한 가지 특별한 마법을 쓸 수 있게 돼.”
“특별한 마법?”
“써 보면 알아.”
설명조차도 생략이라니.
어차피 그녀의 말대로 써 보면 알 일이었기에, 모자를 받아 든 내가 망설임 없이 그것을 머리 위에 썼다.
“아무 일도 없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눈앞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마치 의식을 잃어 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차.’
점차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미소로 번져 가는 아모스의 입가가 살며시 보였다.
설마…… 속은 건가?
그녀가 나에게 해를 끼칠 이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한 행동이었건만, 그러한 방심이 이런 사태를 불렀다.
‘응?’
그러나 이상하게도 흐려진 시야와는 달리, 내 의식은 오히려 또렷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감각적으로 무엇인가 이상했다.
마치 이 세상에 혼자만 버려진 느낌.
그리고 나는 곧 어째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봐! 애송이!”
“걱정하지 마. 마법이 정상적으로 발동했다는 뜻이니까.”
어느새 쓰러진 내 모습과 그걸 지켜보는 지금의 내 모습.
이 현상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유체이탈인가?’
그 사실을 떠올린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아모스가 말한 ‘특별한 마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고작 유체이탈 정도로 호문쿨루스와 맞먹는 ‘특별한 마법’이라고 칭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것 봐라.’
지금 내 상태는 누가 보아도 영혼 같은 상태였다.
그리고 으레 모든 이야기 속 영혼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특성.
‘요컨대 빙의라는 건가.’
그렇다면 무려 호문쿨루스에 맞먹는 ‘특별한 마법’이라는 게 영 모자란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가 실험을 위해서 살며시 몸을 움직이자, 허공에 둥실 떠오른 내 몸이 순식간에 아모스를 향했다.
내 영혼이 아모스에게 달려든 바로 그 순간, 갑작스럽게 손가락 하나를 세운 아모스가 나를 막아섰다.
[용도는 이미 깨달은 모양이네.]
마녀는 마녀라는 건지, 자기가 준 도구에는 당하지 않는 모양.
하긴, 그랬다가는 마녀 일족 사이에서 별 해괴한 사건들이 발생했을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만 돌아와.]
그녀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내 영혼이 원래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눈을 뜨자, 눈앞에 보인 것은 수염이 듬성듬성 지저분하게 나 있는 어느 아저씨의 턱이었다.
“애송이.”
「야설 빌런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브로맨스의 현장에 콧김을 내뿜습니다!」
“……부담되니까 조금 떨어져 주시죠.”
내가 베른의 턱을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모스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때?”
“꽤나 재미있던데.”
그 실용성은 둘째치고, 아무래도 재미있는 걸 손에 넣은 것 같았다.
“그렇지?”
“일행에 합류한 걸 축하해. 아모스.”
“내가 이름을 말했던가?”
“베른이 네 이야기를 그렇게 하더라고.”
그와 함께 붉게 달아오른 아모스의 얼굴.
이 사실을 정정할 생각 따위는 없는지, 그 광경을 바라보던 베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단이 그리울 지경이군. 그 말 많은 녀석은 묻지 않던 것도 척척 대답해 줬었는데.”
“별거 아니에요. 조금 진귀한 경험을 했을 뿐.”
어딘가 삐친 베른이 말했다.
“됐다. 어차피 듣고 싶은 생각도 없어.”
“정말로?”
“내가 농담이라도 하는 것 같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어볼게요. 정말로 안 궁금해요? 이번에는 대답해 줄 생각이 있는데.”
베른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궁금하긴 하다.”
거봐라.
그렇다면 내 대답 역시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역시 안 말해 줄래요.”
아무래도, 제국까지 돌아가는 길이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 * *
“돌아왔군.”
제국까지 돌아오는 길은 북쪽으로 떠날 때와 비교하면 무척이나 빨랐다.
마치 소설 내에서 자체적으로 점 세 개 찍고 생략이라도 해 버린 것처럼.
“제도까지도 이제 얼마 안 남았군.”
베른의 말처럼, 제도까지 가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인 상황.
그러나 내 목적은 단순히 제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잠깐만요.”
“왜?”
“저쪽.”
내가 가리킨 곳은 물살이 거칠어 보이는 어느새 강가였다.
그리고 그 강가에 마치 뛰어내리기라도 할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한 여성.
누가 보아도 눈치챌 수 있는 그 사건 사고의 냄새를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오지랖 부린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달리 다른 의미가 있겠어요?”
“……마음대로 해라.”
깊은 한숨을 내쉬는 베른을 뒤로한 채로 내가 강가에 서 있는 여성에게 다가섰다.
“괜찮아요?”
내가 그녀에게 말을 건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속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그러면 그렇지.
그렇다면 이후의 일은 간단했다.
“……누구?”
“고민이 있어 보여서. 나라도 괜찮다면 들어줄게요.”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오지라퍼] 속성이 거칠게 요동칩니다!」
“그게…….”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연 여성의 모습.
자기 사정을 순식간에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그 모습은 혹시나 안 시켰으면 어쩌려고 그랬나 싶을 정도였다.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어. 그는 고위 귀족의 자제였고, 나는 평민이었지만 우리는 신분의 격차를 넘어서 진심으로 사랑했었어. 목숨까지 위험할 정도의 맹렬한 남자 부모님의 반대가 있었지만, 우리는 그 수많은 시련을 마침내 이겨냈어. 결혼식 날, 그가 갑작스럽게 변하기 전까지는. 그는 갑작스럽게 결혼을 취소하겠다고 선언하고는, 그대로 다른 귀족 여식과 혼인을 맺겠다고 나섰어. 여전히 나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며 말이야.”
이것 봐라.
어딘가 기묘하게 뒤틀린 이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클리셰를 파괴하는 클리셰]가 요동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