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Chapter 21: 클리셰 파괴자 (4)
클리셰를 파괴하는 클리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꽤 재미있어지겠어.’
클리셰란 본디 식상함과 틀에 박힘을 상징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 개념이 등장한 후 시간이 지날수록, 식상함에 지친 일부 작가들이 이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클리셰를 파괴하는 일들을 해 왔고, 그 결과로 그 행위 자체들 역시도 클리셰가 되어 버렸다.
말하자면, 처음에는 참신했던 일도 반복하다 보면 결국 그 역시도 식상해진다는 이야기.
물론, 그토록 식상하다 하더라도 본디 뻔한 세계인 이곳에서는 이조차도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으나, [클리셰 붕괴율]이 10%에 다다른 지금은 아니었다.
나름대로의 변화가 생긴 셈.
내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난이도가 올라간 셈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클리셰를 파괴하는 클리셰]를 부수는 방법은 비교적 간단했다.
“내가 도와줄게요.”
“……네가?”
“그 남자가 다시 당신만을 바라보게 만들어드리죠.”
말하자면, 이 식상한 비틀기를 다시 원래 궤도로 이끌어 놓으면 된다는 소리였다.
물론, 그 과정은 철저하게 내 입맛대로였지만.
“그러니까 잠깐 몸 좀 빌릴게요.”
“뭐, 뭣?”
동화 속 신데렐라가 호박 마차 탑승을 끝내 거절당했다면, 콜이라도 불러서 억지로 태워 주면 그만 아니겠는가.
“눈 감아요.”
“지, 지금 무슨 소리를……!”
「야설 빌런이 당신의 대담한 발언에 흥분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야설 빌런의 추종자들이 반태식이 돌아왔다며 환호합니다!」
……아무튼, 이놈이나 저놈이나.
어쨌거나 이렇게 가만히 서서 저놈들이 하는 개소리나 들어줄 시간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내가 품에서 아모스에게 받은 고깔모자를 꺼내서 쓴 후, 그녀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이, 이름? 리나인데…….”
“고마워요.”
그리고는 맥없이 쓰러지는 내 모습에 그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얘, 얘야?”
그녀가 이미 쓰러진 내 몸을 흔들었으나, 이미 내 영혼은 제3자의 시점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보다는 낫군.’
처음에야 눈앞이 뿌옇게 변하고 의식도 흐려지는 둥 이질감이 컸으나, 역시 한 번 겪었던 일이라서 그런지 처음처럼 크게 이질적이지는 않았다.
‘슬슬 해 볼까.’
내가 리나의 몸으로 들어가자, 미지의 세계가 눈앞에서 나타났다.
아니, 그것은 미지의 세계라기보다는 마치 누군가의 기억 속처럼 보였다.
[꺅! 죄, 죄송합니다! 제발 목숨만은…….]
[이름이 뭐야?]
[리나, 리나예요.]
[보고 싶어, 리나.]
[사랑해, 리나.]
[감히 평민 주제에 내 아들을 만나? 그러고도 감히 무사할 성싶으냐?]
[그 어떤 시련이 와도, 우리 사이에는 끼어들 수 없어. 리나.]
[……너희 마음대로 해라.]
[펠릭스……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미안해, 리나. 나는 여전히 널 사랑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끝이야.]
마치 10분짜리 아침 드라마 요약본이라도 본 것 같은 기분.
과할 정도의 친절함을 보아하니, 그것은 남의 정신세계에 들어갔을 때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효과라고 보기보다는 아무래도 이 ‘특별한 마법’에 달린 일종의 효과 같았다.
‘기억까지 싹 훑어 내다니…… 꽤나 살벌한데.’
과연 호문쿨루스와 맞먹는 가치를 가진 마법답게, 단순한 육체 강탈을 넘어서 완벽한 타인을 연기할 수도 있게 기억까지도 읽어 내는 기능이 있는 듯 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일이 더 쉬워질 것은 자명했다.
그때였다.
[……당신 누구야?]
정신세계 안쪽에서 들려온 목소리.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는 굳이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세입자.]
[……뭐?]
[내가 약속했었지? 그 남자가 당신만을 바라보게 해 주겠다고. 그 소원을 이루어 주러 왔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
[그러면 이만 푹 쉬어.]
내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나를 막아섰던 리나의 영혼이 순식간에 정신세계 저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꺄아악!]
리나의 비명소리가 그녀의 정신세계 내부에 가득 울려 퍼졌으나, 어째서인지 그녀의 영혼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나를……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거야!]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 나름대로 이 마법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었다.
‘집주인은 집주인이라는 건가.’
고작 일반인에 불과한 그녀가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버틸 정도라면, 정신세계에서의 강함은 실제 가지고 있는 무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 했다.
‘하긴, 아모스한테는 시도조차 불가능했었지.’
하지만 그 역시도 여기까지.
내가 더욱더 강하게 그녀를 몰아붙이자, 결국 힘을 다한 그녀의 영혼이 정신세계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있다면 그냥 설득하는 게 낫겠군.’
말로 적당히 구슬렸다면 별 힘도 들이지 않았을 일이, 힘으로 억지로 밀어붙이려다 보니 괜히 진만 다 빠졌다.
그렇게 마침내 내가 그녀의 몸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자, 순식간에 다른 시야가 눈앞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짜증 날 정도로 산뜻한 강가의 풍경과 어느새 쓰러져 있는 원래의 내 몸.
“후우.”
내가 가볍게 몸을 움직여 보자, 가장 먼저 든 것은 이질감이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육체의 감각.
어딘가 몸이 무겁고, 또 불편했다.
「야설 빌런이 당신이 어떤 플레이를 보여 줄지 기대하며 눈을 크게 뜹니다!」
……너는 조용히 좀 하고.
어쨌거나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베른 일행은 이 자리를 떠났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의리 없기는.’
어차피 베른의 행적이야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황궁으로 향했을 테니, 나중에 필요할 때 다시 찾아가면 될 터.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슬슬 가 볼까.’
헤어진 전 남자친구에게, 피의 복수를 하러.
그렇게 내가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다시 떠올리고는 발걸음을 멈췄다.
“아.”
복수하면 떠오르는 가장 중요한 아이템이자 상징.
이것 없이는 감히 복수를 말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것.
“이걸 잊을 뻔했네.”
그렇게 살며시 내가 눈 밑에 찍은 그것은, 작은 점 하나였다.
* * *
란델 백작가.
제국 북동쪽에 위치한 라우르스 지방의 실질적인 패자로서, 그 권세와 영향력은 황궁에까지도 미친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런 [설정]이라는 거지 내가 이들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처음 듣는 놈들인데.’
하긴, 지금까지 상대했던 제국의 인사들이 영향력을 조금 끼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자기들이 다 해 먹는 수준이었으니 이런 변방에서 힘 좀 쓴다고 해서 내가 알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여기인가.’
어느새 도착한 란델 백작가의 정문은 그야말로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제아무리 웅장하다 하더라도 그 광경을 본 내 감상은 간단했지만.
‘지방 집값이 싸긴 한가 보네.’
그렇게 란델 백작가의 정문을 바라보고 있을 때, 백작가의 경비원으로 보이는 어떤 남자가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리나?”
자세히 보니, 리나의 기억 속에 있는 남자였다.
란델 백작가의 경비병 레오.
리나의 옛 고향 친구인 그는 ‘그 남자’를 제외하고는 적들뿐인 란델 백작가에서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게 도움을 준 일등 공신이었다.
물론, 그런 그라고 해도 거스를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리나라니요?”
내가 뻔뻔하게 묻자, 가까이서 내 얼굴을 본 레오가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아는 사람과 너무 닮아서…….”
이걸 또 믿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점의 효과는 확실한 듯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자를 속일 이유는 없었기에 내가 가볍게 웃었다.
“농담이야. 나 리나 맞아.”
“어쩐지!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어.”
고작 점 하나 찍었다고 저 정도로 호들갑이라니.
어쨌거나 내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백작님을 만나게 해 줘.”
“백작님을?”
“할 말이 있거든.”
리나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백작과 백작부인의 모습은 말 그대로 재벌집 시부모의 정석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돈 봉투를 건네고, 그 후에는 협박을 하고, 마지막으로는 결국 납득하며 두 사람 사이를 어쩔 수 없이 축복해 주는.
바로 그렇기에 지금 확인할 것이 있었다.
그 남자, 펠릭스 란델이 변해 버린 지금 그의 부모인 란델 백작과 백작부인은 어떻게 변해 있을지.
“괜찮겠어?”
걱정스럽게 물은 경비병 레오의 모습은 진심으로 보였다.
속으로는 여주인공을 짝사랑하면서도 고백 한 번 못하고 뒤에서만 몰래몰래 도와주는 소심한 조연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괜찮아. 안내 부탁해.”
“……알겠어.”
그렇게 레오의 뒤를 따라서 백작가로 들어서자, 겉보기와는 다르게 상당히 검소한 내부가 드러났다.
물론, 이 정도만 해도 평민에게는 질릴 정도의 광경이었으나, 수도에서 질릴 정도로 화려하고 쓸데없는 사치품들을 보아왔던 나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검소해 보였다.
마침내 백작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레오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백자님, 리나가 찾아왔습니다.”
“리나라고?”
그리고 벌컥 열린 문 앞에 보인 것은 뜻밖의 환대였다.
“오, 리나! 정말 잘 와 주었다.”
“어…… 네.”
“응? 잠깐…… 리나 맞느냐?”
“맞아요. 조금 분위기가 변했죠?”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어서 들어가자.”
시커먼 아저씨가 반기는 게 그다지 달갑지는 않았으나, 나는 이로써 한 가지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다.
[클리셰 붕괴]의 영향으로, 리나의 정인이었던 펠릭스 란델은 변했다.
사랑의 화신에서, 권력과 출세를 좇는 세속적인 인간으로.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예를 들면, 그들의 사랑을 처절하게 반대했던 그들의 부모라던가.
“잘 와 주었다니요?”
“펠릭스…… 부디 그 아이를 붙잡아다오.”
“예전에는 우리 사이를 그토록 반대하셨잖아요?”
내가 간신히 웃음을 참고서 일부러 떠보듯이 말하자, 란델 백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잘못했다. 펠릭스, 그 아이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건 리나 너뿐이었거늘…… 이대로 가다가는 그 아이에게 남은 것은 사랑 없는 황무지 같은 미래뿐이다. 남은 삶을 온통 권력과 출세를 좇아서 살며 한시도 마음 편히 살지 못하겠지. 이미 가진 것조차도 지키지 못한 채로 말이야. 부디 그 아이를 붙잡아다오.”
말하는 것을 보니, 로맨티스트도 이런 로맨티스트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나와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진심이죠?”
“물론이다.”
“그러면 저 좀 도와주세요.”
“내가 무얼 해 주면 되겠느냐?”
사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펠릭스는 권력과 출세를 원한다.
리나는 그런 펠릭스와 다시 이어지고자 한다.
하지만 리나는 가난한 평민이다.
너무나도 간단한 이 사실들을 종합하면 미치도록 간단한 결론이 나온다.
“오늘부터 저는 리나가 아니에요.”
“리나가 아니라니?”
“백작님께서, 저를 그렇게 만들어 주셔야 할 거예요.”
그제야 무엇인가를 깨달은 란델 백작이 손바닥을 탁 쳤다.
“하하! 알았다. 내가 최대한 빨리 준비해 보마.”
신분이 문제가 된다면, 그 신분을 갈아엎어 버리면 그만.
자, 막장 드라마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