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차 이후의 소설 속-93화 (93/164)

◈ 93화 Chapter 21: 클리셰 파괴자 (5)

펠릭스 란델.

본디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의 왕자님 역할이었으나 [클리셰 붕괴]의 영향으로 세속적인 인물로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자.

그런 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바로 그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쥐어 주는 것이었다.

“리안나 세빌스턴. 오늘부터 이게 제 이름이에요.”

어느새 화려한 드레스로 치장한 내 모습을 바라보며 란델 백작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정말로 세빌스턴 후작가의 이름을 사용해도 되는 것이냐? 철저하게 정보를 차단하기는 할 테지만 혹시라도 이 사실을 후작가에서 알기라도 한다면…….”

“그 점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다 이미 손을 써 놓았으니.”

사실 그딴 건 해 두지 않았지만, 그쪽이라면 혹시나 문제가 생기더라도 충분히 수습할 수 있었기에 별로 신경 쓸 사안은 아니었다.

“백작님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약혼 날짜나 잡아 주세요. 출세를 원하는 그 남자라면 세빌스턴 후작가와의 혼담을 결코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알겠다. 그런데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네가 조금 변한 것 같구나.”

당연한 의문이었으나, 이럴 때는 이미 준비된 대답이 있었다.

“변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알고 보면 리나는 참 불쌍한 여자다.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서 마침내 진실된 사랑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버림받은 여자.

상황이 그러했으니, 진실이 어쨌건 간에 그런 여자가 조금 변했다고 해서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구나. 미안하다.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괜찮아요. 어서 그와 만나고 싶네요.”

“최대한 빨리 자리를 만들어 보마.”

그때였다.

“……리나?”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 서 있는 것은 굵직한 남성미 넘치는 선이 인상적인 어느 남자였다.

리나의 기억 속에 너무나도 강렬하게 새겨져 있는 남자.

펠릭스 란델이었다.

“저를 아세요?”

“……아! 죄송합니다. 아는 사람과 너무 닮아서 잠깐 착각했습니다. 실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할게요. 펠릭스 란델 경.”

“제 이름을 알고 계시는군요. 그렇다면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리안나 세빌스턴이라고 해요.”

성의 없을 정도로 대충 지은 이름이었으나, 펠릭스가 반응한 것은 그 이름보다도 다른 것이었다.

“……세빌스턴이라면 혹시?”

이때다 싶은 란델 백작이 끼어들었다.

“마침 잘됐구나.”

“잘됐다니요?”

“세빌스턴 후작가에서 혼담이 들어왔다.”

“그렇다면 혹시 이분이…….”

“맞다.”

그와 함께 강렬하게 느껴지는 시선.

그 시선은 참으로 오묘했다.

출세에 대한 열망, 부에 대한 욕심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까지.

“실례가 많았습니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펠릭스 란델이라고 합니다.”

자, 여기까지는 꽤나 무난한 수순.

하지만 이렇게 무난하고 재미없게 흘러간다면 굳이 복수라는 타이틀을 내걸지는 않았을 것이다.

“별로네요.”

“……네?”

“변방의 유력가라고 해서 꽤나 기대했는데, 이곳도, 당신도 모든 것이 실망이라고요. 펠릭스 란델 경.”

상대방의 안중이라고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신랄한 비난.

그야말로 싸가지라고는 조금도 없는 후작가 영애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펠릭스 란델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 역시 듣던 대로 세빌스턴 후작가의 권세가 대단하군요. 후작가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주의해 주세요.”

“……하하.”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는 이 정도의 모욕 정도는 참아 주겠다는 듯이 있는 펠릭스의 모습.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끝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무슨 남자가 자기 가문을 욕보이는데도 가만히 있어요? 재미도 없고, 패기도 없군요. 정말이지 실망스럽기 짝이 없어.”

그와 함께 눈에 띌 정도로 어두워진 펠릭스의 낯빛.

하지만 복수는 기껏해야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뭐해요? 어서 가 보지 않고. 아직 더 할 말이 남았나요?”

“……다음에 뵙죠. 레이디 세빌스턴.”

“그러든가 말든가.”

“…….”

눈에 보일 정도로 주먹을 꽉 쥐는 펠릭스의 모습이 보였으나, 나는 어차피 그가 이 혼담을 거절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랑을 버릴 정도로 거대한 출세에 대한 그의 욕망은 고작 이 정도로 꺾을 수 있는 것이 아닐 테니까.

‘그래서 이용해 먹기 더 편하지만.’

결국 그 욕망은 자신의 목을 죄어 갈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겠지.

자신이 얻은 것이 고작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버렸는지.

「일부 독자가 당신의 사악한 미소를 보며 몸서리를 칩니다!」

「막장 드라마를 애청하는 한 독자가 익숙한 전개에 흥미를 표합니다!」

* * *

그 후, 혼담은 더없이 빠르게 진행됐다.

약혼식을 가장한 가벼운 사교 파티.

의미 없는 다과회.

그 외의 몇 가지 행사를 거치고 나자, 마침내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와서 앉아.”

내가 부른 이는 다름 아닌 리나의 고향 친구인 경비병 레오였다. 내가 그를 이런 늦은 밤에 침실로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시키실 일이라도?”

“있지. 적당히 자리 잡고 시간 지나면 알아서 가.”

“예? 그게 무슨…… 혹시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서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사실, 리나의 목적은 이미 이루었다.

이제 결혼식만 올린다면 공식적으로 리나는 펠릭스의 아내가 될 것이고, 이제 그녀에게 몸만 돌려준다면 그녀에게 있어서는 나름대로의 해피엔딩이었다.

하지만 그런 순수하고 반전 없는 전개가 내 성에 찰리가 없었다.

“앞으로 네가 밤에 계속해서 내 방에 들락날락하게 되면, 싫어도 이상한 소문이 날 수밖에 없겠지.”

“하, 하지만 그러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혹시라도 파혼이라도 한다면…….”

“못 해.”

“네?”

“못 한다고. 그 남자는 이미 출세의 노예나 다름없으니까.”

레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어째서…… 리안나 님…… 아니, 리나 너는 펠릭스 님을 진심으로 사랑했잖아?”

“그래서야.”

“……뭐?”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야만, 그 남자가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리나의 기억을 보았을 때, 나는 분명히 일부지만 그녀가 겪었던 지옥을 일부나마 맛볼 수 있었다.

그녀가 어째서 죽으려고 했는지.

만약 이대로 이들이 무사히 결혼하게 되고, 리나가 몸의 주도권을 되찾는다면 이후의 이들은 꽤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행복은 거짓이다.

리나는 펠릭스를 사랑했으나, 펠릭스는 리안나의 배경을 사랑할 뿐이었으니까.

“앞으로 그 남자는 지옥을 살게 될 거야.”

자신이 버리고 온 첫사랑과 똑같이 생긴 얼굴의 아내가 매일 같이 다른 남자를 침실로 부른다.

출세와 권력을 위해서 사랑을 버리고 온 펠릭스에게 있어서, 이것보다도 더한 지옥은 존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릭스에게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출세를 위해서 체면과 평판을 외면할 수 없는 그였기에, 펠릭스는 그저 묵묵히 그 지옥을 걸어갈 것이다.

매일 같이 아내가 사랑한다고 말해도, 그들 사이에 사랑의 결실인 자식이 생겨도, 그 지옥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리안나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그는 진정한 파멸에 닿으리라.

「막장 드라마를 애청하는 한 독자가 치정극의 정수를 보여 주는 당신의 행보에 몸서리를 칩니다!」

“……리나, 아니, 너…… 대체 누구야?”

어느새 얼굴이 사색으로 질린 레오를 바라보며 내가 싱긋 웃었다.

“걱정 마. 악마는 아니니까.”

내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족이라면 모를까.”

「[클리셰를 파괴하는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9.99%」

* * *

목적도 이루었겠다, 그 이후 일은 굳이 지켜볼 필요도 없었다.

“이제 돌려줄게.”

내가 리나의 몸에서 빠져나가자, 어느새 결혼식에 선 리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죽기 위해서 강가에서 서성이고 있던 그녀의 앞에 난데없이 사랑하는 남자가 서 있고, 주변에서 그들의 결혼을 축복하고 있었으니 그녀가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꿈인가?”

그리고 이내 펠릭스를 바라보며 울음을 터트린 리나의 모습은 얼핏 보면 전형적인 해피엔딩으로 보였으나, 사실은 새드엔딩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파국의 시작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모르는 리나는 행복할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옆에 있고, 또 그 남자가 자신만을 바라볼 테니까.

설령 그것이 사랑이 아닌, 의심과 배신감으로 가득 찬 원망의 시선일지라도.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

첫 번째 오지랖도 끝났겠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제국으로 돌아가서 이런 소소한 일 말고 더 스케일 있는 일에 끼어들 필요성이 느껴졌다.

‘뭐,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지만.’

하지만 내가 여기 재밌자고 서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할 일은 빨리빨리 하는 것이 좋았다.

“제도까지 가냐고? 아서라 애송아. 돈은 있고?”

“두 배로 쳐 주지.”

“어서 오십시오. 손님.”

방금 전까지 재미있는 사고를 치고 와서 그런지, 제도까지 가는 길은 꽤나 지루했다.

하지만 누군가 그러던가.

그 지루함이야말로 어제 죽어 간 누군가가 그토록 바라던 평화라고.

마차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나를 깨운 것은 마부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손님, 죄송하지만 잠깐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응?”

마차 바깥의 풍경에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왜인지 모르게 붉어진 하늘이었다.

처음에는 석양인가 싶었지만,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달랐다.

그래, 마치 핏빛 같았다.

‘무언가 있다.’

모르긴 몰라도, 제도 위에 떠 있는 저 핏빛 하늘은 분명히 무엇인가의 징조였다.

그것도 굉장히 불길한.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그러면 그렇지.

그렇다면 이제 저 현상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 알아낼 차례였다.

“서두르죠.”

“하지만 손님,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게 아무래도 가지 않는 것이…….”

“세 배.”

“꺼림칙한 기분이 느껴지지 않을 속도로 모시겠습니다.”

마차가 제도에 점점 다다를수록, 하늘을 가득 감싼 붉은 기운은 점점 더 짙어져 갔다.

그리고 그 불길함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말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히이이잉!]

“워워! 왜 이래!”

미쳐 날뛰기 시작한 말들이 마침내 고삐를 풀어 버리고 도망가자, 이를 제지하지 못한 마부가 망연자실했다.

“저…… 손님, 죄송하지만 갑자기 말들이 도망가 버려서…….”

“어쩔 수 없죠.”

말들까지 도망가다니, 아주 불길함과 관련된 플래그는 모조리 꽂아 버릴 기세였다.

「공포영화를 애청하는 한 독자가 넘쳐나는 [사망 플래그]에 당신이 이대로 발걸음을 돌리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걸음을 옮겨서 제도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무섭도록 공허한 제도의 풍경이었다.

‘아무도 없군.’

제국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제도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전투나 침입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영문 모를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게 내가 제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으으…….”

겁에 질린 목소리.

그 목소리의 출처는 뒷골목에서 웅크리고 있는 한 정신 나간 노인이었다.

“이봐요.”

“으아아아……!”

“무슨 일이 있었죠?”

“악마…… 그건 악마야…….”

‘악마라고?’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황궁 쪽으로 발걸음을 서두르자, 점차 짙어지기 시작한 붉은빛 안개 사이로 쓰러져 있는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이곳에서 보기 드문 짙은 검은 머리와 눈동자.

그 익숙한 모습의 정체는 다름 아닌 블랙 드래곤 루였다.

“루!”

그때였다.

“빼앗았으면, 언제나 빼앗길 각오를 해야 해.”

어느새 눈앞에 나타난 전신에 붉은 기운이 감도는 한 남자.

내가 그 남자를 모를 리가 없었다.

이 세계의 주인공이자, 진정한 용사.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디오.”

바로 그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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